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통찰의 인장은 정보를 읽어내는 시스템적인 장치로서, 게이머라면 누구나가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통찰의 인장이 삭제됐다고?
심안은 또 뭐고?
[심안]
마음의 눈.
절대자의 경지에 오른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
통찰의 인장보다 더 많은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게 해준다.
때에 따라 숨겨진 정보도 읽어낼 수 있으며, 사용자의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강화된다.
아.
이해됐다.
본캐가 가진 통찰력이 계승된 거라 이거지?
내 본캐 지크프리트 폰 프로아는 판타지 세계의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게 가능하다.
그 능력이 무림 서버의 연오랑으로 계승되면서 <심안>이란 이름이 붙은 모양이었다.
‘하긴. 내 통찰력이 어디 간 건 아니니까.’
비록 육체는 약해 빠진 연오랑이지만, 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힌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어디 보자.’
심안을 이용해 나와 부딪혔던 부잣집 도련님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어어?
보인다, 보여.
으응?
‘원숭이 인간이잖아?!’
심안으로 본 부잣집 도련님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 인간이었다.
[지존보]
구분 : NPC
종족 : ?
성별 : 남
나이 : ?
레벨 : ?
등급 : ?
소속 : 지가장(至家莊)
직위 : 소가주
특징 : 안휘성 지씨세가의 막내아들. 안휘성에서 남궁세가 다음으로 세력이 큰 무림세가의 자제이나, 무공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뭔가 있다.’
심안으로도 종족, 나이, 레벨, 등급 등 주요 정보들이 안 보인다는 건 상대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증거.
‘도대체 정체가 뭐야?’
심안의 위력을 조금 더 높여 보기로 했다.
“……?”
내가 빤히 쳐다보자 지존보는 당황스러웠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 진짜 정체가….’
으응?
쾅!
갑자기 엄청난 충격이 날 때렸다.
“커헉!”
입에서 피가 거의 한 사발쯤 뿜어져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지존보가 날 부축했다.
“뀨! 주인놈아! 괜찮냐!”
“구! 구구구!”
햄찌와 꼬꼬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다가와 괜찮은지 물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자식 도대체 뭐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슥 닦으면서, 날 부축해 준 지존보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단순히 정체 좀 알아보려 했던 것뿐인데, 이렇게 큰 충격이 되돌아오는 게 말이 돼?
‘설마 튕겨낸 건가?’
지존보의 표정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크게 다치신 겁니까?”
“어. 음.”
“다 제가 앞을 제대로 못 보고 다닌 탓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의원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럴 것까지는 없고.”
내상 좀 입은 것 가지고 의원은 무슨.
“아닙니다.”
지존보가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피를 토하셨다는 것은 저와 부딪혀 넘어지실 때 크게 다치셨단 증거입니다. 그러니 제가 의원으로 모시는 것이 옳게 된 도리입니다.”
“괜찮다니까.”
한사코 거절하는데, 지존보가 은자 한 덩이를 내밀었다.
어?
“그럼 이거라도 받아주십시오. 혹시 모르니 의원을 찾게 되시거든 치료비로 사용하십시오.”
“아이고, 감사합니다.”
냉큼 은자를 받아 들고 고개를 숙였다.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놈은 아닌 게 분명하다.
돈 주는 놈치고 나쁜 놈이 어딨어?
다 착한 놈이지.
안 그래도 호주머니 사정이 가볍던 차에 잘됐다 싶다.
“뀨! 주인놈아! 지금 뭐 하는 거냐! 뀨우우!”
햄찌가 소리쳤다.
“주인놈 자존심 어디 갔냐! 뀨우! 옛날에는 길가다 부딪치는 놈들은 모조리 두들겨 패 주지 않았냐! 뀨우!”
“뭐?”
“주인놈 쳐다봤다고 사람 패는 거 취미 아니었냐! 뀨우!”
“내가 언제!!!”
이 미친놈이 진짜!
이젠 하지도 않은 걸 했다고 하네?
이게 누굴 나락 보내려고!
“서생원께서 어지간히 화가 나셨나 봅니다. 하하.”
지존보가 삐질 땀을 삐질 흘리며 햄찌에게 당과를 내밀었다.
“서생원께서도 기분 푸시지요.”
“뀨우?”
“부디 너그러이 넘어가 주셨으면 하는 제 마음이 담긴 선물입니다.”
“뀨! 햄찌가 봐준다! 뀨우! 당과 맛있어서 그런 거 절대 아니다! 뀨우!”
