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네가?
어떻게?
진법과 포위망을 뚫고 나가겠다고?
그게 가능…….
‘어?’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쟤 귀신같이 몰래 빠져나간다고 했었지?’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하긴 했다.
서문세가의 둘째 아들 정도 되면 유모는 물론 늘 호위무사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기 마련.
그런 이들을 따돌리고 세가 밖을 혼자 돌아다니면서 사고를 치고 다녔다고?
미꾸라지도 이 정도면 보통 미꾸라지는 아니다.
“민아! 그게 무슨 말이냐!”
“어떻게 네가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이냐?”
사람들이 한마디씩을 던졌다.
나름 용기가 가상하긴 하지만, 그저 코흘리개의 치기 어린 만용 정도로 여긴 거겠지.
‘아냐. 뭔가 있어. 개구멍이라도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아.’
나름 근거 있는 나섬이라고 생각해서, 서문민 녀석에게 다가가 물었다.
“야, 꼬맹이.”
“네?”
태도 공손해진 거 보소.
상황 파악은 한다 이거지?
“너, 아는 개구멍 있지.”
“네.”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통하는 길을 알아요.”
역시.
고작 일곱 살 난 코흘리개 주제에 무슨 수로 유모와 호위무사들을 다 따돌리고 밖으로 나돌았겠어.
비밀통로를 아니까 거길 이용해서 나간 거겠지.
“민아, 정말이니? 정말로 밖으로 나가는 길을 아니?”
“네, 어머니.”
녀석이 어머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 방 마루 밑에 비밀통로가 있어요.”
“그게 정말이니?”
“네. 거짓말하지 않아요.”
녀석 덕분에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녀석이 아는 비밀통로를 통해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이 최악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시발점이 마련되는 셈이었으니까.
“비밀통로가 어디야? 안내해.”
“네, 형.”
눈치는 있는지 이젠 형이라고 부른다.
‘그래도 나름 용기가 있는 녀석이네. 이렇게 나선 걸 보면.’
이 녀석…… 사고뭉치지만 어쩌면 괜찮은 녀석일지도?
녀석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가 바닥에 깔린 융단을 걷어 보니 마룻바닥에 이음새가 보였다.
드르륵.
바닥을 슥 밀자 비밀통로가 드러났다.
크기는 크지 않았다.
어른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밖엔 안 됐다.
물론 녀석한테는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을 테지만.
“여기로 가면 되냐?”
“네, 형.”
“어디로 통해?”
“강 씨 포목점 뒷마당 마루 밑이요.”
“강 씨 포목점?”
그게 어디야?
아.
안내 책자가 있었지.
거봐!
다 쓸 데가 있다니까?
스윽.
품속에서 고장현 안내 책자를 꺼내 녀석이 말한 강 씨 포목점을 찾아보았다.
거리는 대략 1킬로미터 정도.
오케이.
확인.
“제가 가죠.”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나가서 지원을 요청한 다음에 천자산으로 가서 영약을 구해 오겠습니다.”
“혼자서 괜찮겠소?”
서문범이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천마산에는 지금 요괴들이 득실거린다오. 연 소협 혼자서는 어림도 없고. 본인을 포함한 우리 세가의 정예들이 총출동한다 해도 영약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장담하지 못할 정도요.”
“혼자 가야죠.”
“하지만…….”
“제가 영약을 구해 오는 동안 백련교 놈들이 천리투명진을 뚫고 들어오면 어떡합니까? 가주님은 자리를 지키셔야죠. 다른 분들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자리를 지켜주시고요.”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놈들이 원하는 건 따님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구양절맥에 걸린 사람을 내놓으라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반드시 따님을 지켜내셔야 합니다. 절대 백련도 놈들에게 넘어가게 해선 안 됩니다.”
“그것은 걱정 마시오.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고, 빼앗기지도 않을 것이니.”
“그러니까 여기 계셔야죠. 따님을 세가 밖으로 옮길 수도 없으니까요.”
서문란의 상태를 생각해 보면, 세가 밖으로 대피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
미쳐 날뛰는 괴물을 무슨 수로 밖으로 옮겨…….
“정말 괜찮겠나?”
천기자 영감님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무리 자네라도 지금 상태로는 버거울 터인데? 걱정되는구먼.”
“버거워 봤자죠.”
걱정은 나중에.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
혹은 아직 부딪쳐 보지도 않은 일.
미리부터 걱정하고 무서워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그딴 것들은 내 스스로를 주저하게 만들 뿐이다.
