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어르신, 괜찮으세요?”
“히, 히익?!”
천기자가 날 보자마자 기겁했다.
왜 이래?
무슨 귀신이라도 본 건가?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닐세.”
“평소에 지병이라도 있으세요?”
“그냥 늙어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말게.”
“평소에 건강관리 좀 하세요. 나이도 있으신데 소홀하시면 안 되죠.”
“조언 고맙네.”
뭐지?
어째 내 눈치를 슬슬 보는 거 같다.
나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어쨌든 정말 고맙네. 자네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자넨 내 생명의 은인일세.”
“별말씀을요.”
“하지만 내 충고 하나만 하겠네. 듣기에 좋은 소리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늙은이가 다 자넬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너무 싫어하진 말고.”
“하시죠.”
“자네가 가진 무공 말일세. 그… 흡성….”
“포식대법입니다만.”
자꾸 그런 허접쓰레기랑 비교하지 말라니까!
“그, 그래. 포식대법. 그 포식대법 말일세.”
“그게 왜요? 또 그거 가지고 트집 잡으려고 말 꺼내시는 겁니까?”
“그게 아닐세.”
천기자가 고개를 저었다.
“단지 자네가 걱정되어 하는 말일세.”
“뭘 걱정하시죠?”
“나는 자네 의견에 동의하네. 사용하는 무공이 포식대법이건 흡성대법이건 그건 중요치 않은 것이겠지. 자네 말마따나 사람이 중요하니 말일세.”
“알아들으셨으면 됐습니다.”
“하지만 말일세.”
천기자가 덧붙였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네.”
“어리석네요.”
“세상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지. 그러니까 부디 그 무공을 사용할 땐 조심하게.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아?”
“사람이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네. 그건 이 늙은이도 마찬가지일세.”
“그렇죠.”
“자네가 포식대법을 사용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흡성대법이라 오해할 걸세. 자네가 어떤 사람이든, 어떻게 포식대법을 사용하든. 그건 그들에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닐세. 특히 몇몇 이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선입견, 고정관념이란 게 그렇죠.”
“특히 자넬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그보다 더욱 좋은 구실은 없을 걸세. 그들에게 진실이 중요하겠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얘기 들어줘서 고맙네. 주제넘은 훈수를 둔 건 아닌지 모르겠구먼. 자네 같은 존재에게 조언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아닙니다.”
좋은 얘기해 주는데 싫어할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부디 남들 보는 앞에서 함부로 사용하지 말게. 지금의 자네는 본래 힘의 100분의 1도….”
“1억 분의 1 정도라고 해 두죠.”
“그, 그런가?”
“그럼요.”
사실 1억 분의 1이라는 것도 후하게 쳐준 거지만.
“그나저나 자네는 어찌하여 이 늙은이를 찾은 겐가?”
“아.”
“자네 같은 존재가 고작 점이나 관상을 보자고 이 늙은이를 찾았을 리는 없고?”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굴 찾고자 하는가?”
“이 세계에서 환생한 아끼는 부하 녀석을 찾고자 합니다.”
“허어!”
천기자가 혀를 내둘렀다.
“이 세계에서 환생한 자네의 부하를 찾겠다고?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을 쫓아 다른 세계까지 왔다고 말하는 겐가? 지금?”
“맞습니다.”
“도대체 어떠한 인연이기에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을 찾아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인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건…….”
천기자에게 카렐과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 * *
이야기가 끝나고 난 후.
“그런 고결한 희생이 있었구먼. 허허허.”
사연을 전해 들은 천기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그 카래루(佧來累)라는 청년을 찾아….”
“카렐이라니까요! 카렐!”
“그래! 카래루! 내가 카래루라고 하지 않았나!”
“카렐이라니까? 카! 렐!”
“카! 래! 루!”
“으아아아아아악!”
영감탱이 발음 때문에 미쳐 버리겠다.
참자, 참아.
“그러니까 카래루란 청년을 찾고 싶단 말이지?”
“예.”
“그럼 방법이 있긴 하네.”
“뭡니까? 그 방법이란 게?”
“알려 줄 수 없네.”
“예?”
“알려 줄 수 없다 말했네.”
“어. 음.”
순간 고민이 됐다.
‘때릴까?’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기껏 개고생 해 가면서 구해 놨더니 뭐가 어쩌고저째?
