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뚝배기단은 숙적이었던 제네시스 길드에게 복수할 목적으로 설립했던 길드였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디버프 마스터가 되기 한참 전.
나는 제네시스 길드라는 거대 길드와 대립하게 됐다.
빚까지 내서 아이템을 맞추고 제네시스 길드에 대적했지만, 난 처참하게 짓밟히며 모든 걸 잃었다.
남은 건 곰팡이 잔뜩 핀 반지하 단칸방과 수억 원에 달하는 빚뿐이었다.
오죽했으면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했을까.
그러던 중 사부님이 찾아와 제자로 받아주었고, 나는 게임 BNW의 세계관에서 가장 강력한 무적의 히든 클래스 디버프 마스터로 다시 태어났다.
디버프 마스터가 된 나는 제네시스 길드에게 복수하기 위해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제네시스는 다른 게이머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초거대 길드로 성장한 상태였고,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무너뜨리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동료들과 함께 제네시스 길드에게 짓밟혔던 피해자들을 모아 길드를 설립했고, 그게 바로 뚝배기단이었다.
한때 뚝배기단은 제네시스 길드를 쳐부수고, 판타지 서버에서 가장 큰 세력을 구가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나는 은퇴를 선언하면서, 미련 없이 길드를 해체해 버렸다.
초거대 세력으로 성장한 뚝배기단이 제네시스 길드처럼 횡포를 일삼길 바라지 않았기에…….
길드가 해체되자 뚝배기단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몇 개의 길드가 새로 생겨나 지금 판타지 서버에서 초거대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지금 세력전 리그에서 활약하는 10개의 길드 중 4개 길드가 뚝배기단이라는 한 줄기에서 뻗어 나왔단 말씀!
그런데 그런 뚝배기단의 문장을 판타지 서버도 아니고 무림 서버에서 보게 될 줄이야.
이야.
저걸 여기서 다 보네.
추억 돋는다, 추억 돋아.
‘설마 내가 아는 사람인가?’
반가운 마음에 파티장의 얼굴과 닉네임을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서버를 바꾸면서 캐릭터 외형과 닉네임이 바뀌었을 테니 못 알아봐도 이상한 건 아니겠지만.
“혈붕절벽까지 버스를 태워 달라고요?”
<성큰파파>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파티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제가 가마꾼 비용 다 내고, 파티원 분들한테도 은자 30냥씩 드릴게요. 민폐 안 끼칠 테니까 저 좀 데려가 주세요. 만약 민폐 끼치면 버리고 가셔도 됩니다.”
“음.”
성큰파파가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
“젊은 친구가 퀘스트가 있나 보네요. 굳이 돈까지 써 가면서 레벨에도 안 맞는 지역에 가려는 걸 보면.”
“예, 뭐. 하하하.”
“파티원들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성큰파파가 그렇게 말하더니 같은 파티에 속한 이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좋죠.”
“저희가 손해 볼 건 없으니까요.”
“데리고 갑시다.”
다행히도 파티원들 역시 흔쾌히 내 제안을 수락해 주었다.
“좋습니다. 같이 가시죠.”
크흑.
감개가 무량하다.
옛날엔 내가 나타나면 너도나도 같이 파티하자고 줄을 섰었는데.
이젠 파티도 아니고 버스를 받아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한다니.
“감사합니다.”
성큰파파와 파티원들에게 은자 30냥씩을 건넸다.
“그럼, 수고해요. 젊은 친구.”
“예?”
설마.
“자, 잠깐만요!”
“응?”
“버스 태워 주시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성큰파파가 그게 뭔 개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쿠웅!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나…… 버스비 사기당한 거야?
먹튀 당한 거냐고?
“방금 버스 태워 주시기로 하고 돈 받아가셨잖아요.”
“언제? 우리한테 돈 줬어?”
“아니이…….”
“농담이에요.”
“예?”
“뭘 그렇게 놀래요? 하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
“큭큭큭! 어서 파티 신청하고 들어와요.”
아 씨.
간 떨어질 뻔했잖아욧!
[알림: 파티에 가입되셨습니다!]
뉴비 마음이 이런 거구나.
돈 주고도 사기당할지 모른단 불안감에 벌벌 떨어야 하네.
하아…….
쪼렙 캐릭터를 키우는 게 하도 오랜만에 잊고 있었다.
역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싶다.
“자자, 그럼 출발합시다.”
그렇게 성큰파파 형님의 파티에 꼽사리 끼어서 혈붕절벽까지 빠르게 이동하기로 했다.
* * *
우선 장가촌 가마꾼들에게 돈을 주고 정력의 계단을 통과하기로 했다.
계단 개수가 무려 800개에 워낙 가파르고 굽이져서, 탈것이 있는 사람들도 전문 가마꾼을 이용하는 게 훨씬 낫단다.
“자자! 다들 어서 타시오! 다 탔소? 출발하겠소!”
전문 가마꾼들이라 그런가?
허벅지 두께만 비정상적으로 두껍다.
어우야.
저 정도면 스쿼트 200킬로그램은 거뜬하겠는데?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그들의 옷차림.
‘아니이. 뭔 래퍼냐고. 왜 금목걸이에 금팔찌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건데.’
가마꾼들은 하나같이 두꺼운 금목걸이와 금팔찌를 차고 있었고,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두건과 신발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알고 계셨나요?]
천자산 가마꾼들은 가마를 드는 데 최적화된 심법과 무공을 익힌 전문 일꾼들입니다!
게이머 여러분들이 천자산을 많이 찾아준 덕분에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었답니다!