상황이 닥치면 그때 가서 걱정하고 무서워해도 안 늦는다.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과 쓸데없이 근심·걱정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연 소협.”
서문범이 배낭 하나를 내밀었다.
“받으시오. 필요한 장비가 들어 있소. 영약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안내할 지도도 들어 있다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전서구 남아 있는 애들 있으면 몇 마리만 주시죠.”
“잠시만 기다리시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서문범이 전서구 다섯 마리가 든 새장을 가져와 건넸다.
오케이.
준비 끝.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가자, 얘들아.”
“뀨! 알겠다!”
“구! 구구구!”
햄찌와 꼬꼬를 데리고 비밀통로로 진입했다.
“오랑이 녀석아! 부디 몸조심해서 잘 다녀오너라! 네 녀석만 믿고 있겠다!”
“연 소협! 부디 별 탈 없이 잘 다녀오시오! 기다리고 있겠소!”
“혀엉! 다녀와요!”
등 뒤에서 천기자, 서문범, 서문민의 응원의 목소리가 들려와 귓가를 파고들었다.
* * *
비밀통로를 따라 쭉 걷다 보니 정말로 강 씨 포목점의 뒷마당 마루 밑…….
퍽!
으갸갹!
머리 찍었다.
“뀨. 주인놈 바보냐.”
“……닥쳐.”
마루 밑에서 기어 나와 뒷마당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밖으로 나와 보니 달빛 한 점 없는 야심한 밤이다.
스윽.
슬쩍 새장을 열어 보니 전서구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구구구.”
꼬꼬 놈도 꾸벅꾸벅 조는 걸 보니 지금 당장은 전서구들을 못 날릴 거 같다.
얘들은 밤 10시만 되면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귀신같이 곯아 떨어진다.
지들이 무슨 대한민국 군인도 아니고.
날 밝으면 그때 날려봐야겠다.
“너도 그냥 들어가 자.”
“……구구구.”
꾸벅꾸벅 조는 꼬꼬 녀석을 품속에 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뀨. 주인놈아. 이제 어떡할 거냐.”
“일단 관아 쪽으로 움직여 보자. 그쪽은 어떤가.”
“뀨. 알겠다.”
고장현 안내 책자를 보고 관아로 가는데.
‘너무 어두워.’
달빛 한 점 없는 날이라 그런지 시야가 캄캄하다.
밤이라 그런지 유동인구도 거의 없었다.
도시 전체가 잠든 느낌이라고나 할까?
“야, 햄찌야. 시야 좀.”
“뀨! 알겠다! 급급여율령! 뀨!”
햄찌가 야명주 술법을 걸어 준 덕분에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대낮처럼 훤히 보면서 움직일 수 있었다.
‘지나치게 고요해.’
관아 근처로 가 보니 기이한 느낌이 들어 몸을 숨겼다.
“햄찌야. 탐지해 봐.”
“뀨! 알겠다! 급급여율령! 뀨!”
햄찌가 두 귀를 쫑긋거리며 주변을 탐지했다.
“뀨! 주인놈아! 관아에 진법 펼쳐졌다! 뀨! 관아도 공격받은 모양이다! 뀨!”
“역시.”
예감이 맞았다.
서문세가쯤 되는 무림세가를 공격하는데 관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겠지.
“지금부터 조용히 움직여야 돼. 고장현 전체에 백련교도들이 쫙 깔렸을 거다.”
“뀨우?”
“오가는 사람 마주치면 안 돼. 차라리 잘됐어. 눈에 안 띄게 움직이기엔 밤이 더 낫지.”
“뀨! 알겠다! 햄찌도 조심조심 움직인다! 뀨우!”
고장현 안내 책자를 보고, 일부러 인적이 드물 것 같은 길만 이용했다.
사람과 마주칠 것 같으면 미리 몸을 숨기고, 숨죽인 채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맞네. 쫙 깔렸네.’
어둠 속에 숨어서 심안을 사용해 보니 마주치는 사람의 대부분이 정체를 숨긴 백련교도들이었다.
‘잡아서 심문해 볼까?’
고민된다.
‘아냐. 어차피 잔챙이들이 알아봐야 뭘 알겠어. 괜히 소란 일으켜서 내가 빠져나온 사실이 알려지면 그게 더 손해야. 정보는 나중에 캐도 돼.’
미련을 버리고 고장현을 빠져나가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고장현을 빠져나오기까지 거의 2시간이 넘게 걸렸다.
백련교도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움직이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
30분이면 될 거린데…….
“휴. 겨우 빠져나왔네.”
