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버프로 무림정복-71화 (71/115)

제71화.

“스펙타클!”

“그러니까 수패타굴했다고?”

“아니이! 스! 펙! 타! 클!”

“누가 뭐랬나? 수! 패! 타! 굴!”

“스펙타클이라고!”

“그래! 수패타굴!”

“스펙타클!!!”

“수패타굴!!!”

“스펙타크으으으으으으을!!!”

“수패타구우우우우우우울!!!”

으으.

앓느니 죽지, 죽어.

영감님 발음 때문에 미치고 환장하겠네.

물론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도 있겠지.

문제는 내 성격상 나도 그냥은 못 넘어간다는 거고.

너무 답답해서 혀를 콱! 깨물고 꽥!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다.

하아.

이래서 신경 안 쓰려고 했던 건데…….

신경 쓰면 지는 거였는데…….

결국 져 버렸네.

도대체 이 영감님한테 몇 번이나 진 거야?

이쯤 되면 연패 아닌가?

“에잉! 나이도 젊은 놈이 귀가 그리 어두워서야!”

뭐, 뭐라고요?

부글부글…!!!

속이 끓는다.

근데, 여기서 더 따지고 들었다간 영감님이랑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 같아서 꾹 참기로 했다.

여긴 기숙사 형식으로 된 어학원 같은 건 없나?

어떻게 입원(?)이라도 시켜서 강제로라도 발음교정 해 버리고 싶은데.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세.”

“그, 그러죠.”

울화통이 터지는 걸 애써 억누르고 영감님을 따라 서문세가 안으로 들어갔다.

“흥! 스펙타클은 무슨! 제깟 놈이 스펙타클해 봤자 뭐 얼마나 스펙타클 했겠소!”

불쑥 끼어든 당괴괴 영감이 또 시비를…….

어?

“영감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네놈 같이 싸가지 없는 놈이 스펙타클해봤자 뭐 얼마나 스펙타클 했겠냐고 했다!”

“스펙타클?”

“그래! 스펙타클!”

헉!

“새파랗게 어린놈이 벌써부터 귓구멍이 막혔느냐? 스펙타클이라고 했다! 네놈들이 가끔 쓰는 표현 아니더냐! 늙었다고 그런 신조어 하나 모를 것 같으냐!”

“오오오!”

“네놈은 추혼비접을 어디서 얻었는지 해명이나 해야 할 것이다! 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터이니!”

주웠다니까…….

귓구멍 막힌 건 본인이면서 나한테 그러시네…….

근데, 신기하게도 화가 안 난다.

천기자 영감님한테 고통받다가 제대로 된 발음을 들어서 그런가?

당괴괴 영감의 깔끔한 발음에 귀가 다 정화되는 거 같다.

천기자 영감님에 비하면 선녀로 보일 지경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이 노친네…… 꽤 괜찮은 영감일지도?

* * *

자리를 옮긴 뒤 영감님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우선 오해부터 풀고 봤다.

“그, 그랬나?”

천기자 영감님한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당괴괴 영감님이 삐질 진땀을 흘렸다.

객잔에서 식인마녀 일당을 만났던 것부터 해서, 어떻게 해서 추혼비접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나는 저놈이 우리 당문의 혈족을 해하고 빼앗거나 훔친 줄 알았소.”

“버르장머리가 없긴 해도 그럴 사람은 아닐세. 오해 풀게.”

듣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아까부터 주웠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네놈이 언제 그랬느냐!”

“계속 그랬죠! 계속! 쭉!”

“노부는 들은 바 없다!”

“으아아아아악!”

답답해 미쳐 버리겠네.

으으으.

“그렇구먼. 아무래도 방계 혈족 중 하나가 거기서 변을 당한 모양이로군. 사실 추혼비접은 본가의 독문병기이기는 하나, 직계 혈족들은 그리 선호하지 않는 암기요.”

“나도 그리 생각했네.”

“방계라 한들 당가의 혈족은 혈족. 본가에 서신을 넣어 최근 실종당한 이가 있는지 알아보고, 늦게나마 장례라도 치를 수 있게 해야겠소.”

“암, 그래야지.”

“이 싸가지 없는 놈아.”

당괴괴 영감이 날 불렀다.

“노부가 오해했다. 미안하다.”

“싸가지이~?”

“네놈이 싸가지 없고 버르장머리 없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 아니더냐? 노부가 오해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한다만, 먼저 손을 쓴 것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사과할 생각이 없다!”

“강제로라도 사과하게 만들어 드립니까?”

“이놈이?”

“진짜 죽만 드시다 골로 가고 싶으세요?”

