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버프로 무림정복-29화 (29/115)

제29화.

갑작스레 일어난 폭발.

그건 폭죽 같은 게 터진 것이 결코 아니었다.

펑펑! 펑펑! 펑! 펑펑펑!

호위함 네 척이 미친왕이 탄 배를 향해 함포를 갈겨 댔다.

“……!”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

“……!”

제갈참 아저씨와 햄찌 녀석이 갑작스레 벌어진 이 상황에 어지간히 놀란 게 분명했다.

‘이게 끝이 아냐.’

단언컨대,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손모가지를 걸 수도 있었다.

휘이이이이이!

고오오오오오!

미친왕이 탄 배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대자연의 기운이 점점 더 거세졌다.

그게 내 눈에는 마치 당장에라도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처럼 보였다.

후둑!

후두둑!

굵은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가 싶더니.

쏴아아아아아아아!

이내 곧 세찬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번쩍!

번뜩이는 벼락.

우르릉!

콰앙!

천하를 뒤흔드는 천둥.

촤아!

촤아아아!

잠잠하기만 하던 장강의 물결이 사나운 파도가 되어 넘실거렸다.

햄찌가 느낀 이상 징후.

대자연의 기가 갑자기 미친왕이 탄 배를 중심으로 휘몰아친 것.

‘이건 술법을 이용한 기후 조작이야. 엄청난 수준이다. 이렇게 광범위한 지역의 날씨를 갑자기 180도 바꿔 버리려면 어지간한 술법가는 꿈도 못 꿀 텐데.’

판타지 서버에서도 이만큼 날씨를 조작해 내려면 마법사의 경지가 최소 <그레이트 위저드>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레이트 위저드>는 마법사 계열 캐릭터들이 300레벨을 돌파했을 때 이룩하는 경지의 명칭.

즉, 이 세계의 무인으로 치자면 화경의 고수 정도는 되는 술법가가 개입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300레벨을 넘어선 술법가를 <현사>라 부른다던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교관님!”

제갈참 아저씨를 돌아보았다.

쏴아아아아아아아!

빗줄기가 너무 거세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우르릉!

콰앙!

천둥소리 때문에 목소리마저 잘 들리지 않았다.

“뭍으로 데려다줄 터이니 오랑이 네 녀석은 몸을 피해라!”

“예?”

“대사건이다! 미친왕 전하에 대한! 아니! 이건 황제 폐하에 대한 공격이다! 무시무시한 고수들이 배후에 있을 터! 네 녀석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뭍으로 데려다주마!”

제갈참 아저씨가 열심히 노를 저었다.

“그럼 교관님은요!”

“나는!”

제갈참 아저씨가 소리쳐 대답했다.

“네 녀석을 데려다주고! 교육생들을 구하러 갈 생각이다!”

예?

뭐라고요?

“저길 가시겠다고요?”

사건 현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펑펑! 펑!

펑펑펑!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호위함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미친왕이 탄 배를 벌집으로 만들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굵은 빗줄기 때문에 흐려진 시야 사이로 호위함들의 함포가 내뿜는 불꽃이 번뜩였다.

우르릉!

콰앙!

호위함들에 장착된 함포들이 불을 내뿜는 소리가 천둥소리를 뚫고 여기까지 전해진다.

그런데 저 지옥을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교육생들이 위험하다! 어찌 두고 볼 수 있단 말이냐!”

“아.”

그 외침에 담긴 마음이 전해져 왔다.

‘교육생들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으시는구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셔.’

제갈참 아저씨는 미친왕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 선배들.

모용 선배.

마 선배.

윤 선배.

그리고 송 선배.

저 배에 탄 3년 차 교육생 선배들을 걱정하시는 거였다.

그렇다면….

덥석.

제갈참 아저씨.

아니, 교관님이 붙들고 있는 노를 움켜쥐었다.

“가시죠!”

“뭐라 그랬느냐!”

“같이 가시죠!”

“그건 아니 된다! 네 녀석에게는 너무 위험하다! 뭍으로 데려다줄 터이니….”

그럴 순 없지.

“아뇨! 같이 갑니다! 도망치긴 어딜 도망칩니까!”

“계속 고집부릴 셈이냐!”

“저 어차피 안 죽습니다! 저도 천인입니다!”

죽어도 괜찮다는 건 아니다.

BNW는 죽었을 때 페널티가 엄청나게 큰 게임.

고레벨일수록 페널티는 심해진다.