“뀨! 주인놈아! 고생했다!”
“고생은 무슨.”
“뀨! 이제 어떡하냐! 바로 천자산으로 가냐!”
“그래야지.”
“뀨! 타라!”
햄찌를 타고 천자산으로 향했다.
근데…… 서문란을 치료할 영약이 뭐야?
정작 그걸 못 들은 거 같은데?
* * *
잠을 줄여 가면서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천자산.
“뭐, 뭐야.”
저 멀리 보이는 천자산의 풍경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깎아지는 듯한 절벽들.
그리고 마치 검처럼 하늘 높이 날카롭게 솟아오른 바위들.
천자산은 그런 지형에 자리해 있어서, 멀리서 봐도 도저히 접근할 엄두가 안 나게 생긴 곳이었다.
잠깐.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어째 풍경이 묘하게 낯이 익은데……?
나 여기 와 본 적 있나……?
“아!”
생각해 보니 와 본 적이 있었다.
게임에서?
아니, 현실에서.
맞아, 그랬지.
한 3년 전쯤이었나?
중국 모 프로게임단의 초청을 받아 후난성, 그러니까 한국말로 호남성에서 팬미팅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남는 시간에 장가계 관광이랍시고 여길 구경했었지…….
당시 찍었던 사진들 중 하나도 거실에 있고…….
[알고 계셨나요?]
천자산 한국에서 관광지로도 유명한 장가계(장자제)에 속한 산 중 하나입니다!
장가계는 무릉도원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될 정도로 수려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곳으로서, 현대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중략)
나도 알아!
여기 와 봤어!
하여간 쓸데없이 교육적이라니까?
“일단 천자산 근처까지 가 보자.”
“뀨! 알겠다!”
험난한 지형을 뚫고 어찌어찌 천자산 산기슭에 도착해 보니 웬 자그마한 시골 마을이 하나 나왔는데.
“뭐, 뭐야.”
어째 생각했던 것과는 영 딴판이다.
웅성웅성!
시끌시끌!
오십 가구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마을에 족히 수백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득실대고 있었다.
뭐, 뭔데?
천마산 기슭.
장가촌(張家村).
장가촌?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알고 계셨나요?]
현재 이 지역은 요괴들을 토벌하려는 게이머들로 인해 인기 사냥터가 되었습니다!
그, 그런 거였냐.
[알고 계셨나요?]
몰려든 게이머들은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킨 핵심 원동력으로서, 장가촌 주민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 주는 주 수입원이 되었습니다!
하여간 게이머 놈들이란.
몬스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강해질 수만 있다면 양잿물도 들이켜는 게 게이머들이 가진 본성.
아무리 험난한 지형이라 한들 무시무시한 요괴들이 득실거리는 한 게이머들의 발길이 끊길 리 없겠지.
물론 나 역시 그렇고.
“쌉니다! 싸요! 금창약이 싸요!”
“천인분들! 탕약 사 가세요!”
“장비 수리하오! 검이든 도든 뭐든 좋소!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여기 있소이다!”
NPC들이 오가는 게이머들을 상대로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는 게 보인다.
“술법가 구해요! 술법가 한 분! 빨리 오세요!”
“30분 있다가 출발하실 컨 좋은 무인 모십니다!”
“템 좋은 무인 있습니다! 빠른 클리어 가능하신 파티 초대 부탁드려요!”
“신생 문파 정무문에서 권법가 모십니다! 권법가만 오세요!”
“버스 받으실 분! 싸게 해 드려요!”
게이머들이 파티·문파 구인구직 및 버스기사 영업을 하는 광경이 보였다.
씨익-
오래간만에 보는 풍경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나온다.
물론 극기관에도 나름 게이머들이 많긴 했다.
하지만 극기관은 그 특성상 NPC들에게서 이런저런 퀘스트를 받아 수행하는 곳이라서, 게이머들의 움직임이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가촌의 풍경은 달랐다.
게이머들이 적극적으로 자기들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걸 보니, 진짜 사냥터 앞에 온 기분이다.
“뀨우? 주인놈아! 옛날 생각나냐! 뀨!”
햄찌 녀석이 귀신같이 내 생각을 읽어내곤 물었다.
“어. 옛날 생각 ㅈ나 나.”
그래, 나도 게이머들이랑 같이 파티 사냥하던 시절이 있었지…….
그때 참 재밌었는데…….
아차차.
이럴 때가 아니다.
‘빨리 움직이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제한시간 안에 영약을 구해 서문세가로 돌아가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