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나름 황궁 짬밥 좀 먹었다고 미친왕이 누군지 정도는 안다.
미친왕은 황제의 둘째 아들.
황위 계승 서열 1위인 황태자 바로 다음이다.
뭐 때문에 오는지는 몰라도, 그런 높으신 양반의 방문은 딱 질색이다.
당장 내가 군인인데 우리 부대에 사단장님이라도 방문하신다고 생각해 보자.
오싹!
으.
나 방금 소름 돋았어.
부대 미화 작업이랍시고 연병장에 자갈 골라내고, 치약으로 곳곳을 미싱하고, 풀 뽑고, 여기저기 쓸고 닦고.
아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지.
그거면 다행이게?
제식훈련 한답시고 땡볕에서 땀 뻘뻘 흘려가면서 개고생하지.
충성! 근무 중 이상 무!
이런 거나 연습하지.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 와중에 부대 방문하신다던 사단장님이 헬기 타고 하늘 위에서만 슥 둘러보고 가기라도 한다면?
아아.
상상된다.
헬기를 올려다보며 추웅! 서어어어어어어엉!
…하는 군시절 내 모습이.
하물며 황위 계승 서열 2위인 이황자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지.
일개 사단장도 저 정도인데.
그런 거 보면 융친왕 전하는 참 소탈하시고 격의 없는 것 같긴 해?
“뭘 안 한다는 것이냐?”
“뭔지는 몰라도 안 합니다. 안 해요.”
“오랑이 이놈!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안 들을래요.”
“바람 쐬러 나가기가 싫은 게냐?”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바람 쐬러 나간다고요?”
“그렇다.”
“갑자기요?”
“네 녀석이 그간 황궁에 갇혀 있느라 여간 답답해하는 게 아닌 것 같아 데리고 갈까 했던 것이다.”
“어딜요.”
“아까 말했다시피 미친왕 전하께서 황도를 방문하신다. 이에 우리 동창도 금의위와 함께 영친왕 전하의 호위 임무를 맡게 됐다.”
“그래서요?”
“때마침 5년 차 교육생들이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기왕 그렇게 된 김에 3년 차 교육생들도 미친왕 전하의 방문을 핑계 삼아 바람이라도 쐬려는 것이다.”
“어? 그건 좋네요.”
역시 한국말.
아니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건가?
“귀찮으면 여기 있어도 좋다. 어차피 네 녀석은 동창제독 각하의 배려로 공식 행사에선 늘 열외이니.”
“가 보죠, 뭐.”
“아까는 뭔지는 몰라도 안 한다지 않았느냐?”
“귀찮은 일인 줄 알았죠.”
“바람 쐬는 건 귀찮지 않고?”
“요괴 재고가 떨어져서 재입고될 때까지는 딱히 할 것도 없잖습니까. 종일 비급만 들여다보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4년 차 5년 차 선배들은 바빠서 비무에도 안 응해 주고요.”
4년 차부터는 진짜 동창 요원이 되기 위한 교육인지라, 어지간해선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고작 1년 차이인데도 3년 차 교육생과 4년 차 교육생은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비유하자면 3년 차 선배들은 나무를 깎아 만든 장난감 칼 같다.
근데 4년 차 선배들은 날이 시퍼렇게 선 진짜 칼 같다.
그러니까,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거다.
“그래서 바람 쐬러 나가겠다는 것이냐?”
“네.”
안 그래도 바깥세상이 궁금하던 참이다.
무림 서버의 도시는 어떻게 생겼는지 내 눈으로 직접 봐야지.
한 달 내로 황궁을 떠날 계획이기도 했으니까 사전답사해 둔다고 치지 뭐.
띠링!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알림: <신병위로휴가>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퀘스트 이름 뭔데.
* * *
다음 날 아침.
제갈참 아저씨를 따라 황궁 밖으로 나갔다.
[신병위로휴가]
정말 터무니없군. 4박 5일이 4.5초처럼 느껴지다니.
- 어느 이등병의 회고
내용 : 교관 제갈참을 따라 대명제국의 수도 남경(南京)을 구경해보자.
진행률 : 0% (0/1)
보상 : 해당 없음
주의사항 : 미복귀 시 탈영환관이 되어 쫓기게 되므로 휴가가 끝나면 곱게 궁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거리는 화려했다.
때마침 중양절을 맞아 온 세상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알고 계셨나요?]
중양절(重陽節)이란 중국에서 유래된 동북아시아의 세시 풍속 중 하나로, 매년 음력 9월 9일이랍니다!
중국에서는 꽤 큰 명절 중 하나로,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거나 국화를 이용한 여러 음식들을 해 먹고 거리를 장식하는 등 행사를 진행하곤 한답니다!
어쩐지 도시 전체가 노란 국화꽃으로 뒤덮여 있더라니.
“올해가 이곳 남경이 대명제국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하는 마지막 해다.”
제갈참 아저씨가 말했다.
