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버프로 무림정복-25화 (25/115)

제25화.

“어,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냐고?”

당황한 모용 선배.

앗.

실수.

옛날 버릇 못 버리고 돈 얘기부터 꺼냈네.

이래서 사람 습관이 무섭다니까.

“얼마면… 되겠나.”

그걸 또 믿어?

아이고, 머리야.

“일개 교육생 신분이라 받는 녹봉이 그리 넉넉지는 않다.”

선배가 민망하다는 듯 슬쩍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붉혔다.

“농담입니다, 농담.”

“음?”

“부끄럽지만 제가 소싯적에 돈을 좀 많이 밝혔거든요. 하하. 하하하하.”

“그, 그렇군.”

“근데 지금은 아닙니다.”

“돈을 밝혔다가 안 밝히게 될 수도 있나?”

“어쩌면요?”

솔직히 이건 확답을 못 주겠다.

나중에 필요하게 되면 다시 밝히게 될지도?

“그래서… 무공을 가르쳐주지 못하겠다는 건가?”

선배가 다시 내게 물었다.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가르쳐주지 않겠다고 해도 탓하지 않겠다. 호의를 구하는 주제에 권리를 주장할 순 없으니.”

오?

이 친구 사람이 좀 됐는데?

“미안하다. 선배가 되어서 염치가 없었군. 무공을 가르쳐달라니.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없었다.”

이 세계 NPC들은 무공을 가르쳐주는 걸 매우 조심스럽게 여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동이다.

무공이란 쉽게 말해 싸우는 비법 같은 것.

무인에게는 일종의 영업 비밀이나 다름없겠지.

그것도 목숨이 걸린.

“못 들은 걸로 해 다오.”

선배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배가 되어 가지고 가르쳐주지는 못할망정 배움을 청하다니.”

“에이, 아닙니다.”

“미안하다는 의미에서 조언 하나 해 주마.”

“조언이요?”

“당분간 주변을 잘 살펴라. 황궁은 암투가 난무하는 무서운 곳이다.”

그거 꼭 밤길 조심하란 말처럼 들리네.

가만.

혹시 그건가?

“방금 그 말씀.”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그거 맞네.

아무래도 우리 하늘 같은 선배들께서 날 손봐주려고 벼르고 계신가 보다.

모용 선배 입장에선 대놓고 말해 주기 좀 그랬겠지.

동기들을 배신하는 꼴이니까.

그렇다고 내가 선배들에게 당하게 내버려 둘 순 없었을 테니, 이렇게라도 에둘러 귀띔해 준 거겠지.

사실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 선배.

진짜 된 사람 맞네.

인정한다, 이건.

“말씀 감사합니다.”

모용 선배를 향해 포권을 취해 감사를 표했다.

“새겨듣겠습니다.”

“내 보잘것없는 조언이라도 새겨듣겠다니 고맙다. 그럼, 난 이만 가 보마. 나중에 훈련 때 보자.”

선배가 발걸음을 돌렸다.

“잠깐.”

“음?”

“내일 밤에 뵙죠.”

“내일 밤에? 무슨 뜻이냐?”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무공.”

“그, 그게 정말이냐!”

“선배님 입장에서 후배인 제게 가르침을 구하신 것도 어려운 발걸음이라는 거, 압니다. 그러니 가르쳐드려야죠.”

디버프 마스터로서의 스킬 체계는 가르쳐줄 수 없다.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기본기 정도는 다져 줄 수 있겠지.

선배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할 테고.

“고맙다.”

선배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배움에 목말라 있었다. 선뜻 가르침을 주겠다니 나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멋진 마음가짐을 지니고 계셔서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강함에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목마름.

상대가 누구든 배우고자 하는 의지.

선배는 그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다.

나조차도 존중할 수밖에 없는.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옛날 생각이 났다.

곰팡이가 핀 퀴퀴한 원룸에서 생계형 게이머로 살아가던 시절이.

그땐 어떻게든 강해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버둥 쳤었지.

…피식.

문득 웃음이 나왔다.

NPC한테서 과거의 내 모습을 엿볼 줄이야.

이게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이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게임 속에서 다양한 인간군상과 부대끼면서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니까.

그게 판타지 서버든 무림 서버든.

혹은 NPC든 게이머든.

* * *

연오랑이 교육생들과의 비무를 끝내고 요괴 사냥 훈련을 시작하자마자 제갈참은 또다시 곤란해지고 말았다.

“아니! 사냥터 전세 냈소?”