“그래! 이놈아! 쳐 봐라! 쳐 봐! 이 노인공경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놈! 네놈은 노인을 공경하기는커녕 공격밖에 할 줄 모르느냐!”

또 뚜껑 열리네?

꽈악!

주먹이 운다, 울어.

“됐고. 이제부터 저 노친네랑은 얘기 안 하렵니다. 말이 통해야 얘길 하지. 사람이 나이를 먹었으면 곱게 늙어야 되는데.”

“뭬야!”

발끈한 당괴괴 영감이 내게 달려들려고 하자 천기자 영감님이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

“허! 사람 참! 참게! 참아!”

“놓으시오! 내 오늘 저놈 버르장머리를 아주 단단히 고쳐 놓을 터이니!”

“참으라니까! 자네도 그만하게!”

천기자 영감님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불붙었던 시비가 겨우 사그라졌다.

“그나저나 자네.”

천기자 영감님이 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이차저차하고 여차저차해서 됐습니다.”

맹호채 토벌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역시 자네라면 해낼 줄 알았네. 암, 그래야지. 자네 정도 되는 사람한테 그게 뭐 어려웠겠는가.”

헤헤.

그래도 내 진가를 알아봐 주는 사람의 칭찬이라 그런지 기분이 좋다.

“그나저나 절 여기로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한 가엾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네.”

“가엾은 생명이라면…….”

“현재 서문세가 가주의 장녀인 서문란이란 아이가 중병에 걸린 상태인데, 그 아이를 치료하는 데 자네가 도움을 주웠으면 하네.”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그러니까…….”

천기자가 날 서문세가로 부른 이유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 * *

천기자 영감님의 말에 따르면, 서문세가는 비록 오대세가(五大世家)에 들지는 못해도 무림세가로서 나름 역사도 깊고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해 낸 유서 깊은 명문가란다.

[알고 계셨나요?]

오대세가란 무림에서 큰 세력과 명성, 그리고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다섯 개의 명문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대에 따라 오대세가의 구성원들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답니다!

당대 오대세가는 남궁세가, 사천당문, 구양세가, 하북팽가, 그리고 제갈세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1군까지는 아니고 2군쯤 된다는 거네.

오케이.

확인.

“서문세가의 현 가주 서문범은 가주로서 이곳 고장현에서 협의를 몸소 실천하는 훌륭한 인물이라네. 역대 서문세가의 가주들 중에서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천기자 영감님이 말하길, 서문세가는 고장현의 터줏대감이자 명문가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해 귀감이 되는 곳이란다.

도적떼가 들끓으면 누구보다 앞장서 토벌에 나서고.

흉년과 기근이 들면 곳간을 아낌없이 풀고.

힘없는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관아와 협조해서 그 억울함을 풀어주고.

대대로 이곳 고장현에서 협의를 실천해 온 훌륭한 가문이라나?

‘얼씨구. 그렇게 훌륭하시다는 양반이 자식 교육은 왜 개판인 거지? 애새끼 꼬라지가 볼만하던데.’

뭐.

호부견자란 말도 있긴 하니까.

자식 교육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

나중에 우리 애기도 저러면 어떡하지…….

“문제는 이런 훌륭한 협객의 딸아이가 구양절맥(九陽絶脈)이라는 천형을 타고났다는 것일세.”

구양절맥은 뭐야?

이건 모르겠다.

[알고 계셨나요?]

구양절맥이란 선천적으로 지나치게 강한 양기를 타고난 체질과 그로 인해 생기는 난치병을 뜻합니다!

구양절맥인 사람은 어마어마한 괴력을 타고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양기가 지나치게 강해져 스무 살을 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게 된답니다!

참고 : 자매품으로 구음절맥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아아.

구음절맥의 반대 버전이구나.

기억난다.

무협소설에서 음기가 강하면 구음절맥이라고 했던 거.

이 경우엔 양기가 강한 케이스니까 구양절맥인 거고.

“자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구양절맥을 치료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네. 란이 그 아이가 올해로 약관일세. 내일이면 생일을 불과 보름 앞으로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네.”

“아.”

“허나 병세가 깊어질 대로 깊어져 스무 번째 생일을 채 맞기도 전에 요절하게 생겼다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지.”

“그러네요.”

“하늘도 무심하지. 그간 서문세가가 행해 온 협행을 떠올려 보면,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을…….”

천기자가 씁쓸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자네를 부른 것일세. 서문세가는 이곳 고장현에서 오랜 세월 선행과 협행을 베풀어 온 가문이고, 가주인 서문범 역시 협객 중의 협객일세.”

“계속 말씀하시죠.”

“그런 서문세가의 장녀를 구해낸다면, 한 번쯤 우주의 법칙을 거슬러도 괜찮지 않겠나? 그만큼의 공덕이 쌓이는 것이니.”