“거 주먹 내려놓게. 한 대 치겠구먼. 노인공경은 바라지도 않을 테니 부디 노인공격만은 자제해 주게.”
“에이, 설마요.”
들켰다.
하여간 눈치 빠른 놈들은 싫다니까.
“알려 주고 싶지만 맨입으로는 불가능하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설마 뭔가 해 달라는 겁니까?”
어이없다.
구해 줬는데 그깟 방법 하나 못 알려 줘?
양심이 있는 거야, 없는 ㄱ….
“양심 없는 늙은이라 생각하지 말게.”
“헉?”
어떻게 알았지?
“우주의 법칙이라는 것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법일세.”
“무슨 말씀이시죠?”
“우주의 법칙은 자네뿐 아니라 이 늙은이와 같이 남들은 보고 듣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거라네.”
뭔 말이야.
“자네에게 방법을 알려 주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세. 하지만 맨입으로 알려 줬다간 이 늙은이의 수명이 크게 깎일 걸세.”
“거 사실 만큼 사신 양반이 뭐 그리 욕심이 많….”
“죽을 순 없잖아!!!”
천기자가 빽! 소리쳤다.
“늙으면 죽어도 된다는 겐가!!!”
“그건 아니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심술 나서 그냥 한마디 해 본 겁니다.”
어르신들이 흔히들 늙으면 죽어야지, 하고 한탄하는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반어법이잖아, 그거.
“그냥 수명만 깎이면 다행인 줄 아는가? 예상치 못한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도 있는 걸세.”
“그럼 어떻게 하면 알려 주실 건데요?”
“공덕(功德)을 쌓아야 하네.”
“공덕이요?”
“앞서 말했다시피 자네에게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은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 과(過)를 저지르려면 미리 공(功)을 쌓아야 하는 법일세.”
띠링!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알림: <천기자의 공덕>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에라이.
또 연계 퀘스트다.
하여간 한 번에 가는 법이 없어요.
[천기자의 공덕]
내용 : 천기자가 카렐을 찾을 방법을 알려 줄 수 있도록, 그를 대신해 세 가지 공덕을 쌓아 보자.
분류 : 서사 퀘스트 / 연계
진행률 : 0% (0/3)
보상 : 천기자의 조언
제한시간 : 없음
조건 :
- 산적토벌 (0/100)
- 요괴퇴치 (0/1)
- 협객행동 (0/1)
참고 : 비록 심부름이지만 협의를 몸소 실천하는 임무이므로, 불평불만 하지 말고 좋은 마음으로 진행하도록 하자.
“그냥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그럼 나 죽는다니까!!!”
천기자가 빼엑!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귀청 떨어지겠네.
“거 죽는 거 엄청 무서워하시네.”
“이런 고얀 놈 같으니!”
“농담입니다.”
사실 반쯤 진담이다.
한 퀘스트에 세부 퀘스트가 3개.
딱 봐도 여기저기 왔다 갔다 개고생할 게 뻔히 보인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하겠는가?”
“해야죠.”
선택권이 없는데 어떻게 안 해?
[알림: <천기자의 공덕>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좋네. 자네가 공덕만 쌓아 주면, 내 두말하지 않고 군말 없이 방법을 알려 주도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나중에 딴소리하기만 해 봐라.
확 그냥….
“어허. 주먹 내려놓게.”
하여간 눈치는 오지게 빠른 영감탱이라니까?
* * *
일단 퀘스트를 받아 놓고 뒤처리를 시작했다.
“뀨! 주인놈아! 이것저것 많이 가져왔다! 뀨!”
“구! 구구구!”
햄찌와 꼬꼬가 객잔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던 각종 아이템들을 찾아서 가져다주었다.
어디 보자.
뭐 쓸 만한 거 있나.
객잔을 뒤져서 나온 아이템 목록은 다음과 같았다.
- 은자 7,631냥
- 마비산(麻痹散)
- 미혼약
- 산공독(散功毒)
- 더러운 앞치마
- 소림승의 염주
- 추혼비접(追魂飛蝶)
- 별주부의 감투
- 구미호 꼬리
- 초강력 특제 변비약
(중략)
- 대령숙수의 비법서
뭔가 쓸 만할 것 같은 아이템도 많고, 쓰레기처럼 보이는 잡동사니도 많았다.
일단 모조리 인벤토리에 쓸어 담았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왜?
