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버프로 무림정복-24화 (24/115)

제24화.

“뭐?”

오동용은 어이가 없었다.

“더 때려 달라고 싹싹 빌고 싶다고?”

“그래.”

“미친 새끼.”

오동용이 기가 찬다는 듯 욕설을 내뱉었다.

“말 같은 소릴 해야지.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미쳐 버린 모양이지? 아니면 연오랑 그 새끼한테 처맞다가 정신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전혀.”

살기등등한 오동용과는 달리 모용건은 매우 차분했다.

“말했잖아. 녀석과의 비무에서 배운 게 있다고.”

“그딴 무공 같지도 않은 주먹질에서 배운 게 있다고?”

“그래.”

“개소리!”

오동용이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을 지지하는 교육생들에게 말했다.

“야! 다들 들었냐! 모용건이 그 새끼한테 배운 게 있다는데?”

그러자 많은 교육생들의 입에서 야유 섞인 조롱이 터졌다.

“푸하하하하!”

“처맞더니 진짜 돌았나 보네?”

“그 새끼한테 배운 게 있다고? 풉! 그럼 계속 처맞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용건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난 녀석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막혔던 부분이 풀렸어. 녀석이 내가 펼치는 무공의 약점과 내 고질적인 나쁜 버릇을 집요하게 공략해 준 덕분에.”

이번에는 모용건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가? 녀석과 비무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 없어?”

그런 모용건의 물음에 세 명의 교육생이 조심스레 나섰다.

오동용의 주장에 동의하는 교육생들의 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수였지만.

“나도 뭔가 배운 게 있다는 데 동의해.”

“자존심이 안 상하는 건 아니지만, 재능의 차이라고 생각해 보면 그리 억울할 것도 없겠지. 나도 나름 건진 게 있다.”

“솔직히 내공을 사용한다고 해도 난 녀석을 이길 자신은 없어. 인정해야 돼. 녀석이 우리보다 강해. 녀석과의 비무가 꽤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언제나 그렇듯 소수 의견은 묵살되기 십상.

“이 자존심도 없는 새끼들!”

오동용이 분통을 터뜨렸다.

“니들이 나랑 같은 기수의 교육생이라니! 쪽팔린다! 쪽팔려! 까마득한 후배 놈한테 그렇게 처맞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니!”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모용건이 반박했다.

“뭐 이 새끼야?”

오동용이 모용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지금 말 다 했냐?”

“그래, 다 했다.”

모용건은 물러서지 않았다.

“3년 동안 훈련받아 놓고 까마득한 후배 녀석한테 졌으면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자존심 세운다고 형편없던 실력이 나아져?”

“이 새끼가 진짜!”

“쳐 봐.”

오동용이 주먹을 치켜들었지만, 막상 모용건의 싸늘한 기세에 쉽사리 손찌검을 하지는 못했다.

모용건은 3년 내내 최고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수재.

오동용뿐만 아니라, 같은 기수 내에서 누구도 모용건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교육생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나서길 좋아하지 않고 차분한 성격이라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을 뿐.

“…이 새끼.”

모용건과의 싸움이 부담스러웠던 오동용이 은근슬쩍 물러났다.

“너, 두고 보자.”

“얼마든지.”

“얘들아!”

오동용이 자신을 지지하는 교육생들에게 소리쳤다.

“쟤들은 그 새끼한테 처맞는 게 좋댄다! 이 자존심도 없는 새끼들!”

오동용의 전략은 탁월했다.

“니들은 우리 기수도 아니다!”

“퉤!”

“그 새끼랑 같은 기수 하시지? 왜?”

절대다수의 교육생들이 오동용을 지지했다.

새파랗게 어린 신참 교육생에게 얻어터졌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자존심에 큰 생채기를 남기는 일이었다.

“난 도저히 못 참겠다! 그 새끼를 아주 찍소리도 못 하게 단단히 혼쭐을 내주지 않고서는 못 살겠다! 남자의 자존심을 걸고! 그 새끼한테 선배들의 무서움을….”

그러자 오동용을 따르던 한 교육생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뭐?”

“남자 아니잖아.”

“…….”

“환관 주제에 남자의 자존심 같은 게 어딨어. 우리 다 고잔데.”

교육생 숙소 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또르르….

몇몇 교육생들의 눈가에서 통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어제 말했던 것처럼 요괴가 재입고 되었다는 소식이다. 오늘부터는 요괴 사냥 훈련을 실시하겠다.”

“오오오!”

아침 일찍부터 규화보전을 수정하는데, 제갈참 아저씨가 반가운 소식을 전해 왔다.

