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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버프로 무림정복-37화 (37/115)

제37화.

색귀는 오래간만에 안휘성의 성도인 합비를 찾았다.

색귀가 사는 곳은 고작 20가구가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고, 이따금 생필품이 필요할 때면 합비에 들르곤 했다.

“어머, 어머.”

“거참 잘생긴 공자님이구먼.”

“어쩜 저리 잘생기셨을까.”

색귀는 합비에 들를 때면 잘생긴 귀공자의 얼굴을 주로 사용하곤 했다.

아무도 잘생긴 귀공자가 그 무시무시한 흉악범 색귀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색귀가 범행에는 진짜 얼굴을 사용하고, 평소에는 여러 가짜 얼굴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 이유였다.

필요한 생필품을 사고 길을 걷던 색귀는, 문득 관아 앞 게시판에 새로운 방문이 내걸린 걸 보았다.

‘키키! 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새끼들! 백날 날 쫓아봐라! 키키키!’

색귀는 자신의 진짜 얼굴이 그려진 방문을 보고 못내 흐뭇했다.

색귀로 활동한 지 어언 20년.

무능한 관아는 아직도 그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 차곡차곡 쌓인 현상금이 어느새 은자 1,000냥까지 올라 있었다.

‘현상금을 10,000냥까지 올려 봐라. 내가 잡히나. 키키키키!’

범행을 저지르고 나면 관군들이 몇 달쯤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지만, 색귀는 검문조차 받은 적이 없었다.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최근에는 다른 세상에서 강림했다는 천인이란 족속들까지 그를 잡기 위해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기까지 했다.

‘키키! 백날 쫓아봐라. 난 앞으로도 늙어 죽을 때까지 쾌락을 즐기다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것이다. 키키키!’

색귀는 의기양양한 발걸음으로 게시판을 뒤로했다.

합비를 빠져나가면서, 색귀는 얼굴과 변장을 두 번이나 바꾸는 등 조심성과 치밀함을 발휘했다.

‘음?’

집으로 돌아가는데, 문득 뒤를 밟히고 있다는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저 머저리 같은 놈들은?’

아까부터 머리에 비둘기를 쓴 청년이 커다란 서생원과 함께 뒤따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딱 봐도 천인 같은데. 설마 내 정체를 눈치채고 따라오는 건가.’

급히 숨는 걸 보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단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저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

틈틈이 뒤돌아보았지만, 머리 위에 비둘기를 쓴 청년과 쥐새끼는 어느 순간 사라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좀 예민했나 보군.’

색귀는 안심하고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이이이이이이!”

“아이고오! 우리 딸! 잘 있었느냐?”

색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번쩍 안아 들고 미소를 지었다.

“다녀오셨어요, 여보. 별일 없으셨고요?”

“별일이야 있었겠소? 하하하!”

“고생하셨어요.”

색귀는 자신을 반겨주는 처자식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결혼을 했어? 심지어 딸까지 있다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덜덜덜!

손발이 벌벌 떨린다.

“이게 사람 새낀가?”

“캬아악. 햄찌 화났다. 저 새끼 당장 때려죽이러 갈 거다. 캬아아악.”

햄찌도 털을 곤두세우며 분노했다.

“캬아악. 주인놈아. 뭐 하냐. 당장 저 새끼 때려죽이러 가자. 캬아악.”

“당연히 그래야ㅈ… 가 아니라.”

일단 참자.

“좀 지켜보자.”

“캬악! 그게 무슨 소리냐! 캬아악! 당장 쫓아가서 때려죽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캬아아악!”

“그건 맞는데.”

우선 햄찌를 달랬다.

“딸이랑 아내는 뭔 죄야?”

“캬아악?”

“처자식은 죄 없잖아. 딸이랑 아내도 피해자잖아.”

“뀨우. 그건 그렇다.”

“굳이 험한 꼴 보게 하지 말자. 색귀는 다른 데서 잡아다가 관아에 넘기고, 따로 조용히 얘기해 주자.”

“뀨?”

“얘기를 해 줘야 미리 도망치지. 연쇄살인범의 가족이라는 게 알려지면 아내와 딸도 좋은 꼴 못 볼 거야. 관아에 끌려가서 조사도 받고, 마을 사람들한테 손가락질도 당하겠지. 손가락질만 당하면 다행이게? 해코지도 당할걸.”

색귀는 때려죽여도 마땅하다.

하지만 아내와 딸은 아무런 죄가 없다.

