소설리스트

디버프로 무림정복-22화 (22/115)

제22화.

인장을 비춰 본 결과.

[황룡출]

구분 : NPC

종족 : ?

성별 : 수컷

나이 : ?

레벨 : 600

등급 : 현경

소속 : 금의위

직위 : 기열장군(氣烈將軍)

특징 : 황궁삼대고수 중 하나. 금의위 대도독의 오른팔이자 현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사나이.

출신성분이나 정체에 대해서는 철저히 베일에 휩싸인 인물이며, 말수가 매우 적다.

뭐?

600레벨???

말문이 막혀 말이 안 나왔다.

600레벨이면 판타지 서버에서도 한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초강자.

현경의 경지―그랜드 마스터―가 500레벨부터다.

600레벨이면 현경의 경지에 오른 뒤에도 꾸준히 수련을 쌓아 경험까지 갖추었다는 뜻.

‘인간 한정으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겠는데?’

어우야.

저 주먹에 스치기라도 하면…….

게다가 덩치도 정말 산(山)만 하다.

한 190센티미터는 되려나?

몸무게도 130킬로그램은 넘어 보인다.

저 정도면 3대 800도 가뿐할 것 같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경험상 현경의 경지에 오르면 반박귀진(返璞歸眞)의 상태가 되어 강함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된다.

힘을 숨긴 찐ㄸ… 가 아니라!

힘을 숨긴 강자가 되는 거다.

무슨 소리냐면 <통찰의 인장>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는 게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겉으로 보기에 평범해질 뿐 아니라 우리 게이머들이 사용하는 시스템조차 교란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 황룡출이란 인간은 아직 저레벨인 내 <통찰의 인장>에도 레벨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마치 보란 듯.

듯이가 아니라 보라는 거 맞겠지.

저건 대놓고 과시하는 거다.

자신의 <강함>을.

황룡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깊게 눌러 쓴 투구 때문에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이목구비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진짜 탱크 같은 인간이네.’

호기심이 들었다.

저런 무지막지한 괴물과 겨뤄 보면 어떤 느낌일까?

헉헉!

벌써부터 흥분된다.

나중에 꼭 한번 싸워 봐야지.

얼마나 무지막지할지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는 지금 상태로는 툭 부딪쳐도 사망하겠지만.

에라이.

강자와의 대결은 개뿔.

‘아차. 늦었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곧 경험치들… 이 아니라!

우리 선배님들이랑 비무할 시간이거든.

어딜 감히 하늘 같으신 선배들을 기다리시게 만들겠어?

“가자, 햄찌야.”

“뀨! 알겠다!”

빨리 레벨업 하러 가야지.

총총총.

아 씨.

걸음걸이 왜 이래?

중성화수술 때문인가?

자꾸 아녀자처럼 걷게 되잖아!

내 땅콩 돌려내!

* * *

“음?”

황룡출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자네 왜 그러나. 갑자기 걸음을 다 멈추고?”

함께 길을 걷던 금의위 대도독 쾌흥태가 황룡출에게 물었다.

“어디선가 투지(鬪志)가 느껴졌습니다.”

황룡출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고, 묵직했으며, 거칠고, 또한 건조했다.

인간이 아닌 쇠로 이루어진 철인(鐵人)의 목소리처럼.

“투지가 느껴진다?”

“예, 대도독.”

“감히 자네와 싸울 의지를 드러낸 자가 있다는 말인가? 이곳에?”

쾌흥태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환관들과 궁녀들이 어슬렁거리고 있긴 했지만 특별히 수상쩍은 움직임은 없었다.

“자네가 잘못 느낀 건 아니고?”

“아닙니다.”

“허허.”

쾌흥태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저 그런 고수가 결코 아니었다.

비록 황룡출만큼 강한 건 아니었지만, 그 역시 황실삼대고수.

황제 직속 무력집단인 금의위 수장이자 대도독답게, 쾌흥태의 무력 수위는 무려 화경.

그것도 어떠한 벽에 부딪힌 상태로, 화경의 끝자락까지 도달한 강자였던 것이다.

“요즘 신경이 좀 날카로웠던 것 아닌가. 임무가 많지 않았는가.”

“제게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쾌흥태는 황룡출의 물음에 대꾸하지 못했다.

황룡출은 감정이 거의 없는 존재.

예민해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그거 이상하군. 자네 말처럼, 자네가 예민해졌을 리는 없고.”