“으음. 그러네요.”

듣고 보니 그럴싸한 이야기라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자네라면 란이 그 아이를 도울 방법을 알고 있을 것도 같군. 물론 몰라도 상관없네. 실낱같은 희망으로 마침 구양절맥을 치료할 수 있는 약재를 찾은 듯하니.”

“오?”

“사실 이 친구도 그 아이의 병세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기 위해 부른 것이라네.”

천기자가 잠자코 듣고 있던 당괴괴를 가리켰다.

“이 친구가 성질머리는 불같아도 의술 하나는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일세.”

“암! 그렇고말고!”

“가히 청성파의 의선(醫仙)에 버금가는…….”

“뭐요?!”

당괴괴가 버럭 성질을 냈다.

“형님 방금 뭐라 하셨소? 의선에 버금가는? 그럼 이 당괴괴가 의선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보다 못하다는 말이오? 지금?”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오! 방금 버금간다고 하지 않았소!”

“일단 진정 좀 하게! 그런 뜻이 아닐세!”

“그럼 뭐요? 뭔 얼어 죽을 깊은 뜻이 있어서 말을 그따위로 하시오?”

“자네랑 의선은 전문분야가 다르지 않은가! 자네는…….”

“뭐가 다르오! 뭐가! 내가 뭐든 의선 그 영감탱이보다 뛰어나오! 내가 어딜 봐서 싸구려 단약이나 만들어 파는 약장수 따위에 버금간다는 말이오! 어딜 봐서!”

어휴.

어질어질하네.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 싶어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났다.

“야, 햄찌야.”

“뀨?”

“잠깐 나가 있자. 시끄러워 죽겠네.”

“뀨! 알겠다!”

영감들 일은 영감들끼리 해결하라고 내버려 둬야지.

당괴괴 저 영감탱이 꼬장 부리는 거 옆에서 한 5분만 더 듣고 있다가는 귀에서 피 나겠다, 피 나겠어.

* * *

잠깐 밖으로 나와 처마 밑 마루에 걸터앉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게 슬슬 겨울이 시작하려는 모양.

푸드덕!

배가 고팠는지, 꼬꼬가 저 멀리 감나무로 날아가 아직 남아 있는 감을 콕콕 쪼아 먹었다.

저걸 까치밥이라고 하던가?

“구! 구구구!”

“깍깍! 깍깍!”

꼬꼬가 까치들을 위협해 쫓아내는 게 보였다.

거 성질머리하고는.

좀 나눠 먹으면 어디 덧나냐?

그리고 그거 까치밥이야.

비둘기 밥 아니라고.

사락, 사라락.

햄찌는 내 옆에 걸터앉아 태평요술서를 들여다봤다.

얼씨구.

안경은 또 어디서 구했대?

그럼 난 뭐 하지…….

‘규화보전 비급이나 볼까?’

괜히 집중했다가 영감들이 부르면 짜증 날 것 같아 그만뒀다.

파르르!

부는 바람에 단풍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게 보였다.

‘심심하니까 낙엽이나 맞추고 놀아야지.’

주변에 있던 작은 돌멩이들을 주워다가 옆에 쌓아 놓고, 흩날리는 낙엽들을 맞추며 시간을 때웠다.

근데 서문세가의 가주는 뭐 하는데 코빼기도 안 비춰?

손님이 왔으면 집주인이 나와서 접객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거, 이거.

딸내미 구해 주러 온 사람한테 대접이 박하네.

협객이라는 것도 뻥 아냐?

* * *

급한 볼일이 있어 출타했었던 서문세가의 가주 서문범.

그는 세가로 돌아오자마자 천기자가 초대한 손님들이 왔단 보고를 받고 즉시 별채로 향했다.

‘이런. 손님들이 불쾌해하실지도 모르는 일이거늘. 어찌 이런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단 말인가.’

별채로 향하는 서문범은 애간장이 끓어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천기자가 초대한 이들은 매우 중요한 손님들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인 서문란의 구양절맥을 치료하기 위해 초빙한 손님들인 만큼, 그들을 대함에 있어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할 터였다.

그런데 가주인 서문범이 그들을 기다리게 만든 꼴이 되어 버렸으니,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범은 다급한 마음에 경공술까지 사용해 전속력으로 내달렸고, 별채에 도착하자마자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쒜엑! 쒜에에엑!

웬 청년이 떨어지는 단풍잎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고 있었다.

서문범은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가, 돌멩이의 궤적을 보고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

돌멩이가 떨어지는 단풍잎들을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었다.

심지어, 한 번에 두 개에서 세 개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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