죄가 있다면, 색귀에게 속아 결혼한 것과 그의 딸로 태어났다는 거겠지.

“딸은 몰라도 아내는 공범일 수도 있으니까. 하루 이틀 정도는 지켜보자고. 좀 참고.”

“뀨. 알겠다.”

“꼬맹이한테 아버지가 저잣거리에서 사지가 찢겨 죽는 꼴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

“뀨. 주인놈아.”

“응?”

“주인놈 이제 사람 된 거냐? 뀨?”

“뭐 인마?”

왜 갑자기 시비야?

“뀨! 주인놈 예전 같았으면 아내고 딸이고 신경 안 썼다! 뀨우! 벌써 덮치고도 남았다! 뀨우우! 주인놈 성질 많이 죽었다! 뀨! 사람 된 거 같다! 뀨!”

“야 이.”

햄찌 녀석에게 눈을 부라렸다.

“이럴 땐 철들었다고 하는 거거든?”

“뀨우?”

“야, 내 나이가 몇인데 옛날처럼 무작정 깽판 치고 그러겠냐?”

“그런 거냐! 뀨우!”

“너나 철 좀 들어라! 인마! 피차 유부남인 건 마찬가지지만 넌 자식들도 있잖아!”

햄찌 이놈 자식이 벌써 둘이다.

아들 하나.

딸 하나.

“하여간 철이 덜 들었어. 애들 보기 안 부끄럽냐?”

“캬아악? 지금 주인놈 패드립치는 거냐? 캬아아악?”

“이게 뭔 패드립이야!”

“캬아아악!”

“어쭈? 덤벼? 이게 진짜!”

어쨌거나 하루 이틀 정도는 색귀를 지켜보기로 했다.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니라, 피해자일지도 모르는 그 자식의 처자식을 위해서.

* * *

색귀의 집 근처에 자리를 잡고 놈을 감시하기로 했다.

꼬꼬한테 색귀의 집 지붕에 앉아 색귀와 처자식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도록 했다.

“사랑하오.”

“저도 사랑해요.”

색귀 부부는 사이가 매우 좋아 보였다.

“우리 예쁜 공주님! 하하하!”

“아버지 목말 태워 주세요!”

“그러엄!”

색귀와 딸의 관계도 매우 좋았다.

겉으로 보기엔 문제 될 것 하나 없는 화목한 가정처럼 보였다.

꼬꼬는 밤에도 색귀를 감시하… 기는 개뿔!

“뭐야.”

잘만 공유되던 시야와 소리가 드문드문 끊겼다.

“이거 왜 이래?”

시야가 깜빡깜빡 끊어졌다 연결되길 반복하고, 소리도 들렸다 안 들렸다 통신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야, 술법 고장 난 거 아냐?”

“뀨우?”

“시야랑 소리가 끊겨서 들리잖아.”

“뀨! 그게 아니라 꼬꼬가 조는 거다! 뀨우!”

“…조는 거라고?”

“뀨! 그렇다! 비둘기 주행성 동물이다! 밤에는 쿨쿨 잔다! 뀨우!”

“…….”

“주인놈 몰랐냐! 뀨! 비둘기들은 다 밤에 잔다! 뀨우!”

그, 그런 거였어?

하긴.

생각해 보니까 밤에 돌아다니는 비둘기를 본 기억이 없긴 해?

“그래서 시야가 위아래로 흔들리고 꺼졌다 켜졌다 하는 건가? 꾸벅꾸벅 졸아서?”

“뀨! 그렇다!”

“에라이.”

그럼 어떡하지?

“뀨! 주인놈 걱정 마라! 이제 햄찌가 감시한다! 뀨우!”

“아! 그 방법이 있었지!”

“급급여율령! 뀨!”

햄찌가 부적을 불태우며 주문을 외우자 대형견만 했던 햄찌의 덩치가 손바닥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뀨! 주인놈아! 여기 있어라! 햄찌가 꼬꼬 자는 동안 색귀 놈 감시한다! 뀨우!”

“그래, 수고.”

햄찌 덕분에 밤에도 색귀를 감시할 수 있게 됐다.

“흐흐! 이리 와 보시오!”

“아이참, 당신도.”

색귀 부부는 금슬도 참 좋았… 잠깐!

이거 범죄 아냐?

이런 것까진 안 듣고 싶다고!

‘진짜 당장에라도 패 죽이고 싶네.’

색귀를 감시하면 감시할수록 그 추악한 위선에 분노가 치솟았다.

색귀는 가족들 앞에서도 인피면구를 벗지 않았다.