그럼 선배님들 단물 빨아먹던 시절도 이제 안녕이다.

마른오징어에서 나오는 액기스도 한계가 있는 법이긴 하지.

“바로 가겠느냐?”

“예.”

“정리하고 따라오너라.”

“예~이~!”

에라이.

하도 환관들이랑 부대끼다 보니 특유의 말투가 입에 붙어 버렸다.

이래서 환경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가?

“야! 햄찌야! 요괴 사냥 훈련하러 가는데 너도 같이 가자!”

“뀨! 햄찌 귀찮다! 안 간다! 뀨우!”

“뭐 인마?”

“어차피 주인놈만 성장하면 햄찌는 자동으로 성장하는데 같이 고생할 이유가 뭐가 있냐! 뀨! 가서 주인놈만 뺑이 치고 와라! 뀨우!”

틀린 말은 아니다.

내 레벨이 오르면 햄찌 놈 레벨도 같이 오르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펫 주제에 지금 주인놈만 뺑이 치라는 게 말이 돼?

이 자식 이거 요즘 왜 이렇게 뺀질거려?

아주 빠져 가지고.

“니가 그러고도 내 친구냐? 어?”

“틀린 말 아니지 않냐! 뀨! 왜 같이 고생해야 되냐! 뀨! 어차피 훈련장에서 요괴 때려잡는 거 아니냐! 뀨우!”

“같이 싸워 줘야 요괴 한 마리라도 더 빠르게 잡을 거 아냐!”

“햄찌 바쁘다! 뀨! 부적 만드느라 정신없다! 뀨우!”

“그거 낙서잖아!”

“캬아악! 낙서 아니다! 햄찌 지금 진지하다! 캬아아악!”

“됐다, 됐어.”

싫다는데 구차하게 질척대고 싶진 않았다.

그래.

너, 어디 두고 보자.

버르장머리를 아주 단단히 고쳐놓고 만다, 내가.

“준비는 끝났느냐?”

“예, 교관님.”

“그럼 가자꾸나.”

사냥터로 가는 길.

“뭐죠?”

제갈참 아저씨에게 물었다.

“뭔가 경계가 더 삼엄해진 느낌이네요?”

“금의위에서 황궁 내 경계 등급을 무려 2단계나 상향했다더구나.”

“갑자기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자세한 내막은 나도 모른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황궁 내에 정체불명의 절대고수가 숨어 있다는데, 공식적으로 확인된 건 아니다.”

“엥? 그럴 수도 있나요?”

솔직히 잘 이해가 안 간다.

판타지 서버나 무림 서버나 황궁쯤 되는 곳이면 신원 확인도 철저하고, 경계도 삼엄하기 마련.

아무리 절대고수라 해도 숨어들기가 쉽지 않을 텐데?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동창에서도 나름 알아보고 있으니, 네 녀석은 신경 쓰지 말고 훈련과 동창제독 각하께서 부여하신 임무만 잘 수행하면 된다. 알겠느냐?”

“아무렴요.”

“어허! 대답 똑바로 하지 못할까!”

“눼에.”

하여간 깐깐하셔.

이제 좀 풀어주실 법도 한데.

* * *

“녀석이 곧 여길 지나갈 테니까, 준비들 단단히 해.”

오동용이 뒤돌아보며 교육생들에게 당부했다.

끄덕끄덕!

몽둥이를 움켜쥔 교육생들이 살기등등한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오동용과 교육생들은 비무를 하러 오는 연오랑을 습격, 혼쭐을 내줄 계획을 세웠다.

솔직히 비겁한 행동이라는 걸 모르는 교육생은 없었다.

알면서도 다들 모른 척했을 뿐.

그만큼 박살 난 자존심이 너무 뼈아팠다.

감히 하늘 같은 선배님들을 두들겨 팬 걸로도 모자라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니는 것도 분노의 이유 중 하나였다.

녀석은 숙이는 법을 몰랐다.

선배들 앞에 납작 엎드리기는커녕, 늘 당당했다.

대놓고 하극상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선배들을 어려워하는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쩜 그렇게 뺀질뺀질 얄미운지….

‘이 새끼. 빨리 와라. 아주 곤죽을 만들어 놓을 테니.’

오동용과 교육생들은 골목길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녀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도록 녀석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뭐야? 왜 안 와?”

“비무 시간 한참 지났는데?”

몇몇 교육생들이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 더 기다려 보자. 오늘은 좀 늦는 거겠지.”