200레벨이 넘어가면 한 번 죽을 때마다 몇 개월 동안 쌓은 경험치와 레벨이 몽땅 날아갈 정도다.

하지만 난 죽음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는 게 무서워서 안전한 자리만 찾아다니면, 죽었다 깨어나도 강해질 수 없다.

강함이란 숱하게 사선[死線]을 넘어 살아남은 자들만의 특권.

내가 판타지 서버의 전설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죽을 고비를 수백 번이나 넘기고 살아남았기에 가능했던 거다.

강해지려면, 목숨을 걸어라.

그게 내 지론이었다.

“선배들을 구하는 일입니다!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난 한 달 동안 선배들과 정이 꽤 들어서,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고집하고는! 후회하지 말거라!”

어?

방금 웃은 거 아닌가?

쏟아지는 빗물 사이로 교관님의 미소가 보인 거 같은데?

…아님 말고!

* * *

쏴아아아아아아!

쏟아지는 폭우.

촤아!

촤아아아!

거센 파도.

코딱지만 한 나룻배를 타고 이런 악천후를 뚫고 간다는 건 쉽지 않았다.

“야! 햄찌야! 뭐 해! 너도 저어!”

“뀨! 알겠다!”

파도가 거세서 나와 교관님만의 힘으로는 배를 밀고 나가기가 힘들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여엉차! 여엉차!”

“뀨우우! 뀨우우!”

셋이서 힘을 합쳐 겨우겨우 노를 저어 미친왕이 탄 배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개판이네.’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조각난 나뭇조각들이 거센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고.

수십여 구의 시체들도 파도에 휩쓸려 떠다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호위함들의 포격이 멈췄다는 건데….

챙! 채앵!

“으악!”

“죽어라아!”

거센 빗소리를 뚫고 각종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 사람들이 내지르는 고함이 들려왔다.

갑판 위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서 올라가야 한다!”

교관님이 전방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쏴아아아!

포격을 멈춘 호위함들이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래, 포격 후엔 백병전이지. 미친왕의 배에 승선해서 싹 쓸어버릴 생각이다.’

머릿속으로 뒤이어 벌어질 일들이 그려졌다.

먼저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기어오르는 적들을 방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가자! 햄찌야!”

“뀨!”

햄찌 녀석과 몸을 날렸다.

때마침 반쯤 내려와 있는 구명선의 밧줄을 붙잡고 배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으악!”

“으아아아악!”

갑판은 도살장이나 다름없었다.

검은 옷에 복면을 쓴 적들이 아군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는 중이었다.

“감히!”

“황제 폐하의 진노가 두렵지도 않더냐!”

황금색 옷을 입은 무인.

금의위 위사들이 적들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중간중간 우리 동창에 소속된 요원들도 보였다.

“어딜 감히!”

촤라락!

교관님이 부채를 휘두르며 가장 앞에 있는 적을 베어 버렸다.

“커헉!”

부채 날에 베인 적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후두둑!

오래간만에 보는 피.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어?

문득 마음이 평온해졌다.

귀를 파고들던 주변 소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어지럽고 정신없던 상황도 아주 또렷하고 명확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에라이. 피 냄새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다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코웃음이 나왔다.

이건 내가 연쇄살인마라거나 싸이코패스라서 그런 게 아니다.

현역 시절부터 가상현실게임 속에서 숱한 전투를 치러왔기에, 그냥 이런 환경이 오히려 익숙한 것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래간만에 고향에 돌아온 기분까지 든다.

그럴 만도 하다.

이런 전투를 경험한 게 벌써 몇 년 전이니까.

그래.

피 냄새도 맡았겠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 보자.

제대로.

* * *

“잔챙이는 꺼져라!”

흑의인(黑衣人)이 연오랑을 노렸다.

몸을 빙그르르! 돌린 연오랑이 선풍각으로 흑의인의 낭심을 찍었다.

“……!”

흑의인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너무 아파서, 정말로 너무 아파서 입만 떡 벌린 채 멈춰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고통도 극복 못 하면… 죽어야지.”

연오랑이 갑판 위에 떨어져 있던 도[刀]를 잽싸게 주워들어 흑의인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이 새끼가!”

“새파랗게 어린놈이!”

“뒈져라!”

그 광경을 본 다른 흑의인이 셋이 일제히 연오랑을 향해 덤벼들었다.

챙! 챙! 챙!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주춤주춤 세 발걸음을 밀려난 연오랑.

“오랑아!”

그 광경을 본 제갈참이 다급히 소리치던 그때.

촤라락!

