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악!”
태평요술서를 놓친 남화요선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태평요술서는 둔갑천서와 함께 남화요선이 가장 아끼는 보물.
그런데 그걸 놓쳤으니 당황하는 건 당연한 일.
“구 구구구 구구구구! 구 구구!”
비둘기가 남화요선을 조롱하듯 지저귀었다.
조류와 교감이 가능한 남화요선은, 비둘기의 지저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새 새끼가! 감히 노부를….”
쌔앵!
비둘기는 대꾸하지 않고, 태평요술서를 향해 급강하했다.
“이 새끼 주제에 어딜 노부의 태평요술서를 훔쳐 가려 하느냐!”
남화요선도 급강하하며 비둘기를 뒤쫓았다.
하지만 비둘기가 더 빨랐다.
“황학아! 더 빨리 날아라! 더 빨리 날란 말이다!”
“꾹! 꾸욱!”
“더 빨리 날란 말이다! 이 멍청한 두루미 자식아!”
“꾹! 꾹꾸욱! 꾸욱! 꾹꾸우욱! 꾸우우욱! 꾹꾹!”
남화요선이 아무리 독촉한다 한들 거대한 학(鶴)인 황학의 급강하 속도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하기만 했다.
황학이 제아무리 영물이라 한들 학은 학.
학은 신체 구조상 수직으로 급강하하는 게 불가능한 동물이었다.
종이 가지는 한계점마저 극복하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덥석!
비둘기가 추락하는 태평요술서를 두 발로 낚아채더니, 연오랑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 이이…!!!”
남화요선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 분노는 황학에게 고스란히 쏟아졌다.
퍽! 퍼억!
남화요선이 염소 머리 지팡이로 황학의 목덜미―머리는 너무 멀어서 때릴 수가 없었다―를 마구 내리쳤다.
“이 느려터진 새 새끼 같으니라고! 네놈이 그러고도 영물이냐! 이리 무능한 줄 알았다면 네놈이 아니라 대붕(大鵬)이나 삼두일족응(三頭一足鷹)으로 진즉 갈아탔을 터인데! 이 쓸모없는 새 새끼!”
퍽! 퍼억! 퍽!
남화요선은 온갖 폭언·욕설 퍼부어대며 염소 머리 지팡이로 황학을 마구 두들겨 팼다.
그만큼 태평요술서를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가 컸던 것이다.
“꾹! 꾸욱!”
황학이 눈물을 찔끔 흘리며 애처롭게 울어 댔다.
그러는 사이.
“구! 구구구!”
태평요술서를 낚아챈 비둘기는 유유히 연오랑이 타고 있는 배에 도착했다.
남화요선이 가장 아끼는 보물인 태평요술서를 들고.
* * *
혹시나 싶어 믿어 보기로 했는데, 결과가 상상 이상이다.
내가 던진 수리검이 적중할 수 있었던 건 꼬꼬가 저 요사스러운 영감탱이를 혼쭐내 주고 주의까지 끌어준 덕분이었다.
만약 꼬꼬가 아니었다면 이 먼 거리에서 저 영감탱이를 저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거다.
“구! 구구구!”
꼬꼬가 푸드덕거리며 날아왔다.
“꼬꼬야!”
“구! 구구구구!”
꼬꼬가 내 머리 위로 날아가며 책 한 권을 툭! 하고 떨궜다.
[알림: <태평요술서>를 획득했습니다!]
대, 대박.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이렇게?
[태평요술서]
날씨를 조작하는 술법이 담긴 전설의 술법서.
아주 오래 전 한 도인이 신선이 되기 전 작성하고 등선했다 알려져 있으며, 오랜 세월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분류 : 책 (술법서)
등급 : 전설
내구도 : 98 / 100
사용제한 : 술법가 전용
레벨제한 : 250레벨 이상
특징 : 뛰어난 술법가가 아니라면 읽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위대한 경지를 이룩한 술법가들은 태평요술서를 이용해 온갖 종류의 자연재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전해진다.
술법가가 아닌 무인의 경우 현경의 경지를 이룩하면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을지도?
술법가가 아니라면 읽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어디 보자.
책을 펼쳐 보았다.
1. 두껍게 썰어낸 통 삼겹살을 팬에 겉만 노릇하게 잘 익혀 주세요.
2. 냄비에 물을 넣고 겉을 익힌 삼겹살, 대파, 생강, 양파, 마늘, 월계수 잎, 통후추를 넣고 푹 삶아 주세요.
3. 청경채는 잘 씻어 4등분 해 주세요.
(중략)
…이거 동파육 조리법 아냐?
술법가가 아니라면 못 읽는다더니 진짜 안 읽힌다.
“구! 구구구구!”
내 어깨에 내려앉은 꼬꼬가 부리를 들이밀었다.
“잘했다, 잘했어!”
“구구구!”
“아이고, 예쁜 내 새끼!”
