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가진 좋은 습관들 중 하나는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 거였다.
나는 물건을, 특히 아이템의 경우엔 어지간해선 버리는 법이 없었다.
‘혹시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게 내 지론이었고, 나는 그 지론에 따라 온갖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꾸역꾸역 쌓아 두곤 했다.
남들은 그런 나를 한심하다고 여기곤 했다.
왜 그런 쓰레기들을 가지고 다니냐고.
무슨 고물상이냐고.
그런 하찮은 잡동사니들로 뭘 할 수 있겠냐고.
하지만 틀린 건 그들이지 내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다니던 잡동사니들의 용도를 재발견해내 큰 이득을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판타지 서버를 플레이하던 시절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다니던 똥 묻은 양피지가 그러한 경우였다.
알고 보니 똥 묻은 양피지는 반으로 쪼개진 보물지도 중 하나였고, 나는 그 보물지도를 통해 게임 내에서 가장 가치 높은 아이템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세상에 이유 없는 아이템은 없다.
단지 그 용도를 정확히 모를 뿐이다.
그러니까 어지간해서는 들고 있자.
그게 내 신념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쓰레기인 경우가 더 많긴 했지만 단 0.00001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난 기꺼이 고물장수를 자처할 거다.
여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예를 들어 로또 1등 당첨 확률이 814만 5,060분의 1.
0.0000123%.
그런 로또도 사야 당첨이 되는 거지, 확률이 낮다고 안 사면 그 0.0000123%의 확률마저도 없는 거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색귀를 털어서 얻은 아이템들을 단 하나도 버리지 않고 인벤토리에 넣어 뒀고, 미혼약도 그중 하나였다.
“일단 이거 가지고 나가서 정찰 좀 해 와.”
“뀨?”
“식인귀들의 숫자가 식인마녀랑 주방장 두 명이 맞는지, 주방장은 얼마나 강해 보이는지, 또 다른 일당이 있는지 좀 알아봐.”
몸을 작게 한 햄찌라면 충분히 지하실을 빠져나가 밖을 정찰할 수 있겠지.
“딱히 특이사항 없으면 식인마녀랑 주방장이 먹는 물이나 음식에 이걸 타.”
“뀨우?”
“식인마녀랑 주방장이 미혼약에 중독돼서 잠들면, 그때 공격하자. 굳이 정면으로 대결할 필요 없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미혼약에는?
미혼약!
“뀨우우우!”
햄찌가 눈을 크게 떴다.
“뀨! 주인놈아! 똑똑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 뀨우우!”
천기자도 날 칭찬했다.
“옳거니! 아주 훌륭한 계략일세! 빈틈이 없구먼!”
아까 갈굼을 배불리 먹고 한껏 의기소침해져 있던 곽말풍도 이때다 싶었는지 입을 열었다.
날 칭찬해서 분위기를 좀 바꿔 보려는 거겠지?
“오오! 역시 동창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는 뭐가 달라도 다르…….”
“닥쳐!”
곽말풍을 향해 냅다 드롭킥을 날렸다.
“꾸웩!”
가슴팍에 드롭킥을 얻어맞은 곽말풍이 저 멀리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이 눈치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새끼야!!!
천기자 앞에서 그딴 소리를 지껄이면 어떡해!!!
누구 쪽팔릴 일 있…….
“동차아아앙?”
천기자가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봤다.
아.
x발.
“방금 동창이라 했는가?”
“그, 그게 아니라.”
“푸하하하하!”
천기자가 배를 잡고 웃었다.
“동창이라니! 동창이라니! 푸하하하하! 별계의 지존성이 고자라니! 푸하하하하하!”
“…….”
“푸하하하! 온 우주가 웃을 노릇이로다! 무적의 힘을 넣은 존재가 고자가 되다니! 푸하하하하하!”
웃기겠지.
천기자는 내 진짜 정체를 아니까.
한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절대자가 다른 세계에서 땅콩을 수확당하고 환관이 됐다면 나라고 안 웃을 자신은 없다.
없는데.
그래도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쁜 거고, 쪽팔린 건 쪽팔린 거다.
나라고 이렇게 되고 싶었겠냐고!
우주의 법칙이 날 견제하는데!
게다가 저 눈치 없는 새끼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그것만 아니었어도 황궁을 빠져나가고도 남았어!
“거 적당히 좀 하십쇼.”
“푸하! 푸하하하! 푸하하하!”
“적당히 하라니까.”
“아, 알겠네. 큭큭. 큭큭큭. 흐윽. 흐으으윽.”
천기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괴로워했다.
“고자라니… 다른 세계의 절대자가 고자라니… 큭큭… 큭큭큭….”
“…….”
“그래… 그렇지… 중원 대륙이 어떤 곳인데… 큭큭큭! 이 험난한 강호를 얕봤다간… 큭큭큭! 아무리 다른 세계의 절대자라도… 큭큭! 고자 신세를 면할 수 없….”