태세전환 보소?
언제는 자존심 어디 갔냐며!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지존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만하면 사과와 보상은 충분히 드린 것 같은데, 그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이고오, 아무렴요. 가던 길 가셔야죠, 공자님.”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원숭이 인간 지존보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오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이내 곧 사라져 버렸다.
“돈 줬으니까 착한 놈은 맞는데. 뭔가 묘하게 기분이 나쁘네.”
“뀨? 주인놈이 그게 무슨 말이냐?”
“쓸데없이 예의 바르잖아. 기분 나쁘게 초면에 존댓말부터 박고.”
“…뀨?”
“농담이고.”
왠지 모르겠는데, 지존보가 사라진 방향에서 눈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원숭이 인간이라.’
도대체 정체가 뭐야?
꼬르륵!
…는 배가 고파졌다.
“뀨? 주인놈아! 배고프냐! 뀨우!”
“그런 것 같네.”
게임 BNW는 쓸데없이 퀼리티 높고 디테일한 게임.
캐릭터에 주기적으로 음식물을 공급해줘야 한다.
안 그럼 캐릭터가 굶어 죽는다고?
“뀨! 햄찌도 배고프다! 뀨우! 밥 먹으러 가자! 뀨우!”
“그럴까?”
“구! 구구구!”
그러자 내 머리 위에 앉아 있던 꼬꼬 녀석도 배가 고팠는지 지저귀었다.
“그래, 그럼. 밥 먹으러 가자.”
금강산도 식후경… 이 아니라.
여긴 안휘성이니까 안휘성도 식후경이라고 해야 맞는 건가?
에라, 모르겠다.
일단 밥이나 먹자.
* * *
근처 객잔으로 가서 만두 세 접시, 오리탕 한 그릇, 야채볶음 하나를 시켰다.
“음. 이 집 만두 잘하네.”
“뀨! 야채볶음도 맛있다! 뀨!”
나와 햄찌는 물론 꼬꼬 녀석도 한자리에 앉아 음식을 나눠 먹었다.
쩝.
원래 축생들이랑 겸상하는 거 아닌데.
“구! 구구구!”
꼬꼬 녀석도 배가 고팠는지 연신 오리탕에 든 오리 다리를 쪼아 먹었다.
잠깐.
비둘기 주제에 오리고기 먹어도 되는 거 맞냐?
“쩝쩝. 쩝쩝쩝.”
“쩝쩝. 쩝쩝쩝.”
“구구. 구구구.”
한참 밥을 먹는데, 알림창이 떠올랐다.
으응?
[알림: 포식대법으로 화기(火氣)를 흡수했습니다!]
[알림: 포식대법으로 화기(火氣)를 흡수했습니다!]
(중략)
[알림: 포식대법으로 화기(火氣)를 흡수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화(火) 속성의 기가 조금씩 충전됐다.
‘포식대법???’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포식대법은 과거 판타지 서버에서 상대했던 적들 중 가장 강력하고 까다로웠던 놈이 사용하던 스킬인데?
황급히 스킬창을 열어 <포식대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포식대법]
설명 : 이 세상 모든 기운을 흡수하게 해 주는 기술.
기운을 흡수하는 데 있어 최고의 기술이며, 가장 완벽한 형태의 포식대법이다.
숙련도 : 1성
아무래도 판타지 서버에서 사용하던 스킬이 계승되어 포식대법이란 이름으로 바뀐 모양이다.
‘조리된 음식을 먹어서 화 속성의 기운을 흡수하는 건가? 이러다 밥만 먹어도 강해지는 거 아냐?’
심안도 그렇고.
이 포식대법도 그렇고.
냄새가 폴폴 난다, 폴폴 나.
딱 봐도 스킬이 사기 그 자체다.
‘우주의 법칙이 견제할 만하네. 이런 스킬들을 가지고 있는데.’
나라는 존재가 이곳 무림 서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대강 느낌이 왔다.
이래서 슈퍼계정인데도 다른 서버에 캐릭터 생성 오류가 생긴 건가?
아무튼.
[알림: 포식대법으로 화기(火氣)를 흡수했습니다!]
[알림: 포식대법으로 화기(火氣)를 흡수했습니다!]
(중략)
[알림: 포식대법으로 화기(火氣)를 흡수했습니다!]
밥도 먹고.
화기도 흡수하고.
일석이조를 몸소 실천하며 식사를 마쳤다.