“구! 구구구구! 구구구구!”
“오구오구 그랬어? 잘했어! 진짜 잘했어!”
예뻐 죽겠다.
비둘기 주제에 299레벨의 술법가를 상대로 태평요술서를 뺏어올 줄 누가 알았겠어?
쓰담쓰담 꼬꼬를 칭찬해 주는데.
퍽! 퍼억!
저 멀리 영감탱이가 애꿎은 황학의 목덜미를 마구 두들겨 패며 동물 학대를 시전하고 있었다.
쯧쯧.
그러게 주인 잘 만났어야지.
저런 요사스러운 영감탱이나 태우고 다니니까 험한 꼴 당하는 거 아냐.
쩝.
근데 불쌍하긴 하다.
황학이 뭔 죄가 있다고 저렇게 두들겨 패냐.
이 쓰레기 같은 영감탱이.
“캬아아악! 영감탱이 동물학대 한다! 캬아아악!”
햄찌가 털을 곤두세우며 저 멀리 영감탱이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같은 동물이라고 감정이입 하는 거 보소?
“야, 참아. 별수 없잖아.”
“캬아아악!”
“우리가 지금 당장 구해 줄 수도 없고. 지 팔자려니 해야지.”
황학이 불쌍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지금 우리 능력으로는 황학을 구해 주기는커녕 내 코가 석 자인 상황.
태평요술서를 뺏어 온 것도 꼬꼬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활약 덕분이지, 우리 실력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을 뿐.
“이 망할 비둘기야! 내 태평요술서를 돌려내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영감탱이가 황학 학대를 멈추고 날아오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
펑! 퍼엉!
시뻘건 불덩이가 연신 날아들며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튀어!”
“뀨!”
급한 대로 몸을 날려서 날아드는 불덩이들을 피했다.
“대명제국 수군이여! 역적의 무리들을 처단하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저 멀리서 아군 함대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죽자고 퍼부어 대던 폭우도.
휘몰아치던 바람도.
사납게 들이치던 파도도.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태평요술서를 빼앗은 덕분에 조작되었던 날씨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다.
펑펑! 펑!
펑펑!
대명제국의 군함들이 황학을 탄 영감탱이를 향해 함포를 퍼부어 대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장군이 마치 폭주기관차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물 위를 뛰어서.
저걸 등평도수(登萍渡水)라고 하던가?
아니면 수상비(水上飛)?
나도 저거 할 줄 아는데….
‘황룡출 그 사람인가?’
느껴진다.
무지막지한 힘이.
그때 봤던 그 황룡출이라는 NPC가 분명하다.
무려 600레벨.
위대한 현경의 경지를 이룩한 초강자가.
“황룡출!!!”
영감탱이도 황룡출 장군을 발견하고 놀라 소리쳤다.
하긴.
299레벨의 술법가라 해도 600레벨의 무인을 상대로는 어림도 없다.
황학을 타고 날아간다 한들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끝이다.
현경의 고수라면 20~30미터쯤 점프하는 건 일도 아니니까.
“애송아!”
영감탱이가 내게 소리쳤다.
“태평요술서를 잘 가지고 있도록 해라! 노부가 반드시 되찾으러 갈 것이니!”
영감탱이는 그 말을 남기고는, 황학을 타고 구름 속으로 쏙 사라져 버렸다.
풉.
쫄기는.
황룡출이 무서워서 도망치는 주제에.
하긴.
나 같아도 무서워서 도망치겠지만.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진짜 뒈질 뻔했네.”
난간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뀨! 주인놈아! 고생했다! 영감탱이 물리쳤다! 뀨우!”
“그래, 너도 고생했어. 여기 와서 좀 쉬어.”
“뀨! 알겠다!”
꼬꼬가 대가리를 슥 들이밀었다.
“구! 구구구!”
짜식.
“네가 공이 제일 크지! 뭐 좋아하냐? 내가 맛있는 거 사 줄ㄲ….”
퍼어어어어어어어어엉!!!
갑자기 대폭발이 일어났다.
…이런 씨발.
* * *
띠링!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배에 실려 있던 화약통에 불이 붙어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알림: 배가 산산조각 났습니다!]
[알림: 당신의 캐릭터가 폭발에 휘말렸습니다!]
[알림: 당신의 캐릭터가 기절했습니다!]
[알림: 상태이상!]
[알림: <상태이상 : 기절>에 걸렸습니다!]
[알림: 캐릭터의 사망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알림: 기다리십시오!]
으득!
“그 영감탱이 끝까지 똥 싸지르고 튀네.”
울컥! 짜증이 나 캡슐을 확 열어젖혔다.
그 요사스러운 영감탱이가 던진 불구덩이 때문에 배에 불이 붙었고, 그 불이 화약통까지 옮겨붙은 거겠지.
에라이!
진짜 잘 버텼는데 마지막에 배가 폭발해 버리는 게 어딨냐!