“그만해에에에에!!!”
참다못해 천기자에게 달려들어 드롭킥을 날렸다.
부웅!
저 멀리 날아간 천기자가 이제 막 일어나려던 곽말풍을 덮쳤다.
“꾸웩!”
“컥!”
한데 뒤엉켜 나자빠진 천기자와 곽말풍.
“둘 다 분위기 파악 안 되지? 어?”
허리춤에서 방천가위를 슥 꺼내 들었다.
샥, 샥!
“딱 대.”
“뀨우우우! 주인놈아! 참아라!”
“놔!”
“뀨우! 주인놈아! 그건 너무 심하다! 뀨!”
“놔! 놓으라고! 확 그냥 X벌! 둘 다 잘라 버릴 테니까!”
햄찌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말리고 나서야 겨우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동창이니 고자니 그딴 소리 한 번만 더 하기만 해 봐, 아주.
진짜로 잘라 버릴 테니까.
* * *
“잘 보고 와. 알겠지. 너만 믿는다?”
“햄찌만 믿어라! 뀨우!”
“일단 정찰부터 하고 와. 적들이 더 있는지, 주방장은 얼마나 세 보이는지.”
“뀨! 알겠다!”
햄찌가 몸을 작게 만든 뒤 쥐구멍을 통해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약 30분쯤 지난 뒤.
“뀨! 주인놈아! 햄찌 왔다!”
정찰을 마친 햄찌가 보고 들은 내용을 얘기해 줬다.
“뀨! 지금 식인마녀랑 주방장 손님 없어서 식재료 다듬고 있다! 뀨우!”
“그래?”
“뀨! 그렇다!”
“샅샅이 둘러보고 온 거 맞아?”
“뀨! 햄찌 못 믿냐! 뀨!”
“당연히 믿지.”
믿… 기는 개뿔.
믿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믿는 거지.
“식인마녀랑 주방장 두 명이 다다! 뀨우!”
“주방장은 세 보이냐?”
“뀨! 주방장 X나 세 보인다! 뀨우! 잘못 건드리면 X될지도 모른다! 뀨!”
“헉.”
햄찌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심안까지는 아니어도 보는 눈은 있으니까.
“오케이. 알겠어. 가서 식인마녀랑 주방장이 먹는 거에 미혼약을 타. 알겠지.”
“뀨! 알겠다!”
“그다음에 걔네가 잠들면 와서 문 열어 줘.”
“걱정 마라! 햄찌만 믿어라! 뀨우!”
“그래. 기다릴게.”
“뀨! 알겠다!”
햄찌를 기다리는 동안 꼬꼬와 금의위 위사 두 명을 깨운 뒤 밧줄을 풀어 줬다.
[알림: <명왕삭>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알림: <명왕삭>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중략)
[알림: <명왕삭>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나, 햄찌, 꼬꼬, 천기자, 곽말풍, 그리고 금의위 위사 둘.
이렇게 총 7개의 명왕삭도 알뜰하게 챙겼다.
후후.
이런 좋은 밧줄을 그냥 두고 갈 순 없지.
무려 천잠사가 섞인 밧줄인데.
그래 봤자 몇 가닥이라 1%나 될까 말까 하긴 하지만.
“저, 저기! 저도 풀어 주시면 안 됩니까?”
마지막 남은 건달 한 놈이 애원했다.
“저도 살고 싶습니다! 제발!”
“살고 싶으면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 괜히 방해하지 말고. 일만 잘 풀리면 어련히 알아서 살려 줄 테니까.”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햄찌를 기다리는데.
‘얘 왜 이렇게 안 와? 뭐 문제라도 생겼나?’
슬슬 걱정이 될 무렵.
끼이익!
지하실 문이 열리고.
“뀨! 주인놈아! 다들 잠들었다! 어서 올라와라! 뀨우!”
햄찌가 고개를 삐죽 내밀고 신호를 주었다.
“갑시다.”
즉시 일행을 이끌고 지하실을 빠져나와 객잔으로 올라갔다.
“식인마녀 어딨어?”
“저쪽에서 야채 다듬다가 잠들었다! 뀨!”
햄찌가 식인마녀가 엎어져 있는 탁자를 가리켰다.
조심조심 다가가 보니, 식인마녀는 손에 청경채를 든 채로 곯아떨어져 있…….
‘누, 눈을 뜨고 있어?!’
식인마녀와 눈이 딱 마주치는 바람에 심장이 멎어 버릴 뻔했다.
“뀨. 주인놈아. 안심해라. 식인마녀 눈 뜨고 잔다.”
“그, 그래?”
“뀨. 그렇다. 햄찌가 몇 번이나 확인했다.”
“휴우.”
