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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버프로 무림정복-75화 (75/115)

제75화.

막상 가 보니 딱히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서 금창약을!”

“끄으윽!”

“빨리 옮겨!”

“크으으으으윽!”

안개를 뚫고 부상자들의 신음이 들린다.

들려오는 소리를 보아하니 이미 싸움이 끝나고 사망자들과 부상자들을 수습하는 단계인 것 같다.

안개 때문에 뭐가 보여야지…….

좀 더 발걸음을 옮겨 보니 그나마 안개가 옅은 지역이 나오고, 시야가 좀 트였다.

“연 소협.”

서문범이 다가와 포권을 취해 보였다.

“이런 일이 휘말리게 해서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오.”

“아닙니다.”

뭘 죄송하기까지야.

“근데 무슨 일이죠?”

“나도 모르겠소.”

“예?”

“정말로 모르겠소.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란이를 내놓으라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소.”

그때.

“서문가 놈들아! 당장 서문란 그 아이를 내놓으란 말이다! 그리하면 곱게 물러나 줄 터이니!”

저 멀리서 남화요선 노친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네놈들이 며칠이나 버틸 것 같으냐! 멸문지화의 화를 입기 싫거든 어서 서문란 그 계집애를 내놓으란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곧 발화해서 죽을 사람을 왜 내놓으란 거야?

“근데 저건 뭐죠?”

주변을 둘러보니 뭔가 이상하다.

저어어어어 멀리 백련교 놈들이 마치 굼벵이처럼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무슨 슬로우모션도 아니고.

“쟤들 왜 저렇게 움직이는 겁니까?”

“천리투명진(千里透明陣)을 발동했기에 그런 거요.”

“천리투명진?”

“비상사태 발생 시 본가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보호 장치요. 본가의 대문 앞에서 안채까지의 거리를 천 리로 늘려 주는 진법이라오.”

오?

고작 몇십 미터를 400킬로미터로 늘려 준다고?

“적들이 안채까지 당도하는 시간을 지체시켜 준다오. 천리투명진을 발동하면 며칠 정도는 시간을 벌 수가 있소.”

“그렇긴 하겠네요.”

400킬로미터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탈것과 식량 없이 쳐들어온 거라면, 꼼짝없이 400킬로미터를 행군해야 하는 거잖아?

어우.

그냥 행군도 힘든데 천리행군이라니.

“공격은 가능합니까? 저렇게 제자리걸음 중인데?”

“불가능하오.”

서문범이 고개를 저었다.

“천리투명진은 거리를 늘리고, 적들의 동향을 살필 수만 있소. 우리 쪽에서 먼저 공격을 하면 진법이 깨지게 되오.”

“아.”

공격 기능은 1도 없는 방어용 진법이라는 뜻이네.

그래서 천리투명진이구나.

기왕이면 설치할 때 공격 기능도 좀 추가했으면 얼마나 좋아?

설마 그것도 옵션인가?

예산 부족으로 못 넣은 거 아냐?

“이럴 줄 알았으면 10년 전에 진법을 보수할 때 예산을 조금 더 투자했어야 했던 것을…….”

서문범이 탄식했다.

진짜 옵션이었냐…….

서비스로 뭐라도 좀 넣어 달라 그러지…….

“아쉽지만 그냥 버티면 되지 않을까요? 관군들이 들이닥칠 텐데?”

“아마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오.”

“왜죠?”

“짙게 깔린 안개를 보아하니 백련교의 무리들도 미세면지진(微細麵地陣)을 사용해 자신들의 기척을 숨긴 게 분명하오.”

미세면지?

미세먼지가 아니라?

“사실 관아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요. 이런 일을 벌였는데 관아라고 무사하겠소이까.”

“그럼 어떻게 하죠?”

“짧게는 사흘에서 길게는 열흘까지도 버텨 볼 수 있을 것 같으니, 전서구들을 날려 지원을 요청해야겠소. 적들이 너무 많소. 본가의 전력으로는 감당이 불가능하오.”

“그렇게 하시죠.”

그래도 다행이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는 버텨 볼 만하니까.

푸드덕!

푸드더덕!

이윽고 전서구 스무 마리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전서구들이라면 천리투명진과 미세면지진을 뚫고 소식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오.”