하지만 1시간이 더 지나도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다른 길로 간 건가?’

혹시나 싶어 교육생 하나를 보내 봤지만, 녀석은 오늘 연무장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뭐지? 오늘은 훈련 일정이 없는 건가?’

그때.

“네 이놈들!”

“도대체 여기서 뭣들 하고 있는 것이냐!”

교관들이 나타나 오동용 일당을 향해 불호령을 내렸다.

오동용과 그 일당들이 훈련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자 발 벗고 찾아 나섰던 것이다.

“당장 따라와라! 어서! 아주 단단히 혼쭐이 날 줄 알아라!”

“훈련에 무단으로 불참한 벌을 달게 받을 준비는 되었겠지! 네놈들이 요즘 아주 개판이로구나!”

그렇게 오동용의 무리들은 분노한 교관들에 의해 끌려가게 되었고, 연오랑에 대한 응징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새끼! 운도 지지리도 좋군! 두고 보자!’

하지만 오동용은 연오랑에 대한 복수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연오랑 놈을 때려눕히고, 선배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세워야 했으므로….

* * *

요괴 사냥 훈련이 끝났다.

[알림: 축하드립니다!]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림: 35레벨 달성!]

“으. 힘들다. 오늘은 그만해야지.”

나도 이제 늙었나 보다.

옛날엔 온종일 사냥만 해도 끄떡도 없었는데.

설마 에이징커브(Aging Curve)는 아니겠지?

운동선수들이나 프로게이머들이나 나이 먹으면 기량이 하락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숙명인 거겠지.

드물게 나이를 먹어도 전성기 수준의 기량을 유지하는 괴물들이 있긴 하지만.

“겨우 2레벨 올랐네. 어휴.”

그 와중에 레벨도 잘 안 오른다.

거의 8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요괴들을 때려잡았는데 고작 2레벨이라고?

어느 세월에 50레벨 찍어서 스킬 해금하고 메인 퀘스트 받지?

아냐.

조급해하지 말자.

원래 이 게임, 레벨 더럽게 안 오르기로 유명하잖아.

게이머들보다 NPC들이 센 게임이니 말 다 했지 뭐.

그 말은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속도도 매우 더디다는 뜻.

판타지 서버가 처음으로 서비스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도록 장수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판타지 서버에서도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사람은 나 혼자뿐이기도 하고.

‘오늘은 비급 수정하는 거 쉬어야지. 너무 피곤해.’

그런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분명 아는 얼굴인데?

누구였더라?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겠나.”

“어. 음. 그게.”

아 씨.

누구였지?

이건 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보다 어중간하게 가까운 사람을 잘 기억 못 한다.

난 길 가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 얼굴과 인상착의는 귀신같이 기억한다.

근데 같은 집단 안에서 은근히 자주 마주치는 사람은 잘 기억 못 한다.

이거 병이라면 병인가?

“저 혹시.”

“……?”

“누구신지….”

에라이.

좀 미안하긴 한데.

솔직하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잖아.

“설마 날 기억 못 하는 건가?”

“제가 머리가 나빠서요. 하하. 하하하.”

애꿎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모용건. 네 선배다. 요 며칠 나와 다섯 번쯤 겨루었을 텐데. 설마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건가.”

“아!”

이제야 기억난다.

‘얘 꽤 괜찮게 싸우던데. 자기 단점에 대한 피드백도 빠르고. 싹수가 보였지.’

기억을 더듬어 보니 경험치를 빨았던 선배들 중에 가장 인상적인 실력을 보여 줬던 사람이었다.

“아이고, 선배님. 제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 하는 병이 있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설마 안면인식장애가 있단 말이냐?”

“아! 예! 바로 그거죠! 안면인식장애! 그겁니다!”

“그런 병이 있는데도 동창에 들어왔다는 거냐? 첩보조직의 일원이 사람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 텐데? 설마 병이 있다는 걸 숨기고 들어온 건 아니겠지?”

야 이!

척하면 척 알아들어라!

대충 넘기면 될 걸 다큐로 받으면 어떡해!

“그,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래? 흠.”

“진짜 아닙니다.”

“뭐. 그거야 개인적인 사정일 테니. 정말 심각한 병이라면 제갈참 교관님께서 눈치채지 못하실 리도 없고.”

“마, 맞습니다!”

“아무튼. 흠. 흠흠흠.”

모용 선배가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네게 부탁이 있다.”

“부탁이요?”

“그래.”

“뭡니까?”

들어나 보자.

“혹시… 무공을 가르쳐줄 수 있겠나?”

내가 대답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