10년 감수할 뻔했네.
소름 돋게 눈은 왜 뜨고 자빠져 자는 거야!
무시무시한 식인귀 아니랄까 봐 자는 것도 소름 돋네.
“이런 건 미리 말해 줘야 할 거 아냐. 간 떨어질 뻔했잖아.”
“언제 물어봤냐. 뀨,”
“이런 걸 물어봐야 말해 주냐?”
“햄찌 시키는 대로 잘했는데 왜 갈구냐! 뀨!”
“됐다. 말을 말자, 말을.”
바랄 걸 바라야지.
이만큼 해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자.
“식인마녀는 제가 처리할 테니까 가서 주방장이나 처리하시죠.”
“알겠….”
“괜히 체포하려고 하지 말고.”
곽말풍에게 주의를 주었다.
이 눈치 없는 새끼가 또 사고 칠 것 같단 말씀이야.
“그냥 조용히 끝내세요.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렇게 하도록 하마.”
곽말풍이 뜨끔! 했는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럴 줄 알았지.
기습으로 안 끝내고 정정당당하게 한바탕하려고 했던 게 분명하다.
하여간 방심할 수 없다니까.
‘미혼약으로 흥했으면 미혼약으로 망해야지.’
인벤토리에서 명왕삭을 꺼내 들었다.
샤샤샥!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식인마녀를 꽁꽁 묶었다.
“……!”
놀란 식인마녀가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푹!
점혈법을 이용해 식인마녀의 아혈을 짚었다.
“……!”
벙어리가 된 식인마녀가 눈을 크게 뜨고 날 노려보았다.
근데 어쩔 건데?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렇게 꼬나보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냐고 ㅋㅋㅋㅋ
“내가 재밌게 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겠지.”
식인마녀의 귓가에 속삭여 줬다.
“산 채로…….”
와장창!
나무로 된 주방 벽면이 산산조각으로 박살 나면서 곽말풍과 금의위 위사들이 튕겨져 나왔다.
* * *
속이 터진다, 터져.
조용히 처리하라고 잔소리까지 했는데.
“야 이 병신들아!!! 잠들어 있는 놈 하나 골로 못 보내서 처맞냐!!!”
하도 어이가 없어 쌍욕이 튀어나온다.
내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참아???
“크헉!”
“쿨럭, 쿨럭쿨럭!”
“크으윽!”
얼마나 충격이 심했는지, 곽말풍과 금의위 위사들은 내 쌍욕에 대꾸조차 못 하고 괴로워했다.
쿵!
쿠웅!
이윽고 주방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다.
170센티미터 정도?
근데 몸무게는 120킬로그램은 가뿐히 넘어 보인다.
초고도비만은 맞는데, 몸이 울퉁불퉁한 걸 보니 단순한 비만은 아닌 것 같다.
굳이 표현하자면 근육 돼지?
무기는 주방장답게 중식도(中食刀)를 움켜쥐고 있었다.
뚝, 뚜욱.
피가 뚝뚝 흐르는.
“조용히 처리하라고 했잖아!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하냐! 이 멍청한 인간아!”
“그, 그게 아니라! 크윽!”
곽말풍이 힘겹게 대답했다.
“우리도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는데… 크윽!”
“곽 위사님한테는 조용히 처리하는 게 이겁니까? 예?”
“오, 오해다!”
“뭐가 오해야!!!”
“그게 그러니까….”
쿵!
쿠웅!
육중한 발소리가 들렸다.
으응?
고개를 돌려보니 주방장이 한 명 더 있었다.
“야 이 쥐새끼야! 둘이잖아!”
“뀨우?”
“하나라며! 식인마녀랑 주방장이랑 둘밖에 없다며! 정찰도 제대로 못 하냐!”
“캬아아악!”
햄찌가 털을 곤두세우며 으르렁거렸다.
“주방장이 쌍둥이인 걸 햄찌가 어떻게 아냐! 캬아아악!”
어?
“캬아악! 햄찌 노력했다! 주방장 둘인 줄 몰랐다! 캬아아악! 쌍둥이라서 헷갈린 거다! 캬아악!”
자세히 보니 먼저 등장한 주방장과 나중에 등장한 주방장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똑같이 생겼다.
이, 일란성 쌍둥이였구나.
하하하.
x팔.
아무래도 정찰하는 과정에서 햄찌와 주방장들의 동선이 교묘하게 엇갈려서, 둘인데 하나인 줄 착각했던 모양.
“감히 식재료들 주제에.”
“식재료들 주제에 감히.”
주방장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탕수육을 만들어 주마.”
“깐풍기로 만들어 주마.”
뒤이어 주방장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우릴 덮쳤다.
자, 잠깐 타임!!!
근데…… 탕수육은 돼지고기로 만드는 거고 깐풍기는 닭고기로 만드는 거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