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뭐야?
저 늙은이는?
[남화요선]
사악한 종교집단이자 역적의 무리인 백련교(白蓮敎)의 좌호법.
날씨 조작과 둔갑술의 달인으로서, 온갖 종류의 술법에 능통한 술법가이다.
요선(妖仙)이라 불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요망하고 사악한 늙은이이다.
분류 : NPC
종족 : 인간
성별 : 남
나이 : 89
레벨 : 299
직업 : 술법가
등급 : 초절정술사
소속 : 백련교
직위 : 좌호법
신분 : 역적
특징 : 날씨를 조작하게 해주는 술법서인 <태평요술서>와 둔갑술의 비법이 적힌 술법서 <둔갑천서>의 주인이라 알려져 있다.
또한, 전설 속의 영물인 황학(黃鶴)을 길들여 타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태평요술서.
둔갑천서.
거기에 영물인 황학까지 준다고?
‘로, 로또다.’
판타지 서버식대로 표현하자면, 내 눈에 저 남화요선이란 영감탱이는 마치 황금고블린처럼 보였다.
이거 완전 2+1 행사상품 아냐?
…는 지금의 나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고작 50레벨 따리가 299레벨의 술법가를 어떻게 잡아?
모르긴 몰라도 150레벨은 돼야 비벼 볼 수 있을 것 같다.
쩝.
아깝다.
하필 내가 이렇게 약할 때 만나다니.
이런 거 보면 나도 별수 없는 게이머인가 보다.
전리품부터 떠올리면서 군침을 질질 흘리는 걸 보면.
하지만 지금의 나는 2+1 행사상품과 싸우기는커녕, 내 몸 하나 챙기기 힘들다.
[연오랑]
생명력 : ■■■■■■■■□□
체력 : ■□□□□□□□□□
기 : ■□□□□□□□□□
조금 전에 벌어진 전투로 체력과 내공이 거의 바닥나 버렸다.
‘괜히 덤볐다가 끔살당하지 말고 몸 사리자.’
만용은 금물.
나는 디버프 마스터.
강한 적을 약해지게 만들어서 결국엔 이기는 것이 내 전문 분야.
쉽게 말해 강자 사냥꾼.
하지만 아무리 디버프 마스터라도 고작 50레벨로 299레벨의 초절정술법가를 사냥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249레벨을 어떻게 극복해?
이건 디버프 마스터 할아버지라도 안 된다.
“깔깔깔깔!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황제의 개들아! 깔깔깔깔!”
남화요선이 염소의 머리로 만든 지팡이를 휘둘렀다.
스으으으으!
차가운 한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어?
느껴진다.
햄찌 녀석의 <미어~ 캣!> 스킬 덕분에 먹구름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하늘 위 먹구름 속.
물방울들이 한기에 의해 빠르게 얼음 결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얼음 결정들의 형상이 보인다.
‘길고 뾰족해. 그리고 엄청나게 많다. 최소 수천 개.’
그렇다면…….
“모두 피해에에에에에!!!”
있는 힘껏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다음 순간.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날카로운 얼음 결정들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 * *
길고 날카로운 얼음 결정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광경이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결과는… 끔찍하리만치 참혹했다.
길고 날카로운 얼음 결정들은 아군의 머리 위로 쏟아졌고, 갑판 위는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어 버렸다.
“으악!”
“으아아아악!”
사방팔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런 미친!”
방패막이로 썼던 왜구의 시체를 내던지며 이를 갈았다.
왜구의 시체는 수십 개의 얼음 결정들이 박혀 고슴도치 같았다.
급한 대로 햄찌 녀석을 끌어안고 널브러져 있던 왜구의 시체를 방패막이로 썼다.
안 그랬으면 내가 고슴도치가 됐겠지.
“뀨우우우우우우!”
햄찌 녀석이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래! 괜찮냐!”
“뀨우! 햄찌 엉덩이에 얼음 박혔다! 뀨우우우!”
그 와중에 한 발 맞은 게 레전드네, 진짜.
하필 또 엉덩이야?
“엄살 피우지 말고. 봐봐.”
“뀨우?”
“셋 센다.”
“뀨? 살살해라! 살살!”
“하나.”
쑥!
녀석의 엉덩이에 박혀 있던 얼음 결정을 뽑아냈다.
“뀨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녀석이 아프다고 비명을 내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캬아아악! 이 미친 주인 놈아! 셋에 뽑는다지 않았냐! 캬아아악!”
“셋 센다고 했지, 셋에 뽑는단 말은 안 했는데?”
셋 세고 뺐으면 둘에 뀨우우우우! 하고 난리난리 오만 엄살은 다 피웠을 거잖아?