“분명히 느꼈습니다. 강한 투지를.”

“음.”

쾌흥태는 혹시나 싶어 주변을 한 번 더 돌아보았지만, 역시나 눈여겨볼 만한 사람은 없었다.

“주변 경계를 강화하도록 하겠네. 자네와 같은 고수가 헛다리를 짚었을 리는 없으니.”

“아닙니다.”

황룡출이 고개를 저었다.

“투지는 느껴졌지만 적개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순수한 호기심에 가까웠습니다.”

“그런가?”

“특별히 경계할 만한 요소는 없는 것 같으니, 잊어 주십시오.”

“그럴 순 없네.”

이번엔 쾌흥태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와 같은 절대고수가 투지를 느낄 정도라면, 필시 힘을 숨긴 고수가 숨어 있다는 것일 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라도 경계를 강화해야겠네.”

“대도독의 뜻이 그러하시니 굳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황룡출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허허. 도대체 얼마나 강한 고수가 숨어 있기에 황룡출이 이렇게까지 반응한단 말인가? 평소에는 말 한마디 없는 존재이거늘. 설마 동창에서 비밀병기라도 키워냈단 말인가?’

무력집단인 금의위와 정보기관인 동창은 예로부터 앙숙이었다.

겹치는 임무가 많은 데다가, 권력과 가장 가까운 황제 직속 친위대인지라 권력다툼이 잦았다.

구성원들도 환관과 무인이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기도 했고.

그래서 동창과 금의위는 자주 권력다툼을 벌였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요즘과 같이 후계 구도가 불안정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동창제독 견쌍섭은 황태자 전하가 아닌 삼황자를 지지하는 모양새다. 당분간 동창의 움직임을 주시해야겠군. 동창에서 삼황자를 밀기 시작하면 피바람이 불어닥칠지도 모르니.’

연오랑은 몰랐다.

자신이 본의 아니게 던진 돌멩이(?)가 금의위 대도독 쾌흥태의 경계심을 자극했다는 것을.

그저 황룡출의 절륜한 강함에 자기도 모르게 호승심을 드러냈던 것뿐이었건만….

* * *

비무가 끝났다.

[알림: 축하드립니다!]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림: 33레벨 달성!]

“수고하셨습니다아아아아아아!”

하늘 같으신 선배님들께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를 박았다.

“끄으응. 끙.”

“내 팔. 내 파아알.”

“허, 허리가. 크윽.”

선배님들께선 땅바닥에 드러누워 이 후배에 대한 사랑을 몸소 드러내 주셨다.

아아.

따뜻하다.

선배님들께서 이 후배를 얼마나 아끼시면 아낌없이 몸을 던져 경험치를 채워 주시는 걸까.

그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보내주신 아낌없는 사랑,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오랑이 이놈.”

제갈참 아저씨가 내게 다가와 다그쳤다.

아 좀!

그렇게 부르지 좀 마요!

오랑우탄 된 기분이라고!

“살살 하라지 않았느냐. 살살.”

“말씀드렸다시피….”

“무공에 대한 네 녀석의 마음가짐은 나 역시 존중하는 바이다. 하나 선배들은 저리 다져 놓으면 어쩌자는 말이냐. 아무리 그래도 선배는 선배 아니더냐.”

“살살하면 의미가 없죠.”

“뭐라?”

“기왕 지는 거, 선배들도 뭔가 얻어 가야죠. 졌는데 얻는 것도 없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게 무슨 궤변이냐?”

“저한테 언제 맞았는지, 어떻게 맞았는지, 뭘 하다 맞았는지. 이걸 잘 생각해 보면 강해질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텐데요?”

“그건.”

후후.

말문 막히시는 것 좀 봐.

“무공을 겨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나고 난 다음에 되짚어보는 게 더욱 중요한 거 아닙니까?”

“마, 맞다.”

“비무인 게 다행이죠. 되짚어보고 스스로를 갈고 닦을 기회라도 있잖아요.”

“그것도 맞다.”

“실전이었어 봐요. 갈고닦을 기회가 어딨습니까? 그냥 꽥! 하고 죽는 거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 다 진심이었다.

경험치 챙긴 거 맞고.

실전 감각도 되살릴 겸 몸을 푼 것도 맞다.

근데 맹세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심심풀이 삼아 선배들을 두들겨 팬 건 아니었다.

선배들의 부족한 부분, 허점을 위주로 공략했다.