“그래서 올해 중양절 행사는 더욱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이다.”
“네? 마지막이요?”
“폐하께서는 내년에 수도를 이곳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실 예정이다. 그러니 이곳 남경에서 열리는 중양절 행사는 올해가 마지막일 테지.”
“흠.”
수도를 옮긴다라….
“불안하신가 보네요.”
“그게 무슨 말이냐?”
“수도를 옮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돈도 돈이지만, 여러 가지로 고려할 것도 많고요. 맨정신에 수도를 옮기려면 필요성이 그만큼 커야 한다는 건데.”
잠깐 생각을 더 해 보자.
그간 주워들은 썰에 따르면…….
아.
감이 온다.
“생각해 보니까 여긴 폐제(廢帝)의 세력권이었잖아요. 폐하께는 여기가 적진 한복판처럼 느껴지겠네요.”
폐제는 선황이자 현 황제의 조카를 가리키는 말.
즉, 지금 황제는 조카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황위에 올랐단 이야기.
그러니 이곳 남경이 가시방석처럼 느껴질 테지.
게다가 대명제국은 건국한 지 50년밖에 되지 않았다.
중원 대륙을 통일한 건 그보다 짧은 15년밖에 안 됐고.
즉, 아직은 왕조를 위협하는 위험요소들을 다 제거해 내지는 못한 상황.
당장 폐제의 시신도 발견하지 못하는 바람에, 황제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어딘가에 숨어 있던 폐제가 황위를 노리고 역습을 가해 올지도 모른다나?
“반대로 새로운 황도가 될 북경은 폐하의 세력 기반이 되어 주ㄴ….”
“오랑이 이놈!”
깜짝이야!
“말조심하지 못하겠느냐! 어디 가서 그런 얘길 함부로 했다간 목숨이 100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쳇.”
“어허!”
제갈참 아저씨가 눈을 부라렸다.
“그런 건 머리로만 생각하고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아니 된다는 걸 모르는 것이냐!”
“어차피 우리끼리만 하는 말인데요, 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했다.”
“눼에.”
“이놈이 그래도 입을 삐죽여? 튀어나온 입부터 집어넣지 못하겠느냐!”
“자동으로 튀어나가는 걸 제가 어떻게 합니까? 흥.”
말을 말자!
말을 마!
“황도를 구경시켜 줄 터이니 잔말 말고 얌전히 따라오너라.”
“눼에.”
그래, 뭐.
역사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상황이 어떻고.
알 게 뭐람.
난 카렐의 영혼만 찾으면 그만이지.
* * *
제갈참 아저씨는 남경 곳곳을 구경시켜주었다.
“여긴 계명사(鸡鸣寺)라 한다. 800년 전에 세워진 오래된 사찰이다.”
“저 멀리 보이는 강이 장강(長江)이다. 우리 중원 대륙을 가로지르는 젖줄이나 다름없는 강이다.”
“이곳은 과거 오나라 황제의 무덤이니라.”
어째 패키지여행 온 기분이다.
나는 관광객.
제갈참 아저씨는 안내를 맡은 여행사 가이드.
팁이라도 드려야 하나?
‘게이머가 얼마 안 되네.’
남경 곳곳을 둘러보는 동안 게이머들이 얼마나 있나 살펴봤는데, 의외로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아주 가끔.
가뭄에 콩 나듯 저레벨 게이머들만 곁을 스치는 게 전부.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물어보려무나.”
“근데 왜 천인들이 잘 보이지 않죠?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천인들은 잘 안 보이네요?”
“황도는 천인들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지역이다. 황도를 드나들 수 있는 천인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NPC들의 입장에서 우리 천인―게이머―들은 통제 불가능한 시한폭탄 같은 존재.
만약 수없이 많은 천인들이 황도 한복판에 폭동이라도 일으킨다면?
NPC들의 입장에선 재앙이나 다름없을 거다.
그러니까 유동인구를 조절하는 거겠지.
게다가 황제같이 권력을 가진 NPC들은 천인들을 눈엣가시로 여길 수밖에 없다.
천인들이 똘똘 뭉쳐 반란이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황제 입장에서도 어질어질해질 거다.
왜?
천인들은 불사의 존재니까.
죽여도 죽여도 끝도 없이 부활해 다시 덤벼들 테니까.
그래서 권력을 가진 NPC들은 우리 게이머들을 끝없이 경계하고, 견제하곤 했다.
지금이야 대륙 곳곳에 요괴들이 나타난 상황인지라 게이머들의 손이 필요해서 그냥 놔두겠지만.
근데 나중에는…….
‘여기 황제도 게이머들을 말살시키려고 하려나?’
판타지 서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적 있었다.
으득!
그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슈트카르트 이 새끼!
슈트카르트는 판타지 서버 최강대국의 황제였는데, 나랑은 밥도 먹고 사우나도 같이 가던 사이였다.
