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지구후리투(地球后理鬪) 반(反) 후로아(后路我).”
엥?
“그것이 네 정체가 아니더냐.”
뭔 소리야.
지구후리투?
반 후로아?
설마…….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를 그렇게 발음하시는 겁니까? 지금?”
“지구후리투 반 후로아라고 하였다.”
“전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인데요.”
“그러니까 지구후리투 반 후로아 아니냐!”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라니까요!”
“그게 그거지!”
“뭐가 그게 그겁니까! 아예 다른데!”
“뭐가 다르냐! 똑같다! 지구후리투 반 후로아라고 하질 않았느냐!”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라니까요!”
“그러니까 지구후리투 반 후로아라고 계속 말하고 있는데 뭐가 아니란 거냐!”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
“지구후리투! 반! 후로아!”
“이런 X팔!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라니까!”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딜 어르신 앞에서 쌍욕을 지껄이는 게야! 지구후리투 반 후로아라고 몇 번을 말했거늘!”
“거 발음 좀 똑바로 하십쇼! 혀까지 늙으셨습니까? 예?”
“내 발음이 뭐가 어때서!”
무림 서버 NPC라 그런지 아무리 말을 해 줘도 발음이 고쳐지질 않는다.
그래, 바랄 걸 바라야지.
무림 서버 NPC가 서양식 발음을 잘 구사하길 바라는 내가 병신이지.
“아, 예. 됐습니다. 그냥 지구후리투 반 후로아라고 해 두죠, 뭐.”
“내가 언제 그렇게 발음했느냐! 지구후리투 반 후로아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발음 가지고 노인네랑 옥신각신 티격태격 싸우던 도중.
“근데 어르신은 제 본명을 어떻게 아십니까?”
엄밀히 말하면 본명은 아니긴 하지.
내 본명은 한태성이니까.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는 어디까지나 판타지 서버에 있는 본캐 이름이고.
“그대가 정말 지구후리투 반 후로아가 맞소?”
하.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라니까.
“예, 맞습니다. 사실 아닌데 그렇다고 해 두죠. 근데 어르신은 제 본래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
“나는 천기자라고 하오.”
어?
그 천기자?
“정말 천기자 어르신이세요?”
“그렇소이다.”
노인.
아니, 천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기자]
드넓은 중원 대륙을 무대로 활동하는 술법가 겸 무인 겸 역술인 겸 천문학자 겸 관상가 겸 풍수지리가 겸 예언가.
여러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한 천재이나, 명성을 드높이는 데에는 별반 관심이 없어 아는 사람만 알음알음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숨겨진 기인(奇人)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걸 보는 이로 알려져 있다.
분류 : NPC
종족 : 인간
성별 : 남
나이 : 93
레벨 : 299
직업 : 술법가 / 무인 / 역술인 / 관상가 / 풍수지리가 / 천문학자 / 예언가 등등등.
등급 : 초절정
소속 : 천하 (天下)
특징 : 천하를 싸돌아다니기 일쑤라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없다.
성질이 매우 괴팍해서 어딜 가나 말썽을 일으키기 일쑤.
하지만 그의 마음에 든다면 어쩌면 인생 조언을 들을 수 있을지도?
어쩐지 내 본캐 이름을 알고 있더라니.
‘드디어 찾았다. 드디어.’
이 영감탱이 하나 찾자고 무한에서부터 얼마나 개고생을 했느냐는 말이야!
“다른 세계의 지존께선 어찌 우리 세계에 강림하시었소이까.”
천기자가 내게 물었다.
“한낱 필부(匹夫)일지언정 세계와 세계를 오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오. 한데, 그대는 다른 세계에서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무적의 힘을 손에 넣은 절대자가 아니오?”
“오?”
“그대와 같은 존재가 세계와 세계를 오가려면 큰 대가를 치러야 했을 터인데? 어찌 그 대가를 감수하시고 다른 세계인 이곳까지 강림하셨단 말이오?”
제대로 안다.
나를 제대로 알아.
크흑!
눈물이 다 나올 것만 같다.
날 알아봐 준 사람… 영감님이 처음인걸요?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남자는 자길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도 바칠 수 있다는 말.
물론 저 영감님을 위해서 내 아까운 목숨을 바칠 생각은 단 1도 없지만.
“어르신께선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카렐을 찾아서> 퀘스트의 첫 단추니까 나에 대해서 아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일단 물어봤다.
“나는 평범한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오.”
“음.”
“어느 날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보는데?
번쩍!
악!
내 눈!
갑자기 하얀 섬광이 번뜩이더니.
