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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버프로 무림정복-57화 (57/115)

제57화.

보물창고를 턴다는 건 내 인생에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돈벌이 수단이자 놀이 중 하나였다.

난 판타지 서버를 플레이할 당시부터 보물창고를 터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나는 누군가 꽁꽁 숨겨 놓은 보물창고를 귀신같이 찾아내곤 했고,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부를 이뤘다.

운이 좋을 때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아이템을 손에 넣을 때도 있었다.

하앍!

숨겨진 보물창고를 탈탈 털 때의 기쁨이란…….

짜릿짜릿!

벌써부터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그 쾌감을 기억하고 반응하는 기분이다.

그 맛에 보물창고 터는 걸 못 끊지.

‘분명 어딘가에 재물을 쌓아 놓은 곳이 있을 텐데. 미리 알아내야 돼. 그래야 내가 챙기지. 후후후.’

산적 토벌?

좋다.

근데, 산적들이 쌓아 놓은 그 막대한 양의 재물까지 관군들에게 넘겨줄 생각은 단 1도 없다.

인벤토리 용량 때문에 다 챙기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가치 있는 알짜배기 몇 개 정도는 미리 챙길 생각이었다.

어떻게?

혼란을 틈타서.

관군들이 들이닥치면 다들 싸우느라 정신없을 테니까, 그 틈을 타서 보물을 챙길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보물창고의 위치부터 알아내는 게 필수.

‘에라이. 약재 창고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계속해서 보물창고를 찾았다.

이 건물 저 건물 들쑤시며 보물창고를 찾아봤지만, 딱히 이렇다 할 장소를 찾아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아무래도 두목이 있는 곳 근처에 있으려나?’

저 멀리 나름 잘 꾸며진 전각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 게 보인다.

딱 봐도 두목이 생활할 것 같은 건물이긴 하네.

‘밤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기어 들어가야지.’

두목이 생활하는 장소이니만큼 보안이 철저하긴 할 거다.

관군들이 쳐들어올 확률보다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킬 확률이 더 높을 테니까.

‘일단 전각 근처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기를 기다리자.’

그런 생각으로 커다란 건물을 지나는데.

“어이! 거기!”

헉.

ㅈ됐다.

나름 살금살금 눈에 안 띄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밥때 다 됐는데 뭘 그렇게 꾸물거리고 있어!”

“예…?”

돌아서 보니 커다란 국자를 든 산적 하나가 성난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취사 지원 온 주제에 어딜 농땡이를 피워!”

취, 취사 지원?

“밥때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빨리 와서 야채나 썰란 말이야!”

“아, 예!”

모르긴 몰라도 정체가 들키진 않은 게 확실해서,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닥닥닥닥닥닥.

서걱, 서걱.

날 불러 세운 산적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커다란 취사장이 나타났다.

“빨리빨리 움직여!”

“거기! 빨리 쌀 좀 씻으라니까!”

“오늘 취사 지원 온 놈들은 왜 이렇게 굼뜬 거야!”

취사장 안에서는 취사병, 아니 취사를 담당하는 산적들이 평범한 산적들을 마구 갈구며 이런저런 잡일을 시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백 명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다 보니 밥도 다 같이 지어 먹나 보다.

<오늘의 점심>

산채비빔밥

마라탕

붕어튀김

마파두부

야채 절임

아니, 무슨 중국 산적들이 산채비빔밥을 먹어…….

“어이! 빨리 썰어!”

“아, 예!”

졸지에 산적들 취사장에서 야채 썰게 생겼네.

하.

보물창고 찾으러 가야 하는데.

* * *

한편, 극기관에서는…….

“물건 조심조심 옮기게! 아주 값비싼 도자기들이니!”

“다들 서두르도록! 이번 표행은 주어진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걸 명심해!”

“어이! 거기! 빨리 와서 표물부터 묶어!”

북풍표국은 지난번 운송 중단을 만회하겠다는 듯 역대급 규모의 운송 행렬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번 운송은 재고해 주시는 게 어떻겠소이까? 이런 규모라면 너무 위험하오.”

“대인,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정해진 기일 안에 표물을 운송해 내질 못하면 북풍표국의 위상이 추락할 것입니다.”

“하나 고작 그 정도 병력으로 어찌 산적들을 감당하려 하시오? 지금은 우리 관군들도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인데.”