혹시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 와중에 은자 7,631냥은 정말이지 꿀 같다.
달다, 달아.
이러다 당뇨 오는 거 아니냐고.
“룰루랄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역시 파밍은 즐겁다니까?
물론 여기서 파밍을 끝내기엔 섭섭하다.
땅콩… 수확해야겠지?
“딱 대.”
방천가위를 집어 들고 비돈·비저 형제의 바지를 벗겼다.
“자,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설마 자네….”
“오랑아! 아무리 환관이 되었다고 해도 그건 아니다!”
놀란 천기자와 곽말풍이 소리쳤다.
“그런 거 아니야! 이 미친 인간들아! 땅콩 없다고 그런 취향인 줄 아냐!”
하여간 생각하는 거 하고는.
근데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나 같아도 오해할 만하니까.
싹둑, 싹둑.
방천가위로 비돈·비저 형제의 땅콩을 수확했다.
[알림: 축하드립니다!]
[알림: 땅콩을 수확하셨습니다!]
[알림: 땅콩을 수확하셨습니다!]
축하할 것까진 없잖아….
[알림: 모든 스탯이 1 증가했습니다!]
[알림: 모든 스탯이 1 증가했습니다!]
[알림: 모든 스탯이 1 증가했습니다!]
[알림: 모든 스탯이 1 증가했습니다!]
상태창을 보니 땅콩수확자 칭호의 효과로 인해 모든 스탯이 4 오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더러운 꼴 봤는데 이 정도 대가는 받아야지.
나라고 이게 좋은 줄 알아?
다 강해진다니까 하는 거지.
“꾸웨에에에에에에엑!”
“뀌이이이이이이이익!”
땅콩을 수확당한 비돈·비저 형제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질러댔다.
“응, 시끄러.”
시끄러워서 놈들의 아혈을 짚어 찍! 소리도 못 내게 만들었다.
“아파하려면 닥치고 조용히 아파해라. 니들한테는 비명도 사치야. 그리고 너.”
식인마녀에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남자로 태어나든지, 아니면 땅콩 달고 와라. 알겠지.”
“……?”
“그래야 땅콩을 수확할 거 아냐. 팍 씨.”
물론 다음은 없겠지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눈치 없는 새… 아니 곽말풍이 내게 물었다.
“마저 응징하고 갈 길 가야죠.”
“음?”
“관아로 끌고 가기도 귀찮고. 그냥 여기서 처리하려고요.”
“그냥 나에게 넘기면….”
“안 됩니다.”
어림도 없지.
곽말풍이 여태 하는 짓을 보면, 놈들을 끌고 가다가 뭔가 실수를 해서 식인귀들을 놓칠 것 같다.
“아, 알겠다.”
곽말풍이 시무룩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하나도 안 불쌍하니까.
* * *
식인귀들을 커다란 숯가마에 처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악!”
“꾸웨에에에에에엑!”
“뀌이이이이이이익!”
숯가마 안쪽에서부터 처절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네. 헤헷.”
얼마나 좋았으면 아혈을 짚었는데도 비명을 지르겠어?
쾅쾅쾅쾅쾅쾅!
놈들이 안쪽에서 숯가마의 철문을 미친 듯 두들기며 몸부림을 쳐 댔다.
응~
안 열어 줘~
맘 같아선 몇 날 며칠이고 고문해서 피해자들의 고통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내 시간은 소중하니까.
놈들의 몸부림은 불과 몇 초를 가지 못했다.
하긴.
숯가마 안쪽 온도가 못해도 1,000도는 넘을 텐데, 오래 버티면 그게 더 이상하지.
“고생했네.”
천기자가 말을 걸어왔다.
“악인들에게 걸맞은 최후로구먼. 자네 덕분에 피해자들이 편히 쉴 수 있겠구먼.”
“글쎄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런다고 이미 죽은 사람들의 원통함이 달래질 거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뒤늦게 이런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가?”
“살아 있을 때 구해야죠. 그랬으면 더 좋았을 거잖습니까.”
“맞는 말일세.”
천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뀨! 주인놈아!”
햄찌가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뀨! 망자들이 주인놈한테 고마워한다! 뀨!”
“으응?”
“뀨! 봐라!”
어느새 부적을 꺼내든 햄찌가 수인을 맺으며 주문을 외웠다.
“급급여율령! 뀨!”
부적이 스스로 불타오르더니, 뒤이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