콰앙!
뜬금없이 내리친 벼락이 천기자를 노렸다.
“히, 히이이이익!”
가까스로 벼락을 피해낸 천기자가 경기를 일으켰다.
아니이… 뭔 지하실에 번개가 쳐…….
“더, 더는 말해선 안 될 것 같소이다.”
“예?”
“함부로 천기누설을 했다간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기 마련 아니겠소? 그대가 이 세계에 오느라 치러야 했던 대가처럼 말이오.”
“방금 그게….”
“그렇소. 하늘이 내게 내린 경고요. 이 삼라만상의 이치를 거스르지 말라는 경고 말이오.”
딱히 뭘 말한 건 없는 거 같은데?
뭐, 어쨌든.
“아무튼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
천기자에게 정식으로 인사하려는데.
콰앙!
식인마녀가 지하실 문을 박차고 나타났다.
* * *
쏜살같이 계단을 내려온 식인마녀가 우리에게 물었다.
“방금 무슨 소리지?”
휙!
“방금 무슨 소리냐고 물었을 텐데?”
식인마녀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식칼로 날 겨눴다.
왜 하필 나야!
“아, 아무 소리도 안 났는데요? 하하. 하하하.”
“새파랗게 어린놈이 감히 본녀에게 거짓말을 해? 본녀가 귀가 먹은 줄 아느냐?”
“정말 아무 소리도 안 났습니다.”
“그래?”
“네….”
식인마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다가, 딱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발걸음을 돌렸다.
휴.
다행이다.
“만일 시끄럽게 해서 본녀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허튼수작 부리는 놈들은 제일 먼저 도축할 테니 그런 줄 알아라. 알겠느냐.”
“네에.”
식인마녀가 나가고.
띠링!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고 계셨나요?]
주의하십시오! 만약 제압당한 상태에서 도축을 당하면 180일 동안 게임에 접속할 수 없습니다!
180일???
무려 6개월???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그러니까, 짜장면 재료가 되면 6개월 동안 정지라 이거지?
‘제압 상태에서 신체가 훼손돼서 그런 건가?’
게임 BNW의 시스템은 특이하다.
모든 게이머들은 사망 시 5분 이내에 시체가 사라지고, 49시간이 지난 뒤 사지 멀쩡하게 부활한다.
하지만 제압당한 상태에서 신체 특정 부위, 그러니까 머리카락이나 땅콩을 수확당하면 부활한다 해도 재생되지 않는다.
도축당하면 180일 동안 접속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마 비슷한 맥락이겠지.
그게 무슨 말인지 쉽게 설명하자면…….
‘x됐네.’
x된 거 맞다.
어떻게 다시 시작한 게임인데.
도축당해서 180일 동안 강제로 게임 접게 생겼으면 x된 거 맞지 뭐.
“어떻게 된 겁니까?”
천기자에게 물었다.
“왜 여기 잡혀 계신 거죠?”
“4달 전쯤. 그대를 만나러 남경까지 갔었소. 하지만 만나지 못했다오.”
“아? 저 그때 황궁 안에 있었거든요.”
“황궁?”
“예, 뭐. 사정이 있어서.”
“황궁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이오?”
“어, 그게….”
순간 말문이 막힌다.
쪽팔리게 환관지망생한테 빙의되는 바람에 땅콩을 잃었다고 어떻게 말하냐고!!!
심지어 천기자는 내 진짜 정체도 아는데!!!
“뀨! 그건 햄찌가 설명해 준다! 주인놈….”
“닥쳐!”
몸통박치기로 햄찌를 냅다 들이받았다.
“뀨욱!”
벽에 머리를 부딪친 햄찌가 축 늘어졌다.
후후후.
좋아, 기절했어.
당분간 조용하겠지.
“그 뭐. 흠. 흠흠. 일이 좀. 흠흠. 있었습니다. 흠흠흠.”
“황궁이 무슨 볼일이 있었기에….”
“그건 말씀드릴 수 없으니까 더는 묻지 마시죠. 중요한 건 제가 황궁 안에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만나지 못했던 모양이구려. 허허. 어쩐지. 남경을 이 잡듯 뒤졌거늘.”
“그거야 그렇다 치고. 왜 여기 잡혀 계신 거죠?”
“호북성 무한에 들렀다가 신형관상병독이 유행하는 것 같아 사천으로 가려던 참이었소.”
“그러니까 사천으로 가던 도중에 이 객잔에 들렀다가 붙잡히신 거라고요?”
“그렇소이다.”
천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혼약이 든 차를 마시는 바람에 그대로 기절했고, 눈떠 보니 여기였소.”
