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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버프로 무림정복-55화 (55/115)

제55화.

500미터면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빨리 움직이기만 하면 반격이 아니라 오히려 선제공격도 충분히 가능한 시간이다.

“곽 표두님, 곽 표두님.”

곽 표두를 깨웠다.

검을 끌어안은 채 수레에 기대 새우잠을 자고 있는 걸 보면, 혹시나 모를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게 분명하다.

역시 이번 표행과 표물을 총책임지는 표두다운 자세랄까.

“연 소협…?”

곽 표두가 천천히 눈을 떴다.

“산적들의 습격입니다.”

“음?”

“산적들의 움직임을 감지했습니다. 거리는 대략 500미터고요.”

“그, 그게 정말이오?”

곽 표두의 눈이 커졌다.

“정말 산적들이 그 정도 거리까지 접근해 왔단 말이오?”

미터법으로 말했는데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이게 다 필터링 시스템 덕분이다.

게이머는 킬로미터나 킬로그램 등 익숙한 도량형을 사용해도 상관없다.

NPC들이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자신들의 도량형으로 이해하니까.

“산적들이 매복해 있는 우리 보표들의 뒤를 노리고 있습니다.”

“연 소협이 그걸 어찌 아시오?”

“제 동료가 주변을 탐지하는 술법을 부려 알아냈습니다.”

“알겠소.”

곽 표두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 당장 공격에 대비를….”

“아뇨.”

에이.

그럼 재미없지.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해야죠.”

“음?”

“뒤를 치죠.”

방어는 딱 질색이다.

“지금 산적들이 매복작전 중인 보표들의 뒤를 노리고 있으니까, 우리는 그 뒤를 노려야죠.”

“……!”

“적들의 숫자가….”

햄찌를 돌아보았다.

“몇이냐?”

“뀨! 50명 정도 된다!”

“굿.”

다시 곽 표두를 돌아보았다.

“보표 20명만 붙여주시죠. 제가 보표들을 데리고 가서 뒤를 치겠습니다.”

“가능하겠소?”

“충분히.”

“좋소. 연 소협에게 맡기겠소.”

곽 표두는 나를 믿어주고, 내게 보표들의 지휘권을 넘겨줬다.

“자자. 다들 일어나시죠. 일하러 갈 시간입니다. 퀘 깨야죠. 어서 일어나요.”

잠들어 있던 게이머들을 깨웠다.

“음?”

“조용한데요?”

퀘스트를 수행하느라 캡슐 안에서 새우잠을 자던 게이머들이 하나둘씩 깨어났다.

“다들 조용히 따라오세요. 지금부터 산적들 뒤를 칠 거니까.”

게이머들을 데리고 움직이는데 문제가 생겼다.

“어이쿠!”

철푸덕!

삐끗!

“뭐가 보여야 움직이지.”

“으윽. 산길 너무 어둡다.”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들어오자 달빛이 거의 안 들어서 그런지 다들 자빠지고 엎어지고 난리도 아니다.

레벨이 높은 게이머들이 아니라서 다들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

‘나도 잘 안 보이긴 하네.’

본캐 같았으면 어두운 밤에도 대낮처럼 훤히 보였을 텐데.

쩝.

이런 데서도 스펙 차이를 느끼네.

“뀨! 주인놈아! 햄찌가 도와준다! 뀨우!”

“응?”

“기다려 봐라! 뀨! 급급여율령! 뀨!”

햄찌가 부적을 꺼내 술법을 부렸다.

스으으.

그러자 나를 포함해서 파티원 전원의 눈이 은은한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알림: 야명주(夜明呪) 효과가 적용되었습니다!]

[알림: 남은 지속 시간 29분 59초!]

[알림: 29분 58초!]

[알림: 29분 57초!]

오?

보인다, 보여.

어두컴컴하던 시야가 밝아졌다.

“뀨! 주인놈아! 이제 잘 보이냐! 뀨!”

“어. 개쩔어. X나 잘 보여.”

너무 감탄스러워서 살짝 욕이 나왔다.

이 쥐새끼…… 어쩌면 쓸 만할지도?

* * *

햄찌가 야명주 술법을 써 준 덕분에, 어두운 산속을 빠르게 이동해서 우리 매복조를 습격하려는 산적들의 뒤를 잡을 수 있었다.

“크흐흐. 멍청한 놈들.”

“네놈들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봤자 우리 호걸들이 걸려들 것 같으냐.”

산적들은 우리 매복조를 비웃으며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흠.

산적들이 나누는 얘기를 엿듣다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어째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인데?’

운송 행렬이야 멀리서도 보이니 그렇다 치고.

우리 매복조가 숨어 있는 건 도대체 어떻게 안 걸까?

매복조 위치는 나도 몰랐는데?

‘가만,’

형 대인이 해 줬던 얘기가 뇌리를 스친다.

‘놈들이 워낙에 신출귀몰하고 지능적이라오.’