근데 뒤로는 내 뒤통수를 치고 게이머들을 꼭두각시로 만들 음모를 꾸밀 줄 누가 알았겠어?
이 자식 잘 있으려나?
살아있긴 할 거다.
하루 한 번씩 똥통에 푹 담가지는 형벌을 받는 중이니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무튼.
그 자식 생각하니까 열이 뻗치네?
쒸익쒸익!
“왜 갑자기 씩씩대느냐?”
제갈참 아저씨가 물었다.
“옛날 생각 나서요.”
“옛날 생각?”
“그런 게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흥.
어차피 말해 줘 봤자 안 믿을 거면서.
“싱거운 녀석 같으니. 슬슬 날이 저무는구나. 따라오너라.”
“눼에.”
제갈참 아저씨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북풍표국>이란 간판이 붙어 있는 커다란 장원이었다.
[알고 계셨나요?]
표국이란 이 세계의 물류배송을 책임지는 운송 업체로서, 현실의 우체국이나 택배회사 같은 역할을 한답니다!
다만, 치안이 불안정한 세계이니만큼 표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란 걸 잊으시면 안 된답니다!
어디 택배라도 붙이시려고 그러시는 건가?
“나는 잠시 개인적인 볼일을 보고 올 터이니, 오랑이 너는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여라.”
“네? 저 감시 안 하세요?”
“물론 네 녀석이 언젠간 황궁을 뛰쳐나가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잘 아시네요.
“하나 그날이 오늘은 아닐 터. 적어도 동창제독 각하의 임무를 완수하기 전까지는 탈영하지 않을 테니, 내가 굳이 감시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하. 하하하하.”
“그럼 다녀오마. 금방 나올 터이니, 탕후루(糖葫蘆)라도 하나씩 사먹고 있어라.”
제갈참 아저씨는 내게 동전 몇 닢을 쥐여주고는, 표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네?”
“사고 치지 말고 제발 얌전히 있도록 해라. 알겠느냐.”
“…눼에.”
하여간 걱정은.
내가 무슨 하루라도 사고 안 치면 죽는 몸인 줄 아신다니까.
“뀨! 주인놈아! 탕후루 사 먹으러 가자! 뀨!”
“탕후루가 내가 아는 그거냐? 꼬챙이에 꿴 과일에 설탕물 바른 거?”
“뀨! 그렇다!”
“그래. 내가 사 줄게.”
금방 나오신다니까 달달하게 설탕물이나 빨고 있지 뭐.
그나저나 황도라 그런지 건물들도 깔끔하고, 정갈하다.
명절이라서 그런지 사람들도 활기차 보이는 데다가, 곳곳이 노란 국화로 장식되어 있어 꽤 아름답다.
이것도 다 게임하는 재미 중 하나다.
옛날 중국의 중양절 풍경을 어디서 보겠어?
날이 저물고 곳곳에 등불이 켜지면 야경도 죽이겠….
“찾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웬 놈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야, 햄찌야.”
“뀨?”
“너 부른다.”
“뀨우우?”
“쥐새끼래. 너 부르는 거 아냐?”
“캬아악! 쥐새끼가 아니라 쥐새끼 같은 놈이다! 캬악! 주인놈 부르는 거다! 캬아아악!”
“그, 그런가?”
뒤통수를 벅벅 긁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불쑥 앞으로 나와 으르렁거렸다.
“마침 잘 걸렸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여기서 딱 마주치는군!”
“어. 음.”
누구였더라?
아 씨.
또 가물가물하다.
“저어.”
“……?”
“누구세요?”
진짜 모르겠다.
“제가 머리가 나빠서. 기억이 안 나네요. 하하. 하하하하.”
“이 새끼가 진짜!”
“……?”
“네놈이 정녕 뒈지고 싶은 모양이지? 감히 하늘 같은 선배들을 모르는 척을 해?”
“아?”
“흐흐흐! 그래! 어디까지 까부는지 두고 보자!”
잠깐.
뒤통수가 간질간질하다.
이럴 때 꼭 누가 뒤에서 몽둥이 같은 걸로 뒤통수 후려치려고 하던데.
홱!
고개를 돌렸다.
쒜에에엑!
몽둥이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휙.
슬쩍 피하고.
빠악!
주먹으로 코를 뭉개 버렸다.
“악!”
몽둥이로 내 뒤통수를 후려치려던 놈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퍽! 퍽! 퍽! 퍽! 퍽!
쓰러져 있는 놈의 얼굴에 주먹 다섯 방을 추가로 꽂아 넣었다.
“헉.”
정신을 차리고 보니 놈의 얼굴이 완전히 뭉개져 있다.
어?
이거 성형외과 보내야 할 거 같은데?
아 씨.
큰일 났다.
교관님이 사고 치지 말고 제발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
…는 기왕 친 사고 제대로 쳐야겠다.
크게 치나.
작게 치나.
사고 친 건 똑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