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버프로 무림정복-23화 (23/115)

제23화.

이게 무슨 일이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하고 무자비한 첩보기관의 수장 동창제독 각하께서 무려 삼황자 전하를 사랑한다고?

에이, 설마.

이게 말이 돼?

아니겠지.

“내 아바마마께 말씀드려 예산을 더 할당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소.”

“어머, 그러실 필요 없사옵니다. 시설이 중요한 것이 아니어요. 비급에 적힌 무공이 중요한 것이지, 겉치레는 의미 없답니다.”

“허허. 동창제독께서는 어찌 그리 검소하시오.”

“화무십일홍이라 하였사옵니다. 사람 눈은 보이는 것에 약하니, 쉽게 현혹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어요. 사람이나 사물이나 중요한 건 내면이겠지요.”

“동창제독의 가르침에 크게 개안하는 기분이오.”

하도 놀라서 두목님과 삼황자가 나누는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삼황자를 바라보는 두목님의 눈빛이 너무나도 애틋하다.

‘이게무슨일이야.이게무슨일이야.이게무슨일이야.이게무슨일이야.이게무슨일이야.이게무슨일이야.이게무슨일이야.이게무슨일이야.이게무슨일이야.이게무슨일이야.이게무슨일이야.’

이거 문제 되는 거 아닌가?

동창제독이 아무리 높은 지위라지만 어쨌거나 환관은 환관이잖아?

큰일 나는 거 아냐?

“전하, 여기는 연오랑 교육생이랍니다.”

내 속도 모르고!

맘도 모르고!

두목님이 태연하게 날 삼황자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최근 동창에서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답니다.”

“그렇소? 교육생 신분에 벌써부터 중요한 임무를 맡다니.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인재구려.”

삼황자가 나를 돌아보고 흔쾌히 악수를 청했다.

“정말로 반갑네. 나는 융친왕(融親王) 주진이라 하네.”

오래간만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알고 계셨나요?]

친왕(親王)이란 황제의 직계 자식에게만 내려지는 왕의 작위로서, 황태자 다음으로 황위 계승 서열이 높은 황족을 뜻한답니다!

직계라도 황위 계승 서열 후순위이거나, 혹은 방계라면 군왕(郡王)의 작위를 받습니다!

“아, 예. 교육생 연오랑입니다.”

“부디 앞으로도 우리 대명제국의 번영을 위해 힘써 주시게. 내 크게 기대하겠네.”

이제 20대 후반쯤 되었을까?

훈훈하게 잘생긴 얼굴이다.

게다가 인간성도 됐는지, 한낱 교육생에 불과한 내게 덕담과 함께 악수까지 청했다.

오?

사람 좀 괜찮은데?

별의별 X신 같은 왕족, 황족 놈들 많이들 봤었는데.

“연오랑 교육생.”

두목님도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임무는 잘되어 가고 있나요?”

“무, 물론이죠.”

“저는 연오랑 교육생을 믿어요. 임무를 잘 완수하리라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 하하하하!”

이거 쪼는 거 맞지?

그렇지?

빨리 비급 수정해서 진짜 여자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진짜 어질어질하네.’

* * *

융왕―보통 친은 빼고 부른다―과 두목님은 동창무고를 대충 슥 둘러보고 떠났다.

아무래도 시찰을 나왔던 모양이다.

아니, 이런 경우엔 데이트라고 해야 하나?

우리 융왕 전하께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계시는 눈치던데?

“야, 햄찌야.”

“뀨?”

혹시나 싶어 햄찌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녀석은 두목님이랑 같이 지낸 시간이 꽤 되니까, 나보다는 잘 알겠지.

“너 혹시 두목님이 융왕 좋아하는 줄 알았냐?”

“뀨우?”

웬 누런 종이에 빨간 붓으로 낙서나 하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돌렸다.

근데 이 자식은 종이 아깝게 왜 낙서질이지?

그것도 빨간 붓으로?

설마 빨간 글씨로 내 이름이라도 쓰려는 건가?

그럼 안 되는데.

빨간색으로 이름 쓰면 죽는단 말야.

“주인놈 눈치챘냐?”

“으응?”

“어떻게 알았냐? 뀨우?”

“맞지? 그거 맞지?”

“그렇다! 뀨!”

“그래서 여자가 되려고 하는 거냐? 두목님이?”

“뀨! 그렇다!”

“괜히 나한테 기대를 걸었던 게 아니구나.”

이제야 두목님 심정이 좀 이해가 간다.