“저희는 괜찮습니다. 표물 운송은 저희 북풍표국의 일이니, 알아서 하겠습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인.”

형 대인이 나서서 말려 보았으나, 북풍표국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표국의 위상이 추락할 대로 추락해서, 더는 운송을 지체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큰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운송을 성공해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구려. 따로 천인들을 뽑아 지원하겠소.”

“대인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 소식은 곧장 개념통닭 일당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미친. 이번에 표물 규모 역대급이네요. 다들 규모 보셨어요? 평소의 10배는 되는 거 같은데요?”

개념통닭이 동료 게이머들을 향해 말했다.

“이번에 한몫 단단히 잡겠는데요?”

“와 씨. 돈이 얼마야.”

“미쳤다. 이번 건만 잘 해결되면 여기 졸업해도 될 듯?”

이번 북풍표국의 운송 행렬이 워낙에 역대급이라서, 개념통닭 일당은 벌써부터 싱글벙글이었다.

맹호채는 강탈한 표물의 가치에 따라 개념통닭 일당에게 일정 비율로 보수를 지급했다.

즉, 강탈한 표물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개념통닭 일당의 이익이 늘어나는 구조였던 것이다.

“일단 보고부터 할게요.”

개념통닭은 즉시 전서구를 보내 북풍표국이 역대급 규모의 표물을 운송할 예정이라는 걸 알렸다.

“다들 이번에 한몫 단단히 잡으면 뭐 하실 생각이세요?”

개념통닭이 동료 게이머들에게 물었다.

“저는 템 맞춰야죠.”

“전에 봐 둔 비급이 있는데, 그거 사려고요. 그게 좀 비싸서요. 후후.”

“저는 돈 모을 만큼 모은 거 같아서 이번 건만 잘 마무리되면 렙업하러 가려고요.”

게이머들이 일확천금을 거머쥘 생각에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건 개념통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이번 건만 잘 마무리되면 이 지긋지긋한 첩자 노릇도 끝이다.’

개념통닭의 목표는 강력한 무공을 배우는 것.

무림 서버는 시스템상 스킬이 거저 생기는 구조가 아니었다.

이런저런 퀘스트를 통해 자신만의 스킬을 만들어 나가거나, 혹은 기존에 있는 무공을 NPC들에게 배우거나 스킬북에 해당하는 비급을 통해 익혀야 했다.

문제는 자신만의 무공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다는 것.

그래서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NPC들의 제자가 되거나, 혹은 돈으로 비급을 사서 무공을 익히곤 했다.

‘니들은 쓰레기 무공이나 돈 주고 배워라. 난 진짜 강한 무공을 배울 테니까.’

개념통닭은 내심 동료 게이머들을 비웃었다.

사실 개념통닭은 맹호채의 우두머리와 따로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

맹호채의 우두머리는 강력한 무공을 가진 NPC로서, 개념통닭이 첩자 활동을 통해 충성심과 능력을 증명해 보인다면 제자로 삼아줄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이번 운송 행렬이 역대급이니까. 이번 건만 잘 해결하면 맹호채주도 딴소리 못 하겠지.’

개념통닭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형 대인을 찾아갔다.

늘 그렇듯 형 대인이 주는 퀘스트를 받고 운송 행렬에 잠입해서 산적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 * *

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

아.

지루해.

“하암.”

너무 지루해서 하품이 다 나온다.

왼손으로 규화보전을 들여다보면서 오른손으로는 대강 야채를 썰었다.

[알림: 야채 썰기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알림: 각종 야채를 다듬어 숙련도를 올려 보세요!]

[알림: 요리에 입문하셨습니다!]

[알림: 여러 가지 요리 관련 기술을 습득해 중화요리에 도전해 보십시오!]

그 와중에 숙련도 오르는 거 보소?

‘여기서 이게 잘못됐구나.’

한참 규화보전의 비급을 들여다보며 수정할 포인트를 찾는데.

“어이! 거기!”

“예?”

“야채나 썰라고 했더니 감히 농땡이를 피워?”

“제가요?”

“그럼 네놈이지 누구냐!”

성난 취사병…… 이 아니라.

진덕팔이란 산적이 성큼성큼 걸어와 시비를 걸었다.

“감히 취사 지원을 와서 춘화집이나 보고 있다니!”

춘화집?

[알고 계셨나요?]