상급 인피면구로 변장할 수 있는 얼굴 중 하나인 농민의 모습으로 처자식을 대했다.

으으.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그나저나 색귀 놈은 꿈에도 모르겠지.

낮에는 꼬꼬가, 밤에는 햄찌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어?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이게 딱 그런 경우 아냐?

그렇게 계속 감시하는데.

스윽.

색귀 놈이 아내가 마실 물에 하얀 가루를 타는 게 보였다.

“갑자기… 너무… 졸려요… 서방님이 안아 주시면 너무 행복해서 그런가 봐요….”

“어서 주무시오. 하하하.”

색귀 놈의 아내가 마치 죽은 것처럼 스르륵 눈을 감았다.

아까 물에 탄 가루가 수면제 같은 거겠지.

‘아내는 공범이 아냐. 만약 공범이었으면 굳이 수면제를 먹여서 재울 필요가 없었을 테지.’

이제 마음 편히 색귀 놈만 족치면 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아내한테 수면제를 먹인 걸 보면 오늘 밤 범행을 저지르려는 거겠지?

그럼 빨리 움직여 주면 좋을… 굿!!!

스윽.

몰래 집을 빠져나온 색귀가 절대 벗지 않던 인피면구를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복면을 뒤집어쓰고 어디론가 향했다.

꼬라지가 딱 봐도 범행을 저지르러 가는 거겠지.

휙!

햄찌 녀석이 재빨리 색귀 놈의 봇짐―가방―에 숨어드는 게 보였다.

믿고 있었다고! 젠장!

나이스 쥐새끼!

햄찌의 활약 덕분에 들키지 않고 조용히 색귀의 뒤를 밟을 수 있게 됐다.

저 멀리 햄찌가 머리를 삐죽 내밀고 내게 엄지 척! 따봉을 날렸다.

질 수 없지.

척!

나도 따봉을 날려줬다.

오고 가는 따봉 속에 우정이 싹트는 거 아니겠어?

* * *

아내를 재우고 집을 빠져나온 색귀는 곧장 목적지로 향했다.

‘크윽! 도저히 못 참겠다!’

합비에 다녀온 날이라 피곤했지만, 욕구를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가 가진 욕망은 평범한 일상생활로는 절대 채울 수가 없는 거였고, 3개월에 한 번 정도는 충족시켜 줘야 했다.

마침 합비에 갔다가 현상금이 50냥 오른 걸 보고 나니 욕구를 참기가 더욱 힘들기도 했고.

그래서 색귀는 미리 봐 뒀던 사냥감에게로 향했다.

색귀는 매우 교활했고, 신중했으며, 또한 철두철미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충동적으로 누군가를 건드렸는데, 상대방이 고강한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라면?

혹은 관아에서 함정수사를 펼친 거라면?

그럼 정말 끝장이었다.

그래서 색귀는 미리 표적을 정해 두고, 적게는 한 달에서 많게는 석 달까지 느긋하게 지켜보며 범행 계획을 세우곤 했다.

이번 표적은 집에서 30리(里) 정도 떨어진 야산에 사는 가난한 화전민의 딸이었다.

색귀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들은 2년째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외딴 야산에 아버지와 딸 단둘이 살아가고 있어서 표적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슝! 슈웅!

경공술을 발휘해 한달음에 표적이 사는 곳으로 달려간 색귀는, 즉시 범행에 나섰다.

색귀는 먼저 아버지를 흠씬 두들겨 팬 후에 꽁꽁 묶어 두고, 공포에 질려 있던 딸에게 다가갔다.

“읍!!! 으으으으읍!!! 으으으으으읍!!!”

입에 재갈이 물린 화전민 아버지는 피 맺힌 절규를 토해내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이러지 마세요. 제, 제발….”

공포에 질린 딸이 울며불며 애원했다.

“크흐흐! 내가 왜 욕구를 참고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냐? 크흐흐흐흐!”

색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흐흐! 흐흐흐!”

색귀가 딸을 향해 다가섰다.

“흑흑! 흑흑흑!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흑흑… 악!”

딸은 겁에 질려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큭큭큭! 이런 멍청한 년 같으니! 오냐! 알아서 자빠져 주는 것이냐? 크흐흐흐! 그래, 거기 곱게 누워 있어라. 내가 가서….”

퍼억!

“컥!”

색귀가 돌연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캬아아아악!”

어느새 몸을 거대화시킨 햄찌가 앞발을 휘둘러 색귀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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