“고생이 많으시네요. 따님께서 위독하신 와중에도 이런 험한 꼴을 당하시고.”

“이겨낼 것이오.”

오?

“나는 무인이고, 한 가문의 수장이며, 두 아이의 아버지요. 어떠한 위기가 닥쳐 온다 한들 이겨낼 것이오. 좋은 날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소.”

캬.

이게 정파 무림인이지.

눈빛에서부터 꺾이지 않는 의지가 느껴진다.

천기자 영감님이 서문세가를 괜히 칭찬한 게 아니었…….

후드득!

퍽!

“악!”

뭔가가 내 정수리 위로 뚝 떨어졌다.

“뭐, 뭐야!”

퍽!

이번엔 얼굴에 맞았다.

“으아악! 뭔데!”

도대체 뭐가 떨어지는…… 비둘기???

후득!

후드득!

조금 전 날려 보냈던 전서구들이 무슨 비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툭, 툭, 툭, 툭, 툭, 툭, 툭, 툭, 툭, 툭, 툭, 툭, 툭, 툭…… 툭.

전서구들은 추락하기도 전에 이미 숨이 다한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 힘없이 추락하지도 않았을 테고.

“깔깔깔깔깔!”

그때, 남화요선 노친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자욱한 안개 때문에 남화요선 그 빌어먹을 노친네가 어디 있는지도 안 보였다.

다만 저 하늘 위에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

“이 어리석은 서문가 놈들아! 소용없다! 백날 전서구를 날려보아라! 이 남화요선이 네놈들이 지원요청을 하게끔 놔둘 줄 알았느냐! 깔깔깔깔깔!”

아무래도 추락한 전서구들은 공중에서 남화요선에게 요격당한 모양이었다.

“곱게 서문란 그 계집애를 내놓지 못할까! 버텨 봐야 소용없다! 서문란 그 계집애만 내놓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천리투명진으로 얼마나 버틸 것 같으냐! 깔깔깔깔깔!”

남화요선의 목소리를 듣는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 개 같은 영감탱이가.”

전서구들의 죽음을 보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아니, 매우 불쾌하고 화가 났다.

동물학대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전시상황.

내 눈에 비친 전서구들은 작전 수행 도중 전사한 아군들로 보였다.

“뀨우…….”

햄찌가 전서구들의 시체를 조심스레 주워들어 품에 안았다.

“구, 구구구.”

꼬꼬 역시 구슬프게 지저귀며 동족들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것도 잠시.

“캬아아악! 언젠가 가만 안 둘 거다! 캬아아악!”

“구구구!”

햄찌와 꼬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분노를 토해냈다.

우리가 분노하는 사이.

“상공!”

“아버지이이이이이!”

단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 여인이 자해공갈범 꼬맹이를 데리고 다가왔다.

“어디 다치진 않으셨어요?”

“나는 괜찮소.”

“다행이에요. 헌데, 어찌 된 일인가요? 왜 백련교의 무리들이 우리 란이를 내놓으라는 거죠?”

“나도 모르겠소. 무언가 사악한 의도가 있지 않겠소이까.”

“란이를 절대 내어줄 수 없어요. 어찌 그 아픈 아이를…….”

“내 뜻도 그대와 같소. 부인, 일단 진정하시오.”

서문범이 아내, 그러니까 서문세가의 안주인을 달랬다.

“아버지이이! 흑흑흑!”

자해공갈범은 어지간히도 겁을 먹었는지 아주 눈물범벅이었다.

새끼…….

제발 이번 기회에 인생이 실전이라는 걸 좀 깨달았으면 좋겠네.

니네 누나 지금 아파…….

오늘내일한다고…….

“이보게.”

천기자 영감님이 나타나 서문범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없을 것 같네. 당괴괴 녀석의 말에 따르면 최대한 버텨 봐야 일주일이 한계일 것 같다고 하는구먼. 그 안에 그것을 구해 와야 할 것 같네.”

“일주일 말씀이십니까? 허나 일주일 안에 그것을 구해 오기란…….”

서문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니, 뭔 비밀 얘기를 하기에 자기들끼리만 속닥거리는 거야…….

사람 소외감 느끼게.

“뭔 얘기길래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숨기고들 그러세요?”

“그게 말일세.”

천기자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사실 란이의 구양절맥을 치료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았다네.”