운도 지지리도 없지.
“두고 보자 이 영감탱이.”
복수를 다짐했다.
똥 뿌린 것도 똥 뿌린 거지만, 애꿎은 황학을 학대한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햄찌, 꼬꼬, 교관님, 그리고 선배님들이 걱정돼 캡슐 앞을 떠날 수가 없다.
꼬르륵.
이 와중에 배는 고프네.
컵라면이나 한 사발 해야지.
캡슐 앞에 죽치고 앉아 컵라면을 먹으며 수시로 로그인을 시도했다.
[알림: 기다리십시오!]
[알림: 기다리십시오!]
[알림: 기다리십시오!]
(중략)
[알림: 기다리십시오!]
한동안 로그인이 되지 않았다.
3시간쯤 지났을 무렵.
[알림: <상태이상 : 기절> 해제까지 앞으로 10초!]
오?
다행히 내 캐릭터는 안 죽은 모양이다.
[알림: 9, 8, 7, 6, 5, 4….]
[알림: 3, 2, 1!]
[알림: <상태이상 : 기절>이 해제되었습니다!]
눈앞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깨어났느냐.”
제갈참 교관님의 얼굴이 보였다.
“뀨! 주인놈아! 일어났냐!”
“구! 구구구!”
햄찌 녀석과 꼬꼬도 날 반겨 주었다.
“…여긴 어딥니까?”
주변을 둘러보니 장강 한복판이었다.
근데 왜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
“아니, 그보다.”
제갈참 교관님께 물었다.
“선배들은요?”
“근이가 좀 다치긴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 같구나.”
“아하.”
다행이다.
혹시나 누군가 죽었으면 마음 아플 뻔했잖아.
“물에 빠진 네 녀석을 건져다가 나룻배에 실어 현장을 빠져나온 참이다.”
“네? 그 난리 통에?”
“그렇다.”
능력도 좋으셔.
“왜요?”
“황궁에서 벗어나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느냐?”
“황궁을 벗어납니까? 제가?”
“나는.”
교관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녀석을 실종 처리할 생각이다.”
“헉?”
“현 시간부로 네 녀석은 폭발에 휘말려 실종된 것이다. 알겠느냐?”
“왜죠.”
내가 물었다.
“저를 풀어주시는 이유가 겁니까?”
“네 녀석은 황궁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자유롭게 천하를 휘젓고 다녀야 하는 놈 그 답답한 황궁 안에서 얼마나 버티겠느냐?”
“하지만….”
“물론 동창제독 각하와의 거래가 있었을 테지. 하나 황궁은 무서운 곳이다. 동창제독 각하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네 녀석을 잡아 두려 할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느냐.”
그 누님 그럴 사람 같지는 않던데.
“물론 동창제독 각하께선 깊은 배려심과 아량, 그리고 상냥한 성격을 지니신 분이다. 하지만 황궁이란 곳은 그런 사람마저 냉혹한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곳. 네가 가진 재능과 능력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아.”
“규화보전의 비급을 수정하는 임무를 맡았더구나. 복사본은 가지고 있느냐.”
“늘 가지고 다니죠.”
“그럼 되었다. 나중에 임무를 완수하거든 전서구를 통해 동창제독 각하께 보내 드리면 될 터.”
교관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품속을 뒤적여 은자가 담긴 주머니를 내게 건네주었다.
“넉넉지는 않으나 노잣돈으로 쓰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툭.
뱃머리가 뭍에 닿았다.
“정말… 보내 주시는 됩니까?”
“네 녀석이 계속 황궁에 머물러 봤자 사고밖에 더 치겠느냐?”
“쳇.”
“저 드넓은 강호로 가거라. 오직 천하만이 네 녀석을 품어줄 수 있을 터이니.”
뭔가 찡하다.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맨날 사고만 쳤었는데.
“한 가지만 약속해 다오.”
“뭡니까.”
“협객이 되진 못할지언정 마인(魔人)만은 되지 말아다오. 잠시나마 인연이 닿았던 사람으로서의 부탁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믿겠다.”
교관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혹시나 제갈세가의 후손을 만나거든 잘 챙겨주었으면 좋겠구나. 내 얘기는 하지 말고.”
참.
제갈세가 출신이라고 하셨지.
“네, 알겠습니다.”
“명심하거라. 강호에선 노인과 여자와 아이를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다만.”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이별의 시간이다. 가라, 강호로.”
교관님이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예.”
햄찌와 꼬꼬를 데리고 나룻배에서 내렸다.
“그간.”
척!
“정말 감사했습니다.”
포권을 취해 교관님께 예를 올렸다.
“그래,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나자꾸나.”
“예! 다시 만날 때까지 몸 건강히! 보중하십시오!”
교관님께 인사를 올리고 저 드넓은 강호를 향해 내달렸….
철푸덕!
하 씨.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