“캬아아악! 주인 놈 햄찌 속였냐! 캬아아악!”
“시끄럽고 집중해.”
녀석과 드잡이질할 시간이 없다.
“크으으으윽!”
“사, 살려… 커헉!”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조금 전 공격으로 몇 명이 다치고 몇 명이 죽었는지 가늠도 안 된다.
“교관님! 괜찮습니까! 선배들은요!”
“우린 괜찮다!”
교관님이 소리쳐 대답했다.
운이 좋았다.
얼음 결정들이 쏟아질 때 함교 지붕 밑에 있었으니.
“깔깔깔깔!”
남화요선의 요사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어라! 황제의 개들아!”
화르르르르르!
이번엔 시뻘건 불덩이들이 날아들었다.
“황제의 개들을 처단하라!”
“모조리 죽여라! 미친왕은 생포해라!”
그 와중에 쾌속선을 타고 접근해온 흑의인들이 하나둘 갑판 위로 올라온다.
…이거 답 없는데?
으득!
이를 악물고 덤벼드는 흑의인들과 맞섰다.
‘지원군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대명제국의 지원군이 고작 금의위 위사와 동창 요원 몇십 명일 리가 없다.
확신한다.
저들은 어디까지나 초동조치부대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원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버티면 된다.’
하지만 버티는 것조차 쉽지 않다.
체력과 기가 고갈돼서 그런지 몸이 점점 무거웠다.
“뀨우! 뀨우우!”
햄찌 녀석도 슬슬 힘에 부치는 눈치다.
‘포션이라도 한 병 마시면 좋을 텐데.’
판타지 서버에서처럼 물약을 빨아 가며 버틸 수가 없는 게 못내 아쉽다.
[알림: 축하드립니다!]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림: 51레벨 달성!]
그나마 무림 서버 특유의 레벨업 시스템 덕분에, 전투 중에도 경험치 획득이 가능하다는 게 천만다행이다.
[알림: 생명력이 회복되었습니다!]
[알림: 체력이 회복되었습니다!]
[알림: 기가 회복되었습니다!]
레벨이 오른 덕분에 다시 싸울 힘이 생겼다.
필멸무참진을 전개했다.
스으으으!
나를 중심으로 붉은 장판이 깔렸다.
[필멸무참진]
설명 : 적들의 방어력과 술법저항력을 감소시킵니다.
스킬 레벨이 오를수록 재사용 대기시간이 감소하고, 위력, 지속시간, 범위가 증가합니다.
한 번 펼친 필멸무참진은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형태 : 설치형
범위 : 반경 5미터
효과 : 방어력·술법저항력 -50
레벨 : 1
지속시간 : 30초
재사용 대기시간 : 180초
“죽어라! 애송이!”
흑의인 하나가 덤벼들었다.
“니가 죽어.”
“악!”
흑의인이 단칼에 나가떨어졌다.
어?
필멸무참진의 위력이 예상보다 더 강력했다.
가만.
원래 이 스킬 1레벨 방어력·술법저항력 감소 수치가 -10 아니었나?
5년도 더 전의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근데, 체감상 판타지 서버의 1레벨 스킬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느낌이다.
대신 지속시간이 짧아지고, 재사용 대기시간은 더 길어진 것도 같고?
‘신중하게 쓰라는 건가.’
이 또한 우주의 법칙이 가하는 견제일지도.
‘지금 최대한 많이 처치해야 돼.’
필멸무참진의 효과에 힘입어, 덤벼드는 적들을 닥치는 대로 해치웠다.
“으악!”
“크아아악!”
내게 덤벼든 적들은, 필멸무참진의 효과 때문에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알림: 축하드립니다!]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림: 52레벨 달성!]
[알림: 53레벨 달성!]
고작 30초 사이에 2레벨이 더 올랐다.
역시 필멸무참진.
내 밥줄 스킬답게 위력 하나만큼은 끝내준다.
근데… 지원군은 언제 와?
* * *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더 싸웠는데, 지원군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지들이 무슨 함흥차사인 줄 알아!
“야! 햄찌야! 주변 좀 탐지해 봐!”
“뀨! 알겠다! 급급여율령! 뀨우!”
햄찌 녀석이 부적을 꺼내 <미어~ 캣!> 스킬을 사용했다.
뒤이어 녀석이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들이 내게 공유되었다.
‘온다. 오는데.’
저 멀리 지원군을 태운 군함들이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런데 너무 느리다.
‘굼벵이도 아니고 왜 이렇게 느려?’
원인을 찾아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쏴아아아아아!
쏟아지는 폭우.
촤락! 촤라락!
매섭게 휘몰아치는 파도.