무림 서버에서는 야한 그림을 춘화도, 야한 그림을 수록해 놓은 책을 춘화집이라 부른답니다!

아.

숨어서 성인 잡지나 보는 줄 알았구만?

에라이!

내가 너냐?

“이거 그림책 아니라 그냥 책인데요.”

“뭐, 뭐라? 책을 본다고?!”

덕팔이가 흠칫 놀랐다.

왜 놀라고 그러는 건데…….

“거, 거짓말 마라! 설마 글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냐!”

놀란 이유가 그거 때문이었냐.

하긴.

산적들 중에 까막눈이 많긴 하겠지.

“제가 소싯적에 서당에 잠깐 다닌 적이 있어서요. 하하하.”

“그, 그게 정말이냐?”

“보세요.”

규화보전의 비급을 보여 줬다.

“책 맞죠?

“음. 그렇군.”

“빌려드릴 테니까 읽어 보실래요?”

“나, 난 괜찮다!”

뒷걸음질 치는 거 보소.

너…… 까막눈이구나?

“내용 괜찮은데. 엄청 야해요, 이거.”

“나, 나는 글보다는 그림이 좋다!”

맞네, 까막눈.

“그건 그렇고! 야채를 썰라고 했지 책이나 읽고 있으라고는 안 했을 텐데!”

“다 썰었는데요?”

썰어 놓은 야채를 보여 줬다.

“헉!”

왜 또 놀라?

“저, 정말로 네놈이 썬 것이냐?”

“그럼 제가 썰었지 누가 썰었겠습니까? 제 짬밥에 누구한테 떠넘길 수도 없고.”

“믿을 수 없다!”

“보여 드려요?”

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탁…….

“헉!”

“됐죠?”

“어떻게 그렇게 야채를 잘 썰 수 있는 것이냐? 예전에 요리를 배운 적이 있었느냐?”

내가 봐도 잘 썰긴 했네.

앞으로 대충썰기라고 불러야겠다.

“처음인데요?”

“그, 그게 정말이냐?”

“네.”

“네놈… 어쩌면 요리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뜬금없이 뭔 소리야…….

야채 잘 써는 거랑 요리랑 무슨 상관이 있어…….

“그, 그건 좀. 저는 도적질이 더 적성에 맞아서요. 하하. 하하하.”

“아쉽군. 우리 취사장의 맛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 줄 인재를 발견한 줄 알았는데.”

“…….”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취사장에 지원해라. 내 너를 팍팍 밀어주마.”

이걸 고마워해야 돼 말아야 돼…….

“어쨌든. 야채를 다 썰었으니 죄수들에게 밥을 가져다주고 오도록.”

“네?”

“감히 우리 맹호채를 토벌하겠다고 날뛰던 그 애송이들 말이다.”

어?

설마 걔네 말하는 건가?

의창사ㅈ?

* * *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긴. 여기 잡혀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하룻강아지 네 마리가 겁도 없이 산적들을 토벌하겠다고 나섰으니, 그런 꼴을 안 당하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지.

그래도 안 죽었네.

‘돈 많은 집 자제들이라 안 죽였겠지.’

이 더러운 세상.

무전유죄 유전무죄.

아니, 이 경우엔 무전사망(無錢死亡) 유전생존(由錢生存)이라고 해야 하나?

“어디로 가면 되죠?”

“네놈은 인질들을 가둬 놓은 곳도 모르냐?”

“제가 신참이라… 죄송합니다.”

“하긴. 모를 수도 있겠지. 우리 산채는 다른 곳에 비해서 규모도 크고 형제들도 많으니까.”

그런 데서 자부심 드러내지 마!

범죄자 집단 주제에!

“놈들을 가둬 놓은 건물은 돼지우리 바로 옆에 있으니까 찾기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감사합니다. 헤헤헤.”

“그럼, 다녀오도록.”

덕팔이가 친절하게 가르쳐줘서 어렵지 않게 감옥을 찾을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의창사ㅈ인가 뭐시긴가 하는 그 애송이들이 의기소침한 표정과 자세로 갇혀 있었다.

아이고, 고소해라.

그래도 니들은 운 좋은 줄 알아야 돼.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란다, 얘들아.

“얘들아 밥 왔어.”

배식을 준비하는데.

“감히 그딴 쓰레기 같은 음식을 우리더러 먹으라는 것이냐!”

한 놈이 벌떡 일어나 내게 따지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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