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버프로 무림정복-77화 (77/115)

제77화.

일단 정보부터.

배낭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등산에 필요한 용품들과 천자산 지도, 그리고 서문범의 일지가 들어 있었다.

어디 보자…….

‘정상은 아니고.’

서문범은 영약이 천자산 중턱 즈음에 자리한 귀막골이란 곳에 있다고 추정하고 있었다.

귀막골은 음기가 강해 늘 안개가 끼어 있고, 온도가 매우 낮으며, 습도는 높으며…….

(중략)

밖에서 보았을 때 최소 1성급 이상 요괴들이 득실거리는 것으로 추정되며, 매우 위험한 곳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략)

조사 결과 귀막골 안에는 강한 음기를 지닌 영물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판단된다.

여러 가지 자료들과 근거들을 바탕으로, 서문범은 귀막골에 구양절맥을 치료할 수 있는 영약이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영물을 잡아서 내단(內丹)을 꺼내 오면 된다는 거지?

‘판타지 서버랑 똑같네.’

강한 몬스터를 사냥하고, 그 몬스터가 체내에 지니고 있던 에너지의 결정체를 꺼내 흡수하는 건 판타지 서버에서도 흔한 일이다.

옛날 생각나네.

나도 예전에 여러 마리 잡아먹었었는데.

천자산의 지형은 매우 고되고 험난하므로, 체력보존을 위해 일정 높이까지는 전문 가마꾼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오?

꿀팁까지?

귀막골까지 가는 길에는 요괴들이 득실거리니, 근처까지는 천인들과 함께 이동하는 게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이다.

문득 천기자 영감님과 서문범이 나누던 대화 내용이 뇌리를 스친다.

‘그건 그렇고. 그래, 갔던 일은 잘되었는가?’

‘예, 어르신.’

‘어르신의 예상이 옳았습니다. 그곳에 그것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오호라!’

‘희망이 보입니다! 어르신!’

‘하나 그것을 얻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을 걸세.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일세.’

서문범은 미리 귀막골 앞까지 가서 사전조사를 했던 모양이다.

전력이 부족한 것 같다는 판단하에 세가로 복귀하기로 했다.

돌파를 강행할 수도 있었겠지만, 란이를 살리기 위해 함께 온 가신들과 문도들의 목숨까지 내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들 역시 누군가의 지아비이고, 아비이고, 아들이 아니던가.

내 딸만 살리고자 사지로 몰아넣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아비이기도 하나, 동시에 서문가의 가주이니.

전력을 보강한 후에 다시 오는 것이 옳다.

그래서 돌아왔던 거구나…….

‘진짜 괜찮은 사람이잖아?’

일지를 읽어 보니 서문범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지 느껴졌다.

자기 딸 생사가 오락가락하는데 사전답사를 왔던 가신들과 문도들부터 생각하다니.

확실히 인물은 인물이네.

천기자 영감님이 괜히 도와주려는 게 아니었구나?

세가에서부터 괜찮은 사람 같다고 느끼긴 했지만.

천인들을 고용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쉽사리 믿음이 가지 않아 의뢰를 포기하였다.

그들은 강해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 양상을 보이기로 유명하니, 영물을 사냥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돌변할지 예측이 가지 않았다.

암, 그럴 만도 하지.

나도 게이머지만, 게이머들은 못 믿지.

게이머들은 기본적으로 탐욕스러운 존재.

아마 내단을 보고 눈이 뒤집어질걸?

십중팔구 쟁탈전이 벌어지겠지.

확실히, 이런 건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의뢰를 맡기는 것보다 믿을 만한 사람들과 직접 처리하는 게 맞다.

그게 게이머건 NPC건 간에.

‘일단 가마를 타고 이동한 다음에, 게이머들이랑 파티를 맺고 귀막골 근처까지 갔다가. 귀막골부터는 솔플을 하는 게 좋겠네.’

서문범의 일지 덕분에 손쉽게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혼자 될까?’

귀막골은 서문범 일행도 포기하고 발걸음 돌렸던 곳.

당연히 나 혼자선 쉽지 않을 거다.

어림도 없을지도 모르고.

‘일단 해 보고, 정 안 되면 파티라도 짜서 가야지. 쟁탈전은 나중에 생각하고.’

플랜B도 세웠겠다, 본격적으로 천자산 등반에 나섰다.

자, 일단 파티부터 찾아보자.

* * *

“하수오 파밍하러 가실 분들 모십니다!”

“술법가 모셔요!”