“이거 너무한 거 아니오? 요괴들을 독점하면 우리 교육생들은 어쩌란 말이오!”

“4년 차 교육생들을 위한 요괴마저 잡아 버리면 나는 어떻게 교육을 진행하오? 어디 말 좀 해 보시오! 말 좀!”

연오랑은 전생에 요괴들과 무슨 웬수라도 졌는지, 온종일 사냥터에서 뒹굴며 요괴들을 때려잡았다.

덕분에 3년 차 교육생들은 물론.

4년 차 교육생들을 위해 들여놓았던 요괴들까지 불과 며칠 만에 씨가 말라 버리고 말았다.

“미, 미안하오.”

제갈참은 자신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동료 교관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해야만 했다.

“다들 알다시피 동창제독 각하께서 녀석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시어 편의를 봐주고 계신 것이니,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라겠소. 내 이렇게 대신 사죄하오. 따로 술 한 잔씩 사겠소이다.”

동료 교관들을 달래고자 기름칠을 했더니, 코딱지만 한 녹봉은 어느새 녹아 버린 뒤였다.

‘이번 달은 손가락만 쪽쪽 빨아야겠군. 끙.’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꺼억!”

막 요괴 사냥을 마치고 나온 녀석은 마치 만찬이라고 즐기고 나온 사람처럼 거하게 트림까지 해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요괴를 사냥하는 게 아니라 먹어치우는 게 아닌지 의심마저 들 지경.

“끝났느냐.”

“네.”

“당분간은 요괴 사냥 훈련은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예? 왜요? 왜에? 왜에에에! 왜 할 수가 없어요! 왜에에에!”

녀석이 성난 원숭이처럼 씩씩대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 녀석아! 네 녀석이 요괴들을 모조리 먹어치우지 않았느냐!”

“네?”

“네 녀석이 지난 며칠 동안 요괴들을 모조리 해치워 버리는 바람에 사냥터의 요괴 재고가 또 떨어졌단 말이다!”

“아? 그런가?”

순간 제갈참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뒤로 넘어갈 뻔했다.

‘아? 그런가아? 그게 네 녀석이 할 말이더냐! 이 괴물 같은 놈아!’

지끈지끈!

머리가 아팠다.

최근 들어 머리털 빠지는 양이 심상치 않은 것이, 다 녀석 때문인 게 분명했다.

양물이 없는 환관은 양기(陽氣)가 약해 탈모에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녀석은 존재만으로도 그런 장점을 상쇄해 버리고 있었다.

‘이 녀석과 몇 달만 같이 있다가는 탈모 걸린 환관이 될지도 모르겠군. 끙.’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참은 녀석이 밉지 않았다.

‘버르장머리 없고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악한 마두가 될 것 같지는 않군. 그래, 녀석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한 것이겠지.’

제갈참은 녀석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 * *

한 달이 더 지났다.

일과는 단조로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 로그인을 하면, 사냥터로 달려가 요괴들부터 때려잡았다.

오후엔 두목님이 의뢰한 규화보전의 수정 작업에 전념했다.

밤엔 모용 선배를 가르쳤다.

“꾸웩!”

나가떨어지는 모용 선배.

“하체가 불안하시네요. 하체 운동 좀 더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크윽.”

“하체가 부실하시니까 조금만 밀려도 균형이 흐트러지잖아요.”

“그, 그런가?”

“이건 비무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하체 근력을 키우는 게 우선이지.”

갸우뚱하는 선배를 본 나는 허벅지를 탁탁 치면서 말했다.

“당분간은 기를 운용하실 때 하체 근육에 좀 더 집중하세요. 근력이 올라올 때까지만이라도.”

“명심하겠다.”

“저기 구석 가서 스쿼트 30개씩 5번 하십쇼. 무게는 100근입니다.”

1근은 약 600그램.

100근이면 60킬로그램이다.

스쿼트란 단어는 가르쳤다.

이 세계에서는 심존[深蹲]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자꾸 헷갈려서 그냥 스쿼트란 말을 가르쳐버렸다.

“…알겠다.”

모용 선배는 군말 없이 구석으로 가 돌덩이가 매달린 지게를 짊어지고 스쿼트를 실시했다.

저저!

다리 후들거리는 거 보소?

‘힘들겠지.’

난 모용 선배를 이해했다.

환관들은 근력이 약하다.

땅콩이 없으니 남성호르몬이 거의 분비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근육이 잘 붙지 않는다.

무슨 놈의 게임이 그렇게 디테일하냐고?

그게 이 게임의 또 다른 매력 중 하나란 말씀.

그건 그렇고.