‘몸을 사리는 게 쥐새끼 저리 가라 할 수준이라, 감당 못 할 상대가 나타났나 싶으면 아예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오.’

‘고강한 무공을 가진 고수들을 데려다가 토벌을 시도해 봤지만, 번번이 허탕을 쳤소.’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내부에 쥐새끼가 있네.’

누군가 산적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누굴까.

그 쥐새끼가.

‘잡아내고 만다.’

물론 지금은 그게 우선이 아니지.

‘조용히 처리해야지.’

산적들의 뒤로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서, 은밀하게 슥삭 해 버리는 게 내 계획이었다.

굳이 싸울 거 있나.

“셋에 움직일게요.”

게이머들을 돌아보며 신호를 줬다.

“셋, ㄷ….”

셋을 세려는데.

움찔!

게이머 하나가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려다가 멈칫! 하는 바람에 그만 발을 헛디뎌 자빠지고 말았다.

철푸덕!

“……!”

“……!”

“……!”

매복조를 노리던 산적들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

“…….”

“…….”

산적들과 눈이 마주친 우리 파티원들이 ㅈ됐단 표정을 지었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저기요. 셋에 치신다면서요.”

한 게이머가 내게 따졌다.

“하나 둘 셋 하셔야지 셋 둘 하나를 하시려고 하면 어떡해요.”

“ㅈㅅㅈㅅ.”

아차차.

실수.

셋에 친다고 해 놓고 셋, 둘, 하나로 신호를 줘 버렸다.

본의 아니게 똥을 뿌려 버렸네.

헤헤.

“쳐라!”

한 산적이 소리쳤다.

“죽어라!”

“감히 이 어르신들의 뒤를 노리다니!”

“뭐 하는 놈들이냐!”

산적들이 우릴 향해 덤벼들었다.

“뒈져라! 이 산적 놈들아!”

“귀 내놔! 이 자식들아!”

“에라이! 죽여 버려!”

게이머들도 덤벼 오는 산적들과 맞서 싸우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게 아닌데.”

암살로 산적들의 전력을 깎아 먹고 조용히 끝내려고 했는데.

“뀨! 주인놈아! 뭐 하냐! 빨리 똥 치워라! 뀨!”

“으응?”

“똥 싸질렀으면 빤쓰 정도는 직접 빨아 입어야 하는 거 아니냐! 뀨!”

윽.

오래 살고 보니 햄찌 놈한테 갈굼 먹는 날이 다 오네.

“알겠어! 알겠다고!”

거 실수 한번 했다고 ㅈ나게 갈구네!

그래도 햄찌 말 하나 틀린 거 없다.

실수한 건 실수한 거니까.

“가자!”

“뀨! 가자!”

햄찌와 함께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 * *

내 실수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금방 끝났다.

비록 기습에는 실패했지만, 산적들에게 뒤를 잡혔던 우리 매복조들까지 합류해 준 덕분에 수적 우위를 가져갈 수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산적들을 샌드위치처럼 쌈 싸 먹어 버린 덕분이었다.

“어휴. 하마터면 작전 실패할 뻔했네.”

“뭐 저런 사람이 파티장이에요?”

“사람 여럿 죽일 인간이네. 어휴.”

따끔따끔!

전투가 끝나자마자 파티원들의 따끔한 시선이 내게 꽂혔다.

어, 어디 쥐구멍 없나?

뜨끈뜨끈!

창피해서 얼굴이 다 뜨겁다.

“그래도 이해해 주죠. 뉴비 같은데.”

“컨은 좋던데요?”

“피지컬은 좋은데 뇌지컬은 별로인 듯.”

윽.

그나마 위로랍시고 감싸 주는 사람들 말이 더 아프다.

나, 한태성인데…….

“어?”

한 게이머가 내가 처치한 산적들의 품속을 뒤지던 햄찌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님 펫….”

ㅈ됐다.

생각해 보니까 나 말고 정체를 숨겨야 할 사람이 더 있었다.

내가 유명한 만큼이나 햄찌도 엄청 유명한 캐릭터.

게이머들이 햄찌를 못 알아볼 리가 없…….

‘아, 안 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속보] 한태성 복귀!

[속보] 무림 서버로 복귀했지만 기량 저하 심각 (종합 2보)

[속보] 레전드 프로게이머 한태성 무림 서버 복귀해서 남성성 잃어 (긴급)

벌써부터 뉴스 속보의 헤드라인이 뇌리를 스쳤다.

안 돼!

그럼 나 죽어!

전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될 거라고!

“님 펫….”

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 두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한다.

“엄청 귀엽네요.”

“네?”

“다람쥐예요?”

뭔 소리야?

“술법람쥐인가? 진짜 개귀엽네요. 하. 나도 그런 펫 있었으면 좋겠다.”

게이머가 날 부러워하며 말했다.

“어디서 데려오셨어요?”

다른 게이머들도 햄찌를 둘러싸더니, 내게 부러움 가득 담긴 시선을 보냈다.