“템 좋은 무인 있어요~”

장가촌 안은 구인·구직하는 게이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지도를 보니 장가촌에서 귀막골까지는 거리가 상당해 거쳐 가야 할 지역이 다섯 군데나 됐다.

경로는 다음과 같았다.

정력의 계단 → 약초림 → 개골계곡 → 요괴림 → 혈붕절벽 → 귀막골

‘최소한 요괴림까지 같이 갈 파티원들을 구하면 되겠네. 어차피 혈붕절벽까지 가는 파티도 없는 것 같은데.’

파티플레이를 할 행선지를 정하고, 즉시 구직활동에 나섰다.

“요괴림 가실 분들 모십니다!”

“약초림 개골계곡 건너뛰고 요괴림만 도실 분들 구해요!”

“요괴림 가실 무인 한 분 모십니다!”

요괴림이 메인 던전이라 그런지 파티가 몇 개 있었다.

“저 혹시.”

“……?”

“저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죄송요.”

윽.

거절당했다.

“아, 왜요.”

“님 렙을 보세요. 최소 75는 돼야죠. 69가 어떻게 요괴림을 가요.”

“그래도 어떻게 안 될까요? 2인분 이상 할 자신 있는데. 저 디버ㅍ…….”

디버프 계열 스킬이 있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0.2인분이겠죠.”

뭐?!

0.2인분?

“아니, 근데.”

파티장이 날 유심히 부더니 입을 열었다.

“님 고자예요?”

아뿔싸.

“푸하하하하하!”

아.

“님들! 여기 봐요! 여기 이분 고자래요! 고자! 직업이 고자야!”

그러자 게이머들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몰려들어 내게 통찰의 인장을 들어댔다.

“찌, 찍지 마! 찍지 말라고! ㅆ발!”

황급히 도망쳤다.

“뀨! 주인놈아! 어디 가냐!”

“구! 구구구!”

햄찌와 꼬꼬가 내 뒤를 따랐다.

“도망간다!”

“님 어디 도망가요!”

“저기요!”

게이머들이 내 뒤를 집요하게 쫓아왔다.

하.

ㅈ됐네.

ㅆ발.

* * *

장가촌 뒷골목.

“뀨우. 주인놈아. 괜찮냐.”

“구, 구구구.”

햄찌와 구구가 쪼그려 앉아 있는 날 위로했다.

“아, 말 걸지 마.”

“주인놈아. 뀨. 기분 풀어라.”

“말 걸지 말라고… 내버려 둬.”

위로가 귀에 안 들어온다.

하아…….

NPC들이랑 있었을 땐 나름 괜찮았었는데…….

막상 게이머들이랑 어울리려니까 안 괜찮다.

본격적인 사냥터에 왔더니 다들 통찰의 인장으로 서로를 비춰 보는 바람에, 내가 고자인 걸 숨길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극기관 때야 다들 각자 퀘스트 수행하느라 별반 관심이 없었는지 그냥 넘어갔었는데, 게이머들끼리 파티를 짜서 몬스터들과 맞서 싸울 때가 되니까 이야기가 달랐던 거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같이 싸울 사람이 레벨은 몇인지, 아이템은 뭘 차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믿고 등을 맡길 테니까.

[연오랑]

분류 : 게이머 (천인)

종족 : 인간

성별 : 중성 (중성화)

나이 : 21

레벨 : 65

등급 : 삼류

소속 : 없음

직위 : 없음

직업 : 고자(鼓子)

칭호 : 연쇄쾌변마 / 중성화의 달인 / 약점이 없는 자 / 씨 없는 수박 / 내가 고자라니! / 사마천의 후예 / 땅콩은 없어도 모발은 있다! / 면도를 할 필요가 없는 자

뭔 직업이 고자야…….

이게 말이 되냐고…….

직업이 ‘그’ 디버프 마스터라는 것만은 가려져서 천만다행이다.

왜?

디버프 마스터는 3개 서버를 통틀어 나 하나뿐이니까.

만약 직업까지 까발려졌으면 내 정체를 들켰을 테고, 그럼 눈 깜짝할 사이에 전 세계로 소문이 퍼져나갔겠지…….

처음에는 한국의 각 커뮤니티부터 시작해서 그게 해외 커뮤니티로 퍼져나갈 때쯤 언론사나 방송사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할 게 분명하다.

그럼 전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겠지?

그 뒤에는 한태성 퇴물설, 거품설, 물로켓설이 거론되면서 내 지난 커리어까지 논란이 되겠지.

“뀨. 주인놈아. 그래도 아무도 주인놈이 주인놈인 거 모르지 않냐.”