연오랑이 낮은 자세로 도를 휘둘러 흑의인 두 명을 앉은뱅이로 만들어 버렸다.

“크악!”

“으으윽!”

연오랑은 다리를 잃고 쓰러진 적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에 남은 한 명의 흑의인을 향해 번개처럼 도를 휘둘렀다.

“마, 말도 안 되ㄴ….”

털썩!

마지막 흑의인은, 허리가 두 동강이 나 허물어졌다.

푹!

“크악!”

푹!

“컥!”

연오랑이 무심한 표정으로 다리를 잃고 쓰러진 흑의인 두 명의 목에 도를 꽂아 넣었다.

‘이, 이 무슨.’

제갈참은 연오랑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흑의인 네 명을 해치우는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연오랑은 약하다.

흑의인들의 힘이 더 세고, 속도도 더 빠르다.

내공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도 흑의인들은 연오랑에게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하지만 정작 놀라워해야 할 것은, 실전에 임하는 연오랑의 모습이었다.

‘첫 실전에서 저런 침착함과 냉혹함을 보이는 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 아니다. 그건 재능의 영역이 아니라 경험의 영역이다. 제아무리 천고의 기재라 한들 실전에서 저리 침착할 수는….’

바로 그때.

“교관님!!”

연오랑이 버럭 소리치더니 날카로운 나뭇조각을 마치 비수처럼 내던졌다.

“크윽!”

제갈참의 등 뒤로 접근하던 흑의인이 어깻죽지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아뿔싸.’

제갈참이 황급히 몸을 돌려 부채를 휘둘렀다.

촤라락!

부채 날이 어깻죽지에 나뭇조각이 박힌 흑의인의 가슴팍을 갈랐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한 상황.

연오랑에게 잠시 정신이 팔렸던 게 화근이었다.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지금은 전투 중이거늘.’

제갈참은 스스로 반성했다.

‘아! 내가 누굴 가르칠 입장이 아니었구나! 이런 부끄러운 일이!’

그때.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

연오랑이 그렇게 소리치고는 갑판 위로 올라오고 있는 적들을 향해 내달렸다.

“그래.”

제갈참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채를 움켜쥐었다.

“내 집중하마.”

제갈참은 역시 적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연오랑의 가르침을 가슴 속에 품고.

* * *

실전이 주는 경험치는 엄청났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중략)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전투 전 0퍼센트였던 경험치 바가 벌써 30퍼센트 이상 차올라 있었다.

레벨 높은 적들을 처치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실전이라서 경험치를 더 주는 게 분명했다.

‘역시 실전이라는 건가.’

연오랑은 경험치가 쭉쭉 오르는 걸 보고 미소 지었다.

그러나 쭉쭉 오른 경험치와는 별개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햄찌야! 거기 받쳐 줘!”

“뀨! 알겠다!”

수없이 많은 적들이 배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순식간에 갑판을 장악당할 판국이었다.

‘이미 늦었어. 갑판은 지원군이 오기 전에 장악당할 거다. 선배들부터 찾아야 돼.’

선배들을 찾아 돌아다니며 전투를 치르던 도중.

“이놈!”

일본도를 꼬나 쥔 왜구―일본 해적―가 연오랑의 앞을 가로막았다.

“…으응?”

연오랑은 당황했다.

“니, 니가 왜 거기서 나오냐?”

알몸 위에 걸친 나무 갑옷은, 누가 봐도 일본의 것이었다.

무림 서버는 동양, 정확히는 옛 동북아시아를 기반으로 한 서버.

왜구가 등장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실제로, 월드맵에는 일본을 모티브로 한 지역이 존재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곳 대명제국은 옛 중국을 모티브로 한 지역.

심지어 그 수도인 남경 한복판이었다.

왜구가 출몰하기엔 때와 장소가 영 적절치 않았다.

‘왜?’

생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히야아아압!”

왜구가 특유의 기합을 내지르며 연오랑에게 달려들었다.

‘왜구는 경험치를 얼마나 줄까?’

바로 그때.

퍼억!

금의위 한 명이 끼어들어 왜구의 머리통을 부숴 버렸다.

…뭔데?

“괜찮으냐!”

금의위 위사 곽말풍.

그냥 죽으려던 연오랑을 꾸역꾸역 살려내는 바람에, 환관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자였다.

빠직!

연오랑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아 씨.

이 눈치 없는 새끼.

진짜 눈치라고는 지지리도, 단 1도 없는 새끼.

땅콩도 모자라 경험치까지 뺏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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