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철푸덕!
첨벙!
급하게 몸을 날렸더니 빗물 고인 웅덩이에 처박히고 말았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사람을 봤으면 속도를 줄여야 할 거 아냐!!!”
화가 나서 버럭 소리쳤다.
하마터면 치여 죽을 뻔했다고!
근데 말을 탄 놈들은 나를 신경도 안 쓰고 쌩! 하고 지나가 버렸다.
“이 새끼들아! 거기 안 서? 야! 니들 뺑소니야! 뺑소니! 관아에 뺑소니로 신고할 거라고오오오오!”
악에 받쳐 소리쳐 봤지만 놈들은 이미 저 멀리 사라져 버린 뒤였다.
“뀨! 주인놈아! 참아라!”
“참긴 뭘 참아!”
쒸익쒸익!
“치여 죽을 뻔했다고!”
“그럼 좋은 거 아니냐? 뀨?”
“뭐 인마?”
“주인놈 환생할 수도 있다! 뀨우!”
“그게 뭔 개소리야!”
“달려오는 이동수단에 치이면 낮은 확률로 환생할 수 있다! 뀨! 운 좋으면 회귀도 한다! 뀨! 다른 세계에 빙의할 수도 있다! 뀨우!”
“빙의는 이미 했잖아!!!”
환관예비후보생 연오랑이 된 거니까 빙의한 건 맞지.
“그리고 누가 그래! 이동수단에 치이면 그렇게 된다고!”
“뀨! 주인놈 몰랐냐?”
“모르긴 뭘 몰라?”
“소설 보면 그렇게 된다! 뀨! 환생트럭이나 회귀트럭 모르냐! 빙의트럭도 있다! 뀨!”
“그건 소설이잖아!!!”
어휴.
게이머들이 출판한 소설 몇 권 읽더니 이런다.
그런 소설가들이 몇 있다.
게임 속 NPC들을 대상으로 자기 소설을 팔아먹는 희한한 족속들.
게임을 할 거면 곱게 사냥이나 할 것이지, 왜 굳이 게임 속 세계에서까지 자기 소설을 출판하는 건데?
그렇게 안 팔려?
창작활동은 현실에서만 하란 말야!
‘그 양반 잘 있나?’
문득 옛날에 내 게임 인생을 소설로 출판했던 작가가 생각난다.
내 이야기 팔아서 나름 잘 먹고 잘사나 싶었는데, 소설 후반부에 가서 글이 무너지는 바람에 독자들의 원성을 샀다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요즘엔 집필 활동보단 무림 서버 플레이에 진심이라던데.
그 양반 캐릭명이 뭐였더라.
담화 뭐시기였는데.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뀨!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하고 넘어가라! 뀨우!”
햄찌가 손수건을 건네줬다.
“고맙다.”
급한 대로 햄찌가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흙탕물부터 닦아냈다.
킁킁!
근데 손수건에서 왜 이렇게 쉰내가 나지?
윽?
기름기도 있어?
“이거 뭐냐?”
“뀨! 객잔에서 주운 거다! 뀨우!”
“미친놈아 이거 행주잖아!!!”
그럼 그렇지.
네가 웬일로 손수건을 다 가지고 다니나 했다.
* * *
요새 앞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며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띠링!
눈앞에 현재 위치를 알리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호북성↔사천성 접경지대.
극기관(克己關).
극기관?
뭔가 기합이 잔뜩 들어가야 할 것만 같은 이름이다.
‘사람 엄청 많네.’
험준한 산속에 자리한 작은 요새인데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 NPC들뿐 아니라 게이머들까지 다양하다.
왜지?
왜 이런 자그마한 산속 요새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거야?
[알고 계셨나요?]
극기관은 호북성과 사천성을 잇는 운송로 중 하나로서, 물류의 운송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아.
그래서 이렇게 사람이 많았구나.
도움말을 보고 주변을 다시 둘러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수천 대에 달하는 수레.
그 수레들에 실린 각종 표물들.
그런 표물들을 나르는 쟁자수들.
그런 표물들과 쟁자수들을 보호하는 표사들까지.
표국에 소속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보표 구합니다!”
“실력 좋은 보표 모시겠소! 보수는 넉넉히 치를 터이니 망설이지 말고 오시오!”
“사천까지 함께할 보표 모시겠소!”
보표를 구한다는 NPC들의 머리 위에 황금색 느낌표가 떠올라 있었다.
[알고 계셨나요?]
보표란 표국에서 임시로 고용하는 호위무사로서, 정직원이 아닌 단기계약직 용병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 NPC들은 표물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용병을 구하는 중인 모양이다.
게이머들은 저 NPC들이 주는 퀘스트를 받고, 보표로 고용되어 표물을 보호하는 거겠지.