“진짜 귀엽긴 하네.”

“아까 보니까 스킬도 쩔던데. 이 정도면 최소 S급 펫 아닌가?”

“꺄. 귀여워! 얘도 람쥐썬더처럼 번개 부리고 막 그래요?”

“저런 펫은 어디서 구한 거지?”

“진짜 귀엽네.”

게이머들이 햄찌를 알아보기는커녕, 다람쥐라고 오해했다.

뭐지?

이 사람들 햄스터랑 다람쥐도 구분 못 하나?

“뀨. 주인놈아.”

햄찌가 내게 속삭였다.

“걱정 마라. 햄찌 술법 써서 모습 감췄다.”

“저, 정말?!”

“천인들 눈에 햄찌 다람쥐로 보일 거다. 뀨.”

다, 다행이다.

잊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정말 ㅈ될 뻔했다고.

“앞으로 천인들 앞에서는 햄찌 람쥐라고 불러라. 뀨.”

“휴! 십년감수했네!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냐?”

솔직히 좀 의외다.

워낙 생각 없이 사는 놈이라 애초에 기대도 안 했는데.

“뀨. 주인놈 적 많지 않냐.”

“으응?”

“주인놈한테 당한 놈들 이쪽 세계로 많이 넘어왔을 거 아니냐. 뀨.”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는 적이 많다.

그냥 많은 게 아니라, 정말 많다.

판타지 서버에서 활동하면서 수없이 많은 적들과 대립한 만큼 한태성 하면 이를 가는 게이머들이 어림잡아 수만 명은 가뿐히 넘는다.

그들 중 몇몇은 나 때문에 아예 게임을 접기도 했고, 무림 서버와 어반 서버가 열리자 기존 캐릭터를 삭제하고 판타지 서버를 떠나기도 했다.

즉, 이곳 무림 서버에 내게 복수하고 싶은 게이머들이 여럿 있을 거란 뜻이다.

문제는 그런 게이머들이 나보다 적게는 몇 달에서 많게는 3년 정도 무림 서버를 오래 플레이했을 거라는 것.

그만큼 레벨도 높겠지.

만약 내 정체가 알려진다면, 그놈들은 무조건 복수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날 쫓아다닐 게 분명하다.

왜?

놈들이 내게 복수하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일 테니까.

“그러니까 주인놈 안심해라. 뀨.”

“정말 고맙다, 인마.”

가만 보면 은근히 속이 깊다니까?

“쟤네 어떻게 하죠?”

우리 파티원 중 하나가 살아남은 산적 세 명을 가리키며 물었다.

뭉클!

코끝이 시큰거린다.

흑.

그래도 파티장이랍시고 대우는 해 주네.

“일단 끌고 가서…….”

심문하겠다고 말하려던 찰나.

“으악!”

“컥!”

붙잡힌 산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황급히 다가가 보니 한 게이머가 죽은 산적들의 귀를 자르고 있었다.

“저기요.”

“네?”

“뭐 하세요?”

“네? 뭐가요?”

산적들을 처치한 게이머가 대답했다.

“아니.”

어이없네.

“다 죽이면 어떡해요? 전투 중에 죽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생포한 애들은 살려 가야 심문을 하든지 말든지 하죠.”

“아. 죄송.”

산적들을 죽여 버린 게이머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사과했다.

“얘네한테 하도 당한 게 많아서요. 나도 모르게 죽여 버렸네. 하하하. 담부턴 주의할게요. 죄송죄송.”

이 새끼 뭐야?

그냥 화풀이였다고?

“아까 보니까 컨 장난 아니시던데요? 무빙 지리시던데.”

“예, 뭐.”

보는 눈은 있네.

내가 무빙이 좀 쩔긴 하지.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뭘요?”

“산적들 위치요. 님 아니었으면 저희 이번에도 기습당해서 전멸당했을걸요.”

“아, 그거요.”

대답해 주려는데.

‘뭐지?’

뭔가 느낌이 쎄하다.

이 새끼.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웃고 있긴 한데.

“그냥 정찰 나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라 별건 아니에요.”

“아, 정말요? 운이 좋았네요. 어쨌든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별말씀을요.”

“어떻게 그렇게 컨이 좋으세요? 나중에 막 프로게이머 하시는 거 아니에요?”

“에이, 설마요.”

어째 말 돌리려고 일부러 칭찬하면서 띄워 주려는 것 같단 느낌이 든다.

‘뭐 하는 놈이야?’

혹시나 싶어 심안으로 놈을 들여다보았다.

[개념통닭]

분류 : 천인 (게이머)

종족 : 인간

성별 : 남

나이 : 26

레벨 : 101

직업 : 권법가

등급 : 이류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소속 : 맹호채

칭호 : 녹림도 / 더러운 배신자 / 비열한 배신자 / 돈(에) 미(친) 새(끼)

소속이 맹호채라는 것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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