“혹시 영약 같은 건가요?”

“바로 맞췄네.”

천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으로 가면 천자산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그곳 깊은 곳에 구양절맥을 치료할 영약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네.”

“아.”

“문제는 늦어도 1주일 안에는 그 영약을 구해 와야 한다는 것일세.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쉽지 않겠지만 말일세.”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간다.

지금은 백련교도들에게 포위된 상황.

지원군을 요청하러 날아올랐던 전서구들마저 모조리 요격당해 전사한 마당에, 세가 바깥으로 나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테지.

“큰일이로구먼. 당장 백련교도 놈들에게 포위되었으니 빠져나갈 구석도 없을 터인데.”

띠링!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알림: <협객행동>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알림: <요괴퇴치>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퀘스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협객행동]

내용 : 천자산으로 가서 서문란의 치료제 역할을 할 영약을 구해 서문세가로 돌아오자.

타입 : 서사 / 하위 / 연계

진행률 : 0% (0/1)

제한시간 : 168시간 (변동 가능)

보상 : 해당 없음

주의 1 : 퀘스트의 명칭을 잊지 마십시오!

주의 2 : 서두르십시오! 제한시간 안에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합니다!

제한시간이야 그렇다 치고.

주의사항이 뭐 저래?

퀘스트의 명칭을 기억하라니.

[요괴퇴치]

내용 : 천자산에 서식하는 요괴들을 때려잡자.

타입 : 서사 / 하위 / 연계

진행률 : 0% (0/1)

보상 : 해당 없음

참고 : 협객행동 퀘스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클리어될 것이므로,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그냥 협객행동 퀘스트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거네.

문제는…….

“어떻게 영약을 구해 올 순 없겠나?”

“나갈 방법이 있어야 구해 오죠.”

“방법이 없겠나?”

“없습니다.”

안 되는 걸 된다고 허세 부리고 싶진 않다.

내가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

포위망을 어떻게 뚫고 나가?

개구멍이라도 하나 있으면 몰라도.

* * *

답답한 상황이다.

꼼짝없이 갇혀서 발만 동동 굴러야 하다니.

시간은 없고.

영약은 구해 와야 하고.

지원 요청도 해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천릿길을 행군해 온 백련교도들이 들이닥칠 텐데…….

그땐 진짜 다 같이 말라 죽게 생겼다.

서문란도 폭주해서 발화해 버릴 테고.

“아버지…… 누나 아파요? 폐관수련에 든 거 아니었어요?”

자해공갈범 녀석은 이제야 상황을 눈치챘는지 아버지 서문범의 품에 안겨 울먹였다.

“그간 숨겨서 미안하구나.”

“흑흑. 흑흑흑.”

“누이는 괜찮을 것이다. 그러니 뚝 그치거라.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하는 것이다.”

“하, 하지만…… 하지만…….”

“아무 걱정 말거라. 이 아비가 있질 않으냐.”

다들 발만 동동 구르는 동안 혹시 포위망을 뚫고 세가 밖으로 나갈 방법이 있는지 찾아봤다.

“뀨! 주인놈아! 쥐구멍 하나 없다!”

“내가 봐도 없어.”

무림세가라 그런지 시설물 관리가 잘 되어 있어서, 그 흔한 개구멍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구! 구구구!”

답답했는지, 꼬꼬가 나섰다.

“뭐? 네가 가겠다고?”

“구륵!”

“안 돼. 너무 위험해.”

“구! 구구구!”

“그래도 안 돼! 너도 네 친구들 꼴 난다고!”

꼬꼬가 임무에 자원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위험하다 못해 자살행위에 가까운 작전에 꼬꼬를 밀어 넣을 순 없었다.

절대로.

“큰일이로구먼! 큰일이야! 누구 하나라도 세가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천기자 영감님이 탄식했다.

“그래야 지원군도 부르고 란이를 치료할 영약도 구해 올 수 있을 터인데! 시간은 없고 백련교의 무리들은 가까우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던 그때.

“제, 제가…… 나갈게요.”

누군가 나서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

“……!”

“……!”

그리고 모두가 놀랐다.

‘엥?’

나도 좀 놀랐다.

아니, 많이 놀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제가 나가서 도와줄 사람들을 불러올게요.”

자해공갈범.

서문민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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