그에 따른 은자나 각종 아이템을 대가로 받을 테고.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밥이나 먹자.”
“뀨! 알겠다!”
극기관은 유동인구가 많아 각종 상점과 객잔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선 포목점에 들러 깔끔한 무복 한 벌을 사서 갈아입고, 가까운 객잔으로 가 허기를 달랬다.
이놈의 몸뚱이는 게임 캐릭터 주제에 심심하면 배가 고프고 난리람.
“촵촵촵!”
“쩝쩝쩝!”
“콕콕콕!”
주머니 사정도 넉넉하겠다, 이것저것 시켜서 한 상 잘 차려 먹었다.
“꺼억, 자알 먹었다.”
배를 두들기며 차를 한잔 마시는데.
띠링!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점소이에게 말을 걸어 정보를 획득하십시오!]
아, 맞다.
점소이가 있었지.
[알고 계셨나요?]
정보가 필요할 땐 점소이를 불러 대화를 나눠 보십시오!
점소이들은 객잔에서 일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워듣기 마련이라, 정보를 획득하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입니다!
점소이는 게이머들과 가장 많이 소통하는 NPC란다.
무림 서버 게이머들은 모르는 게 있으면 점소이들을 불러 정보를 획득한다나?
무림 서버 공식 마스코트로 ‘왕삼’이란 이름의 점소이를 내세울 정도니까 말 다 했지.
“저기요.”
점소이를 불렀다.
“예에, 나으리.”
점소이가 호다닥! 달려왔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요? 헤헤헤!”
“여기 돌아가는 얘기 좀 듣고 싶은데요.”
“헤헤헤! 그런 거라면 잘 부르셨습니다요!”
“요즘 어때요?”
“헤헤! 나으리!”
점소이가 해맑게 웃었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어떻습니까?”
“예, 나으리! 헤헤헤!”
“……!”
“얼마든지 말씀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요! 헤헤헤!”
뭐야.
왜 웃기만 하고 말을 안 해?
“뀨! 주인놈아!”
“응?”
“용돈을 챙겨 줘야 입을 열 거 아니냐! 뀨!”
아, 그런 거였어?
에라이.
공짜인 줄 알았더니.
“여기요.”
점소이에게 은자를 하나 건네줬다.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나으리! 잘 쓰겠습니다요!”
“그래서 요즘 여기 돌아가는 상황이 어때요?”
“예, 나으리. 상황이 썩 좋지 않습니다요.”
“왜?”
“산적들이 들끓는 바람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요.”
점소이가 이곳 극기관의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 * *
상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이곳 극기관에서부터 시작되는 길은 예로부터 호북성과 사천성을 잇는 중요한 운송로였는데, 최근 들어 산적들의 횡포가 점점 심해져 가는 중이란다.
참다못한 관아에서 관군을 동원해 토벌에 나섰는데, 산적들이 워낙 무공도 높고 신출귀몰해서 그마저도 실패하길 여러 번.
오죽했으면 표국들이 게이머들을 보표로 고용해서 전력을 강화하고, 일개 일꾼인 쟁자수들에게 갑옷까지 입히는 판국이란다.
“형 대인께서 산적 토벌에 힘쓰고 계십니다만, 영 시원치가 않습니다요.”
“그럼 다른 운송로를 이용하면 되지 않아요?”
“나으리,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십니다요.”
“으응?”
“사천으로 가는 길은 워낙 험해서, 육로로는 표물을 대량으로 운송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습니다요.”
“아하?”
하긴.
산적들이 기승을 부리면 다른 운송로를 이용하면 될 텐데, 위험을 무릅쓰고 꾸역꾸역 여길 고집하는 이유가 있겠지.
“그럼 산적들을 토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역시 나으리께서도 산적 토벌에 관심이 있으신 것입니까요?”
점소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예, 뭐. 그런 셈이죠.”
“그럼 형 대인을 한번 찾아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요, 나으리.”
“왜죠?”
“형 대인께서는 계속해서 산적 토벌에 힘쓰고 계십니다요. 매일같이 산적 토벌에 참가할 협객들을 모집하고 계시기도 합니다요.”
역시 점소이에게 물어보길 잘했다.
그러니까 형 대인한테 가면 퀘스트를 받을 수 있다, 이 말이잖아?
접수.
‘천기자 퀘스트만 깨면 섭섭하지. 후후후.’
퀘스트를 하나만 진행하는 건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초보 행동.
안 그래도 천기자가 준 퀘스트와는 별개로 산적 토벌 퀘스트를 주는 NPC가 따로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고마워요.”
“헤헤. 별말씀이십니다요. 언제든 찾아만 주십쇼, 나으리.”
“필요하면 그렇게 하죠. 수고하세요.”
점소이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형 대인을 찾아 관아로 향하던 중.
“어서 비켜!”