“……그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도 쪽팔린 상황이라고.

지금쯤 몇몇 놈들이 무림 서버 관련 커뮤니티에 내 스샷을 올려놓고 조리돌림을 시작했을걸?

하아…….

한동안 인터넷 하지 말아야지…….

‘절대 들키면 안 돼.’

다시 한번 정체를 숨길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300레벨을 찍고 환골탈태하기 전까지는 때려죽여도 내가 한태성인 게 알려져선 안 된다.

이미 찍힌 스샷이 나돌아다니고 있겠지만, 환골탈태하고 나서 논란이 되면 그땐 오리발이라도 내밀지 뭐.

“뀨. 주인놈아. 그냥 내려놔라. 없는 걸 어떡하냐.”

“구, 구구구.”

이것들이 지금 누굴 놀리나…….

“뭐? 팍 씨! 그냥 내려놓으라고? 없는 걸 어떡하냐고? 너 같으면 내려놓겠냐?”

“뀨우? 어차피 환골탈태하면 다시 자라날 거 아니냐! 그때까진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다녀라! 뀨!”

“이게 철판 깐다고 깔리냐? 어? 깔 게 따로 있지! 놀림 받을 때마다 ㅈ나 서럽다고!”

“그럼 어떡하냐! 계속 쥐새끼처럼 숨어 다닐 거냐! 뀨!”

“그건 아니지만…….”

“뀨! 이거 받아라!”

햄찌가 책 한 권을 건네줬다.

“이거 그냥 빈 노트잖아.”

“앞으로 거기다 놀린 놈들 이름 적어라! 뀨!”

“으응?”

“적어 놨다가 나중에 복수해 주면 될 거 아니냐! 뀨!”

“그, 그럴까?”

“뀨! 그렇다! 주인놈 이제부터 고자노트 주인이다! 뀨우! 마음에 안 드는 놈들 있으면 거기다 다 적어서 고자 만들어 버려라! 뀨!”

오?

이건 좀 괜찮네.

그럼 확실히 쪽팔림과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까 그 새끼 이름이 뭐였더라.

아, 그거였지.

슥, 스윽.

[만찐두빵]

이유 : 파티 안 받아주고 조리돌림함.

고자노트의 제일 첫 장 맨 앞줄에 그 새끼 이름부터 적어 넣었다.

너, 딱 두고 봐.

언젠가 잘라 버린다, 내가.

아차.

얘는 두 번째.

제일 첫 번째는…….

[곽말풍]

이유 : 눈치가 ㅈ나게 없음.

고자노트 영예의 1위는 누가 뭐래도 눈치 없는 새끼지.

암, 그렇고말고.

* * *

파티플레이는 물 건너간 것 같고.

그렇다고 혼자 가자니 속도가 느릴 것 같고.

제한시간이 있는 퀘스트라 속도가 생명인데…….

“어쩔 수 없네. 버스라도 타야지.”

“뀨?”

“그냥 돈 내고 가자. 바빠 죽겠는데.”

주머니 사정도 두둑하겠다, 기왕이면 빠르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버스기사를 고용하기로 했다.

현질 한 푼 한 적 없어도 은자는 흘러넘친다고?

“어? 또 왔다.”

“킥킥. 킥킥킥.”

“풉.”

“고자 왔네.”

“직업이 고자래. 큭큭큭.”

아까처럼 구인구직 중이던 게이머들이 날 알아보고 수군덕거렸다.

웃어?

나 기억력 좋아?

니들 닉 다 기억해?

‘무시하고 버스나 찾자.’

꾹 참고 혈붕절벽까지 가는 버스를 찾았다.

근데, 혈붕절벽까지 가는 버스는 없고 파티만 있었다.

‘파티에 버스비 주고 꼽사리 껴서 가야겠다.’

세상에 돈 싫어할 사람이 어딨어?

혈붕절벽까지 가는 파티 중 하나를 고르고, 그중 가장 사람 괜찮아 보이는 파티장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어, 버스비 드릴 테니까 혈붕절벽까지만 빠르게 같이 가 주시면 안 될까요?”

“음?”

중년의 파티장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디버프 계열 스킬 있어서 데리고 가셔도 절대 민폐는…….”

그때.

‘어?’

파티장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어디서 많이 본 문장인데.

어디서 봤더라…….

잠깐.

저거, 설마…….

‘헉?!’

기억났다.

원을 부수는 망치.

저 문장은…… 내가 판타지 서버에서 운영하던 길드인 뚝배기단의 문장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