“용케도 살아 계시네요.”
“늙은 고기는 맛도 없는데 양도 얼마 안 나올 것 같다면서 살려 두더구려.”
“예?”
“보시오. 나를 도축해 봐야 고기가 뭐 얼마나 나오겠소.”
하긴.
천기자는 삐쩍 꼴은 노인이라 내가 식인귀라도 구미가 당기지 않을 것 같다.
“정 식재료가 없을 때 쓸 거라면서 살려 두더이다. 허허. 때론 늙은 것도 장점이 될 때가 있나 보오.”
아.
어쩐지 객잔에 사람이 한 명 들어올 때마다 제한시간이 1주일씩 늘어나더라니.
“그런데 그대는 어찌 알고 이 늙은이를 찾아온 것이오?”
“그건 나중에 얘기하죠. 지금은 여길 살아서 탈출하는 게 우선이니까.”
“동의하오.”
근데 여길 어떻게 탈출하지?
지금부터 생각을 해 보자, 생각을.
* * *
“으윽! 으으으윽!”
도대체 뭐로 묶은 건지, 아무리 용을 써도 밧줄이 끊어지지 않았다.
우웅!
내공을 써 봤지만 소용없었다.
꽈아아악!
“으아아아악!”
오히려 내공을 사용할수록 밧줄은 더욱 세게 조여서, 온몸이 부서질 것 같다.
평범한 밧줄 같았으면 내공을 써서 손쉽게 끊어 버렸을 텐데.
“소용없네.”
천기자가 날 뜯어말렸다.
“천잠사를 몇 가닥 섞어 만든 밧줄이라 질기기가 상상을 초월한다네. 내공을 쓰면 쓸수록 더욱 강하제 조여 오지. 심지어 내공을 빨아들이기까지 한다네.”
“에라이.”
역시 평범한 밧줄이 아닌 모양.
잠깐.
천잠사 몇 가닥을 섞어 만들어?
[명왕삭]
천잠사 몇 가닥을 섞어 만든 밧줄.
한 번 묶이면 풀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분류 : 밧줄 (포승줄)
등급 : 희귀
내구도 : 100 / 100 (수리불가)
사용제한 : 없음
레벨제한 : 없음
효과 :
- 강도 +500%
특징 : 기를 빨아들이면서 조여드는 특성이 있어서, 이 밧줄에 묶인 상태로 무리하게 내공을 사용하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다.
몇 가닥이면 얼마 되지도 않을 텐데…….
‘도대체 천잠사로 짠 옷은 강도가 얼마나 대단하다는 거지?’
문득 천잠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방천가위로는 쉽게 자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침 천잠사를 전문적으로 자르는 도구가 있긴 하다.
방천가위.
색귀 놈에게서 뺏은 가위를 이용한다면, 이 명왕삭이란 밧줄도 쉽게 자를 수 있겠지.
문제는 손발이 꽁꽁 묶여서 자르기는커녕 드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내가 오징어라면 몰라도.
‘뭔가 방법이 있을 텐데. 방법이.’
잠시 고민하던 중 좋은 생각이 났다.
밧줄을 굳이 자를 필요도 없겠는데?
아!
“야! 햄찌야! 야! 일어나! 야 인마!”
몸을 데굴데굴 굴려서 기절한 햄찌 곁으로 가 녀석을 깨웠다.
“뀨우…?”
햄찌가 서서히 눈을 떴다.
“야! 햄찌야! 빨리 일어나서 밧줄 좀 풀어 봐!”
“뀨? 햄찌가 밧줄을 어떻게 푸냐! 뀨우! 햄찌도 해 봤는데 안 된다! 온몸에 멍들었다! 봐라!”
미안한데 네가 털북숭이라서 멍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안 보이거든?
“이 멍청아!”
“뀨?”
“그냥 몸을 작게 만들면 되잖아!”
숲의 대정령인 햄찌는 커다란 곰처럼 몸을 거대화할 수도 있고, 몸을 햄스터만 한 크기로 작게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몸을 작게 만들면 밧줄은 알아서 풀릴 거고! 네가 자유의 몸이 된 다음에 우릴 풀어주면 되잖아!”
“뀨우~?”
햄찌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하면 되는 거였냐? 뀨우?”
“당연히 되지! 왜 안 돼? 설마 벌써 해 봤냐?”
“당연히 안 해 봤다! 뀨!”
그래, 네가 그럼 그렇지.
하여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니까.
근데…… 너 왜 당당하냐?
멍청한 게 뭐 자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