안 그래도 여자가 될 방법이 없어서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내가 떡하니 나타나 주니 이게 웬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인가 싶었겠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한테 규화보전의 비급을 수정하라고 부탁했을 테고.

아아.

이게 <사랑>이라는 건가?

“뀨! 주인놈 근데 어떻게 알았냐!”

“삼황자를 바라보는 두목님 눈빛이 딱 그렇던데? 눈에서 막 꿀이 뚝뚝 떨어지는데.”

“뀨우! 주인놈 눈치 빠르다! 뀨!”

“야. 저 정도면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다 알겠다. 저 눈빛을 보고 어떻게 몰라. 근데… 괜찮은 거냐?”

“뀨?”

“아무리 동창제독이라지만 황자를 사랑해도 돼? 환관인데?”

“뀨! 상관없다! 뀨우!”

“왜?”

“어차피 여기 사람들 사랑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뀨우!”

“아?”

“알아도 그냥 주책바가지 환관이 주제를 모르고 속앓이한다고만 생각한다! 뀨!”

“아예 가능성이 없는 얘기라 딱히 신경들을 안 쓴다는 건가?”

“그렇다! 뀨! 어차피 환관들 여자 같은 구석 있다! 뀨우! 불쌍하니까 짝사랑 정도는 다들 이해해 주는 눈치다! 뀨!”

그런 분위기야?

“하긴.”

햄찌 놈 말을 들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환관도 사람인데. 안타깝게 됐네. 땅콩 없는 것도 서러운데. 남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도 아닌 취급 받으면 속상할 만하지.’

왜일까?

이 알 수 없는 연민과 동질감은?

나도 땅콩이 없어서 그런가?

흑흑.

괜히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두목님은 행운아다.

규화보전을 수정해 줄 사람을 만났으니까.

두목님!

조금만 기다리십쇼!

제가 열심히 수정해서 두목님을 진짜 여자로 만들어 드릴게요!

두목님의 그 사랑!

제가 응원합니다!

‘속도 좀 내보자.’

다시 규화보전의 비급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목님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고 나니까 마음이 급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수정본을 전달해 주고 싶네?

슥슥.

슥슥슥.

다시 수정 작업에 집중하는데 햄찌 놈의 붓질이 묘하게 거슬렸다.

“야.”

“뀨우?”

“너 그 누런 종이 가지고 뭐 하냐?”

“뀨? 괴황지 말이냐?”

“괴황쥐?”

“괴황지다! 뀨!”

“그게 뭔데?”

“주인놈은 괴황지도 모르냐? 뀨! 이거 부적 만들 때 쓰는 종이다! 뀨우!”

“그럼 그 빨간 붓이랑 물감은?”

“이거 경면주사다! 뀨! 이걸로 괴황지에 술법 주문이랑 그림 그려 넣으면 부적이 되는 거다! 뀨우! 이거 봐라! 햄찌 부적 만든다! 뀨!”

“부적?”

“그렇다! 뀨우!”

“어디 봐봐.”

“뀨! 봐라! 주인놈이니까 특별히 보여준다! 뀨우!”

햄찌가 누런 괴황지에 빨간색 경면주사로 쓴 부적을 보여 주었다.

“야! 이게 무슨 부적이냐? 그냥 낙서지! 햄스터가 쳇바퀴를 굴리고 있는 그림이잖아!”

어휴.

니가 그럼 그렇지.

부적은 개뿔.

“캬아아악! 주인놈 지금 햄찌 무시하냐! 캬아아아악!”

“종이랑 물감 아깝게 장난치지 마라. 그거 자원 낭비니까.”

“캬아아악! 아니다! 이거 햄찌가 만든 부적 맞다! 성능도 좋다! 캬아아악!”

“뻥치시네. 야. 거슬리니까 여기 앉지 말고 저기 가서 놀아. 나 지금 집중해야 되니까.”

“캬아아아악! 주인놈 지금 해 보자는 거냐! 캬아아아악!”

“이게 진짜.”

아!

거슬린다!

거슬려!

“거 쥐새끼가 찍찍찍찍찍 뻔뻔하게 시끄럽네.”

“캬아악?”

“됐다. 너랑 드잡이질이나 해서 뭐 하겠냐. 오늘은 바쁘니까 나중에 놀아줄게.”

녀석이 이빨을 드러내고 털을 곤두세우든 말든 규화보전을 수정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두목님 사연이 너무 안타깝잖아.

* * *

같은 시각.