대체로 동창의 무공은 육체단련을 등한시하고, 지나칠 정도로 내공에 집착하는 경향이 심했다.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강해지기 위해서 육체단련은 선택이 아닌 필수.

아무리 환관이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근육을 키워 줘야 할 거 아냐.

무공은 그다음 문제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마 선배님. 비무하실게요.”

“자, 잘 부탁한다.”

모용 선배에게 스쿼트를 시켜놓고 다른 선배를 불렀다.

알고 보니 모용 선배는 혼자가 아니었다.

모용 선배.

좀 어리바리한 마빈 선배.

비실비실한 윤석 선배.

그리고 덩치가 산만 한 왕근 선배까지.

배움을 청한 선배가 총 4명이나 됐다.

에라이.

세 명 더 데려올 줄 알았으면 돈 받았지!

내가 시급이 얼만데!

빠악!

내 주먹이 마 선배의 턱주가리를 강타했다.

“꾸웨에엑!”

저 멀리 날아간 마 선배가 부르르 떨더니 축 늘어져 버렸다.

어?

“마 선배님! 선배님! 숨 쉬세요! 숨!”

다행히 마 선배는 그냥 기절한 거였다.

이런.

딴생각한다고 힘 조절을 못 했던 모양이다.

“뀨! 주인놈아! 잘돼 가냐!”

햄찌 놈이 쪼르르 달려와 내게 물었다.

“남이사. 신경 끄셔.”

“뀨우? 주인놈 왜 그러냐! 뀨! 삐쳤냐?”

“됐거든? 이 의리 없는 자식.”

같이 사냥터에서 요괴 잡아줬으면 얼마나 좋아?

“뀨! 주인놈아!”

“왜. 뭐.”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 뀨우? 안 지겹냐?”

슬슬 지겹긴 하지.

“당분간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당장 떠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황궁 사냥터의 편의성이 너무 컸다.

가만히 있으면 요괴들을 뿌려 주는데 굳이 제 발로 떠날 필요는 없겠지.

지금 내 레벨이 48.

스킬이 해금되고 메인 퀘스트가 발생하는 50레벨이 코앞이다.

지난 한 달 동안 사냥터에서 먹고 자며 요괴들을 때려잡은 결과다.

이제 2레벨만 더 올리면 되는데, 문제는 요괴 재고가 떨어져서 며칠은 기다려야 한단다.

레벨이 높은 요괴일수록 재입고되는 데 오래 걸리기도 하고.

게다가 슬슬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요괴들이 재입고된다고 해도 50레벨까지는 한 며칠 사냥터에서 죽치고 있어야겠지?

“뀨! 얼마나 더 있을 거냐!”

“최대 한 달 정도?”

“뀨우? 좀 안 쑤시냐?”

“난 재밌는데?”

“뀨?”

“재밌다고. 나름 쏠쏠해, 이거.”

“가르치는 거 말이냐? 뀨우?”

“응.”

옛날엔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고, 나 하나 강해지기도 바쁜데 누가 누굴 가르쳐?

그런데 지난 한 달 동안 선배들을 가르쳐 보니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일인 줄 미처 몰랐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인 거겠지.

나 하나 강해지기 바빴던 과거의 나.

누군가를 가르치는 지금의 나.

사람은 같아도 마음의 여유는 다른 모양이다.

이것도 나름 인생 2회차라 그런가?

왜! 뭐.

2회차 맞잖아!

…게임 인생 2회차.

* * *

선배들을 가르치다 보니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나중에 제대로 된 제자 하나 키워 볼까? 사부님처럼?’

당장은 아니고.

지금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가 누구를 제대로 가르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랑이 이놈.”

제갈참 아저씨가 다가와 말했다.

아 좀.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또 선배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냐.”

“에이. 교관님도. 제가 어떻게 하늘 같은 선배님들을 괴롭힙니까. 그냥 도와드리고 있는 거죠.”

“저게 도와주고 있는 거라고?”

제갈참 아저씨가 선배들을 가리켰다.

“끄으으응! 으으윽!”

스쿼트를 하던 모용 선배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기 직전이고.

“…….”

마 선배는 아직 기절해 있고.

“끄으응.”

“그어어어어.”

조 선배와 왕 선배는 입에 게거품을 문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오,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긴 하네.

엣헴!

“그만하고 오늘은 일찍 자거라.”

“왜요?”

“모레 미친왕(嵋親王) 전하께서 황도를 방문하시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 동창도….”

“안 해요.”

선빵필승(先빵必勝)!

선수부터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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