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예로부터 이 드넓은 강호에는 무수히 많은 저 하늘의 별들만큼이나 인재가 많다고 했다.
그런 만큼 기인이사(奇人異士, 기괴하고 이상한 사람)도 많은 법.
천기자(天機子)는 그런 기인이사 가운데서도 가장 기이한 인물이었다.
적어도 천기자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에 한에서만큼은.
천기자는 천기를 읽는 데 능했으며, 주역에도 통달한 달인이었다.
또한, 관상학·풍수지리학·천문학·해몽 등등 여러 분야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 천기자의 예언은 빗나가는 일 없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운명과도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물론 천기자의 존재와 그 정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이 드넓은 강호에서도 몇 되지 않았지만.
약 100일 전.
천기자는 안휘성에 들렀다가 오랜 친구인 검왕(劍王) 남궁혁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다.
검왕이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인 남궁혁은 화경의 경지를 이룩한 고수였다.
하지만 그런 무공 실력이 무색하게도, 남궁혁의 바둑 실력은 아주 형편없었다.
“한 수만 물러주면 안 되겠나?”
궁지에 몰린 남궁혁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딱 한 수만 물러주게. 내 부탁일세.”
“그럴 순 없네. 내기 바둑에서 봐주는 게 어디 있나. 그냥 좋게 내놓게.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고.”
천기자가 손바닥을 내밀어 돈 달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한 수만 물러 주래도.”
“내놓게.”
“그리 매정하게 굴어야겠나?”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일세.”
물러주니 마니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끝에, 남궁혁이 품속에서 은자를 꺼냈다.
“거, 사람 참. 정말 매정하군.”
남궁혁이 은자를 건네며 천기자를 타박했다.
“잘 쓰겠네. 끌끌끌.”
천기자가 은자를 받아 챙기며 히죽 웃었다.
“그만하세. 이제 재미없군.”
“왜 그만해?”
“벌써 몇 판째인 줄 아는가? 자네랑 계속 두었다가는 주머니 속 은자가 아주 거덜 나게 생겼네!”
“억울하면 실력을 키우면 될 것이 아닌가?”
“누군 노력하지 않은 줄 아는가? 요즘은 이름난 바둑 선생까지 초빙해서 배우고 있네! 근데 도무지 안 느는 걸 어떡하나!”
남궁혁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남궁혁은 정말로 노력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바둑에 대한 애정이 깊고 승부욕도 있어 평생을 연습했지만, 실력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차라리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지경이었다.
“핑계는.”
“핑계가 아닐세. 재능이 없는 걸 낸들 어떡하겠는가. 노력해도 안 느는 것을.”
“그놈의 재능 타령은. 꼭 못하는 놈들이 재능 타령하면서….”
그때.
“이, 이 무슨!”
천기자가 저 멀리 백주대낮에 떨어지는 별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
“왜 그러나?”
“저길 보게.”
천기자가 하늘을 가리켰다.
뜬금없이 나타난 별.
오색 찬연한 빛깔을 품은 별이 수도 남경이 자리한 방향으로 떨어지다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저 별은 뭔가?”
“나도 모르겠네.”
“자네 같이 천문에 밝은 사람도 모르는 별이 있는가?”
남궁혁이 놀랐다.
천기자는 매일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천문학과 점성술을 깊게 공부한 기인.
그런 천기자가 모르는 별이 있다니….
“저 별은.”
천기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하늘의 별이 아닐세.”
“으응?”
“다른 세상의 별일세. 별계성(別界星), 그것도 지존성(至尊星)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히 좀 말해 보게!”
남궁혁은 천기자의 말뜻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수십 년을 알고 지냈지만, 천기자는 무엇 하나 자세히 알려 주는 법이 없었다.
“또 천기누설이랍시고 안 알려 줄 텐가?”
“물론일세.”
“허허.”
“아무래도 이만 가 봐야겠네.”
“갑자기?”
“즐거웠네. 다음에 또 보세나.”
“이보게! 이 친구야! 어디 가나!”
남궁혁이 멀어지는 천기자를 향해 소리쳤다.
“남경으로 가네!”
천기자는 그 말을 남기고, 담장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 * *
교관님과 헤어진 다음 날.
“어디 보자….”
로그인하자마자 퀘스트창을 열었다.
메인 퀘도 받았겠다,
[카렐을 찾아서]
내용 : 호북성 무한(武漢) 어딘가에 있는 천기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자.
분류 : 에픽 퀘스트
진행률 : 0% (0/1)
보상 : 없음
제한시간 : 15일
참고 : 서두르십시오! 천기자는 정처 없이 강호를 떠도는 인물이라 언제 어디로 이동할지 모릅니다!
“호북성?”
월드맵을 열어 현재 위치와 호북성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았다.