[알림: 허기짐이 사라졌습니다!]
[알림: 포만감이 차오릅니다!]
[알림: 캐릭터의 지구력이 더 이상 하락하지 않습니다!]
“꺼억! 자알 먹었다!”
“뀨! 햄찌도 잘 먹었다! 뀨우!”
“구! 구구구!”
그렇게 객잔을 나서는데, 저 멀리 게이머들이 저잣거리에 설치된 게시판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어?’
게시판 위에 황금색 느낌표가 떠올라 있었다.
‘퀘스트다!’
이건 못 참지.
게이머가 퀘스트를 어떻게 참아?
“잠시만요, 실례합니다. 예, 잠시만요.”
인파를 뚫고 게시판을 확인해 보았다.
어차피 갈 길이 바빠서 다른 퀘스트를 붙잡고 있을 시간은 없지만, 그래도 궁금하니까.
[현상수배]
이자들은 대명제국의 국법을 어기며 살인·강간·절도·방화 등 여러 중범죄를 저지르며 나라를 어지럽혔으므로 이에 수배함.
이자들을 목격하면 가까운 관아에 신고하거나, 직접 체포 또는 척살해서 공을 세울 시 그에 걸맞은 포상을 지급하겠음.
알고 보니 황금색 느낌표가 떠올라 있던 게시판은 범죄자들을 지명수배해 놓은 거였다.
오.
친절하게 인상착의까지 그림으로 그려 놨다.
어디 보자.
누가 누가 수배됐나.
- 노인공격 (PC)
- 대머리애호가 (PC)
- 파계괴승 (NPC)
- 색귀 (NPC)
- 두창색마 (NPC)
(중략)
(중략)
- 천둔신투 (NPC)
PC는 게이머.
NPC는 말 그대로 NPC.
각 항목을 들여다보니 범죄자들의 인상착의와 범죄혐의, 그리고 신고 포상금 및 체포와 척살에 따른 현상금 금액이 적혀 있다.
어휴.
다들 생긴 것 좀 봐라.
범죄자 놈들답게
하여간 관상은 과학…… 응?
‘천둔신투 얘는 뭔데 이렇게 비싸?’
일개 도적놈 주제에 생포 현상금이 무려 500만 냥이었다.
1냥의 가치가 10만 원 정도라고 했으니까, 생포해 시 무려 5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알림: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알림: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알림: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중략)
[알림: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일단 게시판에 있는 모든 범죄자들에 대한 퀘스트를 받아뒀다.
지금 당장 깰 건 아니고.
갈 길이 바쁘니까.
혹시 모르니까 일단 받아 둔 거다.
“뀨! 주인놈아! 범죄자 사냥하려고 그러냐! 뀨우!”
“혹시 몰라서 그냥 본 거야.”
“뀨! 알겠다! 그럼 갈 길 가자! 뀨우!”
“그래.”
누가 뭐래도 가장 급한 건 <카렐을 찾아서>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
본연의 임무를 잊으면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어?
뭔가 이상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 *
자세히 보니, 내 시선을 잡아끈 사람은 잘생긴 가짜 얼굴 뒤에 추악한 얼굴을 숨긴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그렇다는 말은 어떠한 방법이나 능력을 이용해 본래 얼굴을 숨기고 있다는 거겠지?
‘얼굴을 숨기고 현상수배 게시판을 들여다보는 놈이라.’
킁킁! 냄새가 난다.
뒤가 구린 놈들이 풍기는 그 특유의 악취가.
‘범죄자들은 범행현장에 나타나기 마련이라지.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자세히 보자.
잘생긴 가짜 얼굴 뒤에 숨겨진 놈의 정체를.
‘어디서 봤더라?’
뭔가 낯이 익다.
분명히 어디서 본…….
‘아!’
기억이 떠오르고.
띠링!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현상수배 : 색귀]
내용 : 안휘성 일대에서 각종 성범죄 및 연쇄살인 등을 저지른 흉악범 색귀(色鬼)를 체포하는 데 공을 세워 보자!
타입 : 선착순 퀘스트
진행률 : 0% (0/1)
보상 :
- 신고 시 은자 500냥
- 척살 시 은자 700냥
- 생포 시 은자 1,000냥
주의사항 : 선착순 퀘스트는 가장 먼저 클리어한 사람에게만 보상이 주어지므로,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색다르게 퀘스트를 수행해야 합니다!
씨익-
웃음이 절로 나왔다.
돈이 제 발로 굴러 들어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