“길을 비키시오!”
“양해 부탁드리겠소! 환자 이송이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부상자들을 들것에 싣고 우르르! 코앞을 지나갔다.
“쯧쯧쯧.”
“이번엔 또 얼마나 죽고 얼마나 다쳤을꼬.”
“또 당한 모양이로구먼.”
상인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정황상 표물을 운송하던 중 산적들의 습격을 받아 부상자들이 발생한 거겠지.
저런 걸 보면 확실히 산적들이 기승을 부린다는 게 실감이 난다.
웅성웅성!
관아 앞은 게이머들로 인해 시끌시끌했다.
퀘스트를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저기 번호표를 나눠 주고 있는 NPC도 보이고.
우선 번호표부터 받았다.
‘하. 78번이네. 근데 다들 뭐 하는 거지.’
가까이 다가가 보니 게이머들이 시간을 때우느라 삼삼오오 모여서…… 고스톱을 즐기고 있었다.
“악! 쌌다!”
“푸하하! 싸셨네요! 싸셨어! 싸신 건 제가 자알~ 먹겠습니다!”
“저 피박인데. 하.”
아주 동양 세계관 기반이라고 그냥 막 나가겠다 이거지?
어?
중국이면 중국답게 마작 같은 걸 해!
뭔 고스톱이야!
화투는 원래 일본 거잖아!
“뀨! 주인놈아! 옛날 생각나지 않냐! 뀨!”
“으응?”
“옛날에 던전 앞에서 모험가들이랑 카드 게임 즐기고 그러지 않았냐! 뀨!”
그래, 그랬지.
판타지 서버에서는 던전 입장을 기다리거나 전쟁 중 전투가 소강상태를 맞으면 하드스톤이란 카드게임을 즐기며 시간을 때우곤 했지.
그때 참 재밌었는데…….
“뀨! 주인놈아! 우리도 고스톱이나 치고 놀자! 뀨우!”
“그럴까?”
그러자 구구가 끼어들었다.
“구! 구구구!”
넌 뭔데?
너도 고스톱 칠 줄 알아?
“꼬꼬 너도 할래?”
“구! 구구구!”
“할 수 있겠냐?”
“구! 구구! 구구구!”
구구가 자길 무시하지 말라는 듯 조금 성난 목소리로 지저귀었다.
“그래, 너도 하자.”
비둘기 주제에 패나 제대로 구별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 * *
형 대인을 기다리는 동안 햄찌와 꼬꼬를 데리고 고스톱을 쳤다, 쳤는데…….
“구!” (고!)
“구구!” (투고!)
“구구구!” (쓰리고!)
“구구!” (포고!)
“구구구구!” (파이브고!)
“구구구!” (식스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판돈을 다 잃은 뒤였다.
“뭐, 뭐야.”
점수를 계산해 보니 1124점이다.
“너… 정체가 뭐냐?”
“구륵?”
“솔직히 말해. 너, 비둘기 아니지.”
“구르륵?”
“너 비둘기 아니잖아! 이 자식아! 정체를 밝혀! 밝히라고!”
말이 돼?
뭔 비둘기 주제에 고스톱을 이렇게 잘 치는 게?
“뀨! 주인놈아! 가죽 벗겨 봐라! 안에서 사람 나올지도 모른다! 뀨!”
햄찌도 꼬꼬의 정체가 의심스러웠는지 강제로 깃털을 들출 기세였다.
“형 대인 납시오!”
꼬꼬를 추궁하는데 형 대인이 나타났다.
머리 위에 황금색 느낌표가 떠올라 있는 걸 보면 의심의 여지 없이 퀘스트를 주는 NPC다.
꼬꼬 이 자식.
운 좋은 줄 알아라.
“이렇게 찾아 주셔서 감사하오. 형 대인이라 하오. 우선, 산적 토벌을 도와주시려는 협객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소이다.”
형 대인이 포권을 취해 보이며 인사했다.
“그럼, 지금부터 먼저 온 순서대로 호명할 것이니, 번호가 불리거든 본관을 찾아와 주시길 바라오.”
에라이, 한참 기다려야겠네.
그래도 순서가 빨리빨리 지나간 덕분에 금방 차례가 돌아왔다.
“77번!”
어!
다음은 난데!
“77번 없으시오! 77번! 없으면 78번으로 넘어가겠….”
드디어 내 차례인가?
“77번 여기 있소!”
3남 1녀로 이루어진 무리가 뒤늦게 나타나 번호표를 흔들었다.
쳇.
몇 분 더 기다리지, 뭐.
근데 잠깐.
77번 무리가 어째 낯이 익었다.
‘분명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아.
생각났다.
‘그 뺑소니범들이잖아?’
다시 보니 아까 날 치고 지나갈 뻔했던 바로 그 새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