지금 위치가 허현(和县).
수도인 남경에서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그럼 호북성까지는…….
“야 이.”
욕이 절로 나왔다.
이곳 허현에서 무한까지는 거의 600킬로미터.
경로를 보니 걸어서 120시간 거리다.
하루에 20시간씩 걷기만 해도 꼬박 일주일은 걸리겠지?
문제는 무림 서버는 이동이 매우 불편한 세계라는 거다.
판타지 서버에서는 가까이 있는 워프 게이트를 타고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했다.
어반 서버에서는 자동차·기차·비행기 등 현대적인 이동수단을 이용한다나?
하지만 무림 서버는 다른 서버들에 비해 이동수단이 마땅치 않단다.
성 하나가 어지간한 나라만큼이나 크니, 이 드넓은 세계관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라는 의미라나?
성질 급한 한국인들에게는 최악의 세계관 같은데, 막상 그건 또 아니란다.
오히려 중국인 게이머들이 어반 서버에 많고, 정작 무림 서버에는 한국인들이 더 많단다.
이건 여담인데, 판타지 서버에는 일본인 게이머들이 많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본인 게이머들은 유독 이세계에 집착한단 말이야?
그건 그렇고.
‘각 성마다 워프 게이트 같은 시설이 있다고는 했으니까. 여기서 가장 가까운 성이… 안휘성이네.’
가장 가까운데도 걸어서 이틀 정도는 걸릴 것 같다.
환장하겠네.
“뀨! 주인놈아! 우리 어디로 가냐!”
“구! 구구구!”
햄찌와 꼬꼬가 물었다.
“안휘성 합비까지 가야 되는데. 걸어서 2~3일 정도 걸릴 것 같다. 에라이.”
하여간 정신 나간 게임이다.
어떤 미친 게임 회사가 게이머한테 이 드넓은 대륙을 걸어 다니라고 하겠냐고!
현실에서도 잘 안 걷는데!
단언컨대, 이게 다 BNW가 전 세계를 강타한 히트작이라서 가능한 거다.
그저 그런 게임이었으면 어림도 없었겠지.
걸어서 이동하다가 스트레스받은 이용자들이 죄다 폐사했을 거다.
그런데도 버젓이 서비스되는 걸 보면 갓겜은 갓겜이다.
잠깐!
이거 갑질 아냐?
꼬우면 접으라는?
그래!
내가 더러워서!
어?
꼬우니까 접…… 긴 뭘 접어!
열심히 해야지.
“멍꿀멍꿀.”
입에서 개돼지 울음소리가 절로 나온다.
사료 주는 사람 없나?
“뀨! 주인놈아!”
“어?”
“걸어가기 힘들면 햄찌 타고 가라! 뀨!”
“널 타고 가라고?”
“뀨! 그렇다!”
“어떻게?”
함께한 지는 오래됐지만, 정작 햄찌를 타 본 적은 없는 거 같다.
애초에 판타지 서버는 이동수단이 넘쳐나는 세계라서, 굳이 녀석을 타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적도 없었고.
“뀨! 햄찌 주인놈 태울 수 있다! 뀨우! 술법 쓰면 된다!”
“그래?”
“뀨! 기다려라!”
햄찌가 품속에서 부적을 꺼내 수인을 맺으며 주문을 외웠다.
“급급여율령! 뀨!”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햄찌 녀석이 연기에 휩싸였다.
근데 달라진 게 없다.
실망인데?
말(馬) 같은 걸로 변신할 줄 알았는데.
“…그냥 몸만 좀 커진 거잖아.”
평소에 뒷다리로 직립보행하던 놈이 엎드려서 네 발로 땅을 디뎠다는 걸 빼면.
어?
원래 이게 정상 아냐?
햄스터 원래 네 발로 걷잖아.
“뭐가 달라진 건데? 똑같잖아.”
“캬아아악! 주인놈 햄찌 못 믿냐! 캬아아악! 햄찌 존나 빠르다! 캬아아악!”
“그, 그래?”
“그렇다! 뀨!”
“그래, 그럼.”
속는 셈 치고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푸드덕!
꼬꼬 녀석이 내 정수리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정수리엔 앉지 마!
그러다 탈모라도 생기면 어떡해!
고자인 것도 서러운데 대머리까지 되긴 싫다고!
“뀨! 주인놈아! 출발한다!”
“그ㄹ….”
쌔애앵!!!
어?
x나 빠르다.
“야! 뭐가 이렇게 빨라!”
“뀨! 축지법이다! 뀨우!”
“추, 축지법?!”
“뀨우우! 그렇다! 뀨! 주인놈아! 햄찌 축지법 쓴다! 뀨우우!”
그런 노래가 있었던 거 같은데.