선배들 중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히 무언가를 얻어 갈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 깊은 뜻을 알아줄 선배들은 나에게 고마워할지도?

한 명도 없는 건 아니겠지?

설마.

“끄응.”

제갈참 아저씨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알았으니 더는 뭐라 하지 않으마.”

“헤헤헤.”

“아무튼, 비무는 오늘까지다. 내일 요괴들이 재입고된다는 소식을 받았다.”

“오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그리 좋으냐?”

“좋고말고요! 안 그래도 마른오징어 엑기스 짜내는 기분이었는데 잘됐네요.”

마침 선배들이 주는 경험치가 줄어들어서 레벨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잘됐네.

“액기수우? 그게 무슨 말이냐?”

“진액이요, 진액.”

맞다.

이런 단어 못 알아들으시지.

“벌써 선배들과의 비무에 흥미를 잃은 게냐.”

“제가 좀 쉽게 질려 하는….”

스타일?

타입?

에라, 모르겠다.

“제가 좀 바람둥이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냐?”

“질렸다고요.”

“쉽게 질려 하는 스타일이란 말이더냐?”

엥?

스타일이란 말은 어떻게 아세요?

프로게이머는 못 알아들어서 프로게이라고 하더니!

하긴.

게이머들이랑 자주 얘기하다 보니 배우게 된 건가?

하긴.

판타지 서버에서도 NPC들이 게이머들이 쓰는 말을 배워서 써먹곤 했으니까.

* * *

비무를 끝내고 동창무고로 향했다.

‘비급 수정해야지.’

두목님이 각종 특혜를 제공해 주고 있는 만큼, 나도 그만큼의 밥값은 착실하게 하는 중이었다.

받은 만큼 일은 확실히 해 준다.

그게 내 신조다.

그래야 고객님께서 다시 찾아주시지.

거래에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신뢰도 중요하단 말씀!

문제는 규화보전이라는 심법이 더럽게 복잡하고, 더럽게 까다로웠다는 거다.

‘어우야. 아주 깜지가 따로 없네.’

수정 중인 비급을 보니 웬 낙서장 같다.

규화보전은 나름 고오급 심법이라 그런지 매우 복잡해서, 나조차도 수정이 쉽지 않았다.

우주근원진기의 기 흐름을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없었다면 엄두도 못 냈겠지.

이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겠는데?

슥, 스윽.

말달필 어르신과 나란히 앉아 비급을 수정하는데,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융친왕 전하 납시오!”

현역 동창 요원들 수십여 명이 샤샤샥! 동창무고 안으로 들어와 좌우로 늘어섰다.

“여기가 동창무고입니까? 동창제독?”

“예, 전하.”

시선을 돌려보니 화려한 옷을 입은 귀공자와 두목님이 나란히 동창무고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어?

두목님이 여긴 웬일이시지?

저 귀공자는 누구야?

“앗! 삼황자 전하.”

말달필 어르신이 벌떡 일어나 귀공자를 향해 납작 엎드렸다.

“오랑이 이 녀석. 무엇 하느냐. 삼황자 전하이시다. 얼른 예를 갖추지 못할까.”

어느새 나타난 제갈참 아저씨가 내게 속삭였다.

“아, 예.”

얼떨결에 몸을 낮추고 예를 취했다.

그래, 내려놓자.

여기서 난 일개 환관, 아니 고자일 뿐이니까.

초심을 찾는 거다.

이러려고 부캐를 판 건데, 별수 있나.

나중에 강해지면 어림도 없다.

지금은 제갈참 아저씨랑 두목님 얼굴을 봐서라도 예를 갖추는 거지 뭐.

“많이 낡았습니다. 정보기관인 동창의 무공비급들을 관리하는 곳인데, 이리 열악해서야 되겠습니까? 허허.”

“최근 황제 폐하께서 금의위를 총애하시는지라 예산을 많이 받지 못하였사옵니다. 그저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삼황자의 지적에 두목님이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좀 묘한데?’

두목님이 삼황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뭔가 수상했다.

저 올라간 광대도 수상하고.

저 올라간 입꼬리도 수상하다.

‘어?’

전에도 본 적이 있는 눈빛이었다.

연애 시절 날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이 딱 저랬지? 아마?

뚝, 뚝, 뚝.

삼황자를 바라보는 두목님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게 어째…….

‘좋아하는 거였어?’

어쩌면 두목님이 규화보전을 고쳐서 진짜 여자가 되려는 이유가 삼황자 때문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