동창 교육생들의 숙소는 의원이 따로 없었다.

실제로, 의원들과 의녀들이 교육생들을 치료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 실제 의원을 방불케 할 지경이었다.

“끙. 끄응.”

“으으으으. 허리야. 으으.”

“아이고 삭신이야.”

“멍이 가시지를 않네, 가시지를 않아.”

연오랑에게 몇 날 며칠을 두들겨 맞은 덕분에, 교육생들은 밤마다 끙끙 앓으며 고통스러워했다.

덕분에 본래 예정되어 있던 교육 훈련이 모두 취소되어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음은 물론, 교육생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그건 단순히 아파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 감히 선배들 알기를 우습게 알아? 이런 젠장!”

“하늘 같은 선배들을 이렇게 두들겨 패다니! 연오랑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이제 갓 교육생으로 들어온 주제에 우릴 무시해? 선배들에 대한 존경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 같으니!”

사실 몸이 아픈 것보다 자존심이 상한 게 훨씬 컸다.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그것도 교육생으로 들어온 지 2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놈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건 그들의 자존심을 산산조각으로 부숴 놓았다.

3년 정도 이곳 동창에서 훈련받은 교육생들로서는, 연오랑을 곱게 봐주려야 봐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도저히 못 참겠다!”

코가 반쯤 뭉개진 교육생 오동용이 벌떡 일어나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일전에 빨래터 앞에서 연오랑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실컷 두들겨 맞았던 무리에 속해 있던 교육생이었다.

“다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언제까지 우리가 그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한테 두들겨 맞아야 하냔 말이야!”

그러자 다른 교육생들 역시 벌떡 일어나 오동용의 발언을 지지했다.

“옳소!”

“동용이 니 말이 맞다!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그 망할 자식은 제갈참 교관님만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지! 아주 본때를 보여 줘야 해! 안 그러면 앞으로 더 기어오를 터이니!”

수십여 명의 교육생들이 일제히 연오랑을 성토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당장에라도 연오랑을 쫓아가 해코지를 하고도 남을 만한 기세였다.

“우리가 무공이 약해서 놈에게 두들겨 맞은 게 아냐!”

오동용이 소리쳤다.

“단지 비무 때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니 졌을 뿐! 진짜 무공은 내공을 사용해서 펼치는 내가무공이지! 내공 없이 맨몸뚱이로만 펼치는 외가무공이 무슨 소용이야! 안 그래?”

“그렇지!”

“맞지!”

“암! 무공은 내공이 구(九) 할이지!”

교육생들이 오동용의 선동에 따라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다.

“내공을 사용해서 비무를 하게 해 주던지! 그게 아니면 우리가 따로 놈을 손봐 주던지! 뭔가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해!”

바로 그때.

“그만들 해.”

오직 단 한 사람.

모두가 연오랑을 욕하며 손봐 주려 할 때 조용히 말을 아끼던 교육생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연오랑에게 맞아 팔과 다리에 붕대를 칭칭 휘감고 있었다.

“내공 안 쓰고 졌으면 진짜 진 거야. 체구도 작은 상대한테 순수 격투에서 밀렸는데, 내공을 쓴다고 한들 결과가 달라질 거 같아? 난 똑같다고 본다.”

“뭐?”

오동용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모용건. 너 말이 좀 이상하다? 그럼 우리가 내공을 써도 그 자식한테 두들겨 맞았을 거라는 거냐?”

“그럼 아냐?”

모용건이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대꾸했다.

“그 자식도 내공 안 쓰긴 마찬가지였다. 우리만 안 쓴 게 아니잖아.”

“이 새끼가 진짜!”

“잘 알잖아. 무공의 기본은 내공이 아니라 외공과 초식이라는 거. 우린 기본기에서부터 밀린 거야. 괜히 힘들 빼지 말고 그냥 잠이나 자.”

“닥쳐!”

오동용이 한번 해보자는 듯 모용건을 향해 다가섰다.

“니 새끼는 자존심도 없나 보지? 그런 새파란 햇병아리한테 두들겨 맞고도 패배를 인정하는 거 보면?”

“상할 자존심이 있나 보네.”

“뭐?”

“배움 앞에 자존심이 어딨어? 가르쳐주면 절하면서 배우는 게 배움이야. 난 오히려 그 녀석한테 고마워. 마음 같아선 선배로서의 체면이고 뭐고 더 때려 달라고 싹싹 빌고 싶은 심정이다.”

모용건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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