남화요선이 왼손에 펼쳐 놓은 태평요술서를 이용해 지원군의 접근을 방해하고 있었다.
“깔깔깔깔! 죽어라! 죽어!”
그 와중에 오른손으로는 염소 머리 지팡이를 휘두르며 시뻘건 불덩이들을 날리기까지.
‘저 영감탱이부터 어떻게 해야 돼.’
꼭 해치울 필요는 없겠지.
저 영감탱이가 태평요술서를 사용하지 못하게끔 방해만 해도 충분할 거다.
문제는 우리한테 남화요선을 견제할 방법도, 수단도 없다는 건데.
이래서 제공권이 중요하다.
제공권을 잃으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수밖에 없으니까.
“죽어라!”
어?
딴 데 집중하느라 방심했….
푸드득!
푸욱!
총알처럼 날아온 비둘기 한 마리가 흑의인의 머리통에 박혔다.
“…에?”
농담 아니고, 진짜로 박혔다.
두개골을 뚫고, 머리에 박혀 버렸다.
이래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건가.
살다 살다 사람 머리에 비둘기가 꽂히는 걸 다 보네.
푸득! 푸드드득!
비둘기가 흑의인의 머리통에 박힌 제 머리를 빼내려 몸부림쳤다.
깃털 흩날리는 거 보소?
“뀨우! 햄찌가 도와준다!”
햄찌가 비둘기의 꼬리를 잡고 흑의인의 머리통에서 쑥! 빼내 주었다.
“꾸륵?”
비둘기가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더니 내 어깨 위에 살포시 날아와 앉았다.
“어? 꼬꼬야!”
이제 보니 제갈참 교관님이 선물해 준 전서구 꼬꼬였다.
“너 나 구해 준 거냐?”
“구! 구구구구!”
“아이고, 기특해라.”
꼬꼬를 쓰다듬어 주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꼬꼬가 한 건 해 줄지도.’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서 믿을 건 꼬꼬밖에 없는 것 같다.
나 참.
비둘기 따위한테 목숨을 맡겨야 해?
“야, 꼬꼬야.”
“꾸륵?”
“너 나랑 일 하나만 같이 하자.”
일단 말이나 꺼내 보자.
* * *
“깔깔깔깔! 이 버러지 같은 놈들! 모조리 통구이로 만들어 주마!”
황학에 탄 남화요선은 염소 머리 지팡이를 휘둘러 불덩이를 날려 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주문을 외워 왼손에 든 태평요술서를 이용해 날씨를 조작, 풍랑을 일으켜 다가오는 대명제국의 황군을 저지해냈다.
한 번에 두 개의 술법을 동시에 사용한다는 것은, 남화요선이 얼마나 뛰어난 술법가인지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그러던 중.
푸드득!
“구! 구구구구구!”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어 남화요선을 마구 쪼아 대기 시작했다.
비둘기의 공격은 그야말로 매서웠다.
콕! 콕콕!
날카로운 부리가 남화요선의 얼굴을 쪼아 댈 때마다 살점이 뭉텅 떨어져 나갔고.
콰직!
발톱이 팔뚝을 스칠 때마다 피부가 찢어져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쯤 되면 비둘기가 아니라 맹금류의 공격이라 해도 믿길 지경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비둘기 새끼가! 크윽!”
남화요선은 염소 머리 지팡이를 휘둘러 비둘기를 후려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푸득!
푸드드득!
비둘기는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았다.
이게 도저히 비둘기인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감히 미물 주제에 노부를 공격하다니! 내 네놈을 기름에 튀겨 먹을 것이다!”
남화요선이 비둘기를 향해 아득바득 소리쳤다.
하지만 비둘기는 남화요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퍼덕퍼덕!
비둘기는 공중에 멈춰 선 채로 남화요선을 똑바로 노려보기까지 했다.
“네놈 설마.”
남화요선은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영물인 황학을 길들여서 타고 다니는 남화요선에게는 한 가지 특별한 능력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조류와 교감하는 것이었다.
또한, 술법가답게 남화요선은 온갖 영물들에 대해 아주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등 뒤에 세 개의 검은 줄무늬. 은은한 회색빛으로 빛나는 깃털. 대가리에 삐죽 솟아난 깃털 한 가닥. 검은 부리. 그렇다면….’
남화요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악! 네놈은! 그 귀하다는 ㅅ….”
바로 그때.
쒜에에에에엑!
푹!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온 수리검이 태평요술서를 들고 있던 남화요선의 왼쪽 팔목에 틀어박혔다.
“끄악!”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남화요선은 그만 태평요술서를 놓치고 말았다.
뒤이어 태평요술서가 장강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