제목이…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뀨! 주인놈이 길 알려 줘라! 햄찌는 축지법 쓴다! 뀨우!”
“그래!”
까짓것 내비게이션 노릇 못 할 게 뭐야?
이렇게 빠른데.
쌔앵!
축지법을 쓴 햄찌는 어마어마하게 빨라서, 어지간한 명마도 우습게 따돌릴 것 같다.
근데…….
뽈뽈뽈뽈뽈!
발소리 왜 이래?
* * *
햄찌가 뭐 빠지게 달려준 덕분에 안휘성 합비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했다.
걸어서 2~3일 걸릴 거리를 몇 시간 만에 도착했으니 이만하면 대만족이다.
“헥헥! 햄찌 죽는다! 뀨우!”
햄찌는 합비에 도착하자마자 대자로 뻗어 버렸다.
“고생했어. 좀 쉬어.”
“뀨우. 일어설 힘도 없다. 뀨우우.”
“업혀.”
“뀨?”
“걷기도 힘들다며.”
“알겠다. 뀨우.”
햄찌 녀석을 업고 합비의 중심가로 향했다.
소곤소곤!
귀가 간지럽다.
“뭐야? 요괴를 왜 업고 다녀?”
“서생원을 업고 다니는 놈은 또 처음이구먼.”
본의 아니게 시선을 끌어버린 모양.
알 게 뭐야.
뭐 어때.
내가 업고 다니겠다는데.
햄찌 놈은 날 태우고 여기까지 뭐 빠지게 뛰어왔는데, 쪽 좀 팔린다고 어떻게 내팽개쳐?
‘저기다.’
저 멀리 커다란 제단 주변에 게이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알고 계셨나요?]
무림 서버에서는 각 성마다 워프 게이트인 도약문(跳躍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게이머 여러분은 도약문을 통해 각 성으로 빠른 이동이 가능합니다!
단, 요금이 매우 비싸고 한 달에 한 번만 이동할 수 있으니 신중하게 이용하세요!
한 달에 한 번?
에라이!
그냥 햄찌 타고 다니는 게 낫겠다!
‘얼마나 비싸기에 그래?’
이용요금을 확인해 보았다.
[안휘성 도약문]
안휘성에 설치되어 있는 도약문.
요금 : 은자 30냥부터~
참고 1 : 억울하면 돈 버십시오!
참고 2 : 돈 없으면 그냥 걸어 다니십시오!
은자 30냥?
이 세계에서 은자 1냥의 가치가 약 10만 원 정도라고 했으니까.
10냥이면 100만 원.
30냥이면… 300만 원.
“나, 날강도 아냐?”
심지어 30냥이 기본요금이란다.
호북성처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성들은 30냥.
좀 멀다 싶으면 50냥.
운남, 신강, 서장, 흑룡강, 청해 등등등.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려면 100냥도 넘는다.
게임 가볍게 즐기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용하라고!!!
‘그냥 햄찌 타고 갈까? 너무 비싼데.’
교관님이 준 50냥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써 버리자니 아깝단 생각이 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햄찌 놈 타고 호북성으로 갈 걸 그랬나?
“뀨우. 주인놈아. 왜 도약문 안 타냐.”
“이거 너무 비싼데?”
“주인놈 거지냐? 뀨우?”
울컥!
순간 욱할 뻔했다.
돈 없는 게 이렇게 서러울 줄이야.
“주인놈 돈 없으면 그냥 가자. 햄찌가 태워 준다. 뀨우.”
“괜찮겠냐?”
“자주자주 쉬면 괜찮다. 뀨.”
“그, 그래.”
아무래도 돈을 벌 때까지는 햄찌 녀석한테 신세를 좀 져야 할 것 같다.
무림 서버에선 탈것이 매우 중요하다더니…….
툭!
발걸음을 돌리는데 누군가와 부딪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으으.
꼬리뼈 찍힌 거 같아.
“에이 씨. 똑바로 안 보고다ㄴ… 헉?”
부딪친 사람 얼굴을 보고 심장이 쫄깃해졌다.
몸은 사람인데 머리가…….
‘원숭이???’
무슨 혹성탈출도 아니고 원숭이 인간은 뭔데?
무림 서버엔 이런 종족도 있나?
“죄송합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원숭이 인간이 사과하며 손을 내밀었다.
윽.
뭔 원숭이도 아니고.
손등에 털 난 거 보소?
그런데.
‘가만.’
어라라?
‘왜 얼굴이 흐릿하게 겹쳐 보이는 건데?’
다시 보니 원숭이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것도 훤칠하게 잘생긴.
부잣집 도련님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도 하고.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이상하다 싶은데.
띠링!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통찰의 인장>이 삭제되었습니다!]
[알림: <심안>을 개안(開眼)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