열심히 부자가 된 것까진 좋다.
누가 뭐래?
근데, 일하러 나와서 돈 자랑 하는 게 맞냐고.
당장 마이크만 쥐여 주면 랩이라도 할 것 같다.
적응 안 되게.
하여간 미친 세계라니까, 여기.
“자! 출발!”
부웅!
어?
ㅈ나 빨라!
붕! 부웅!
전문 가마꾼들이라 그런지 계단 오르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심지어 승차감도 좋아!
서문범의 일지에서 괜히 가마를 타고 이동하란 게 아니었구나…….
“근데 왜 정력의 계단이죠?”
“예, 손님.”
가마꾼이 대답했다.
“여길 자주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하체 근육이 튼실해져서 정력이 좋아집니다요.”
“그, 그래요?”
“다들 자식 셋은 낳을 정도로 불끈불끈! 합니다요! 하하하!”
가마를 끌고 계단을 오르는 중인데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심폐지구력이 장난이 아닌 게 느껴진다.
“손님도 나중에 운동 삼아 오르락내리락해 보십쇼!”
“저야 하체 운동 늘 열심히 하죠.”
“그렇습니까요? 하하하!”
“하체야말로 남자가 가장 단련해야 하는 부위 아니겠어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요! 소협! 껄껄껄!”
“하하하하!”
가마꾼과 한창 하체 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면서 웃고 떠드는데.
“뀨! 주인놈아!”
“으응?”
“고자 주제에 정력 얘기하지 마라! 뀨!”
“뭐 인마?”
“고자가 무슨 하체 운동이냐! 뀨! 주인놈은 가서 뜨개질이나 해라! 뀨!”
“이게 진짜!”
아무래도 안 되겠다.
햄찌 이 새끼도 고자노트에 적어야겠어…….
* * *
정력의 계단을 지나자 약초림이 나왔다.
약초림은 엄청나게 넓은 산속이었는데, 온갖 종류의 약초들이 자생하고 있어서 게이머들의 주요 돈벌이 수단 중 하나라고 했다.
낮은 확률이지만 가끔 백 년 묵은 산삼이나 하수오 같은 엄청 비싼 약초들도 발견되는 곳이라 많은 저레벨 게이머들이 약초 노가다를 위해서 찾는 곳이라나?
“심 봤드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저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심 봤네, 심 봤어.”
“누군지 모르겠는데 대박 났네요.”
“부럽다. 나도 그냥 약초나 캘까.”
파티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을 떠들어 댔다.
“아, 젊은 친구는 모르겠네요.”
성큰파파가 말했다.
“심 봤다, 하고 외치는 이유.”
“왜 외치는 겁니까?”
“산신령이 버프를 걸어주거든요.”
“예?”
뭔 소리야?
“100년 이상 된 산삼이나 하수오를 캐고 심 봤다 외치면 천자산 산신령이 버프를 걸어줘요. 약초림에서만 그런 건 아니고, 천자산 안에서 뭔가를 캐면 되고요.”
“사, 산신령이 버프를 걸어준다고요?”
“예.”
성큰파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3일짜리긴 한데. 못해도 30레벨 정도 능력치는 올라간다고 했던가?”
“헉?”
“뭘 캐느냐에 따라서 다른데. 대충 그 정도? 전에 보니까 200년짜리 산삼 캔 사람은 3일 동안 50레벨 정도 능력치가 올라갔다던데. 저도 안 캐 봐서 잘은 모르겠네요. 산삼 캘 확률이 로또 당첨될 확률이랑 비슷해서.”
살다 살다 산삼을 캤는데 산신령이 버프 걸어준다는 던전은 처음이다.
축하해 주는 건가?
“아무튼, 여기서부터 빠르게 이동할 거니까 잘 따라와요.”
“네.”
“다들 갑시다!”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됐다.
약초림에는 약초도 많았지만, 요괴들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캬아아아악!”
“크아아악!”
한번 요괴들이 나타날 때마다 아주 떼 지어 몰려드는데, 그 숫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혼자 왔으면 어지간히 고생했겠네.’
개골계곡으로 가는 길목이 요괴림에서 가장 많은 요괴들이 출몰하는 장소라서 그런지, 아주 몬스터 웨이브가 따로 없네.
“뀨! 주인놈아! 주인놈은 안 싸우냐! 뀨우!”
“에이, 뭘 싸워. 뒤에서 구경이나 하는 거지.”
돈 냈다고 해서 뒷짐 지고 구경만 하겠다는 건 아니다.
최소 1인분 이상은 하는 모습은 보여야지.
다만 직접 나서서 싸울 생각까진 없었다.
우웅!
필멸무참진을 펼쳤다.
화르르르르!
오?
서문란의 화기를 흡수한 덕분에 필멸무참진에 불꽃이 추가됐네.
퍽!
“꿰에엑!”
퍼억!
“캬악!”
요괴들이 파티원들의 공격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어?!”
“뭐, 뭐야.”
“방금 딜 무엇?”
파티원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리 약한 요괴라도 대여섯 방은 때려야 죽일 걸 한 방에 보내 버리니까 놀랄 수밖에.
후후.
놀라긴.
잡숴 보니 워뗘?
맛있쥬?
이게 디버프 마스터의 무서운 점이다.
본질은 물리 공격형 폭딜러인데, 이렇게 뒷짐 지고 장판만 깔아 줘도 서포터로서 최소 2인분 이상이 가능하다.
딜도 잘하고!
서포터도 잘하고!
아주 못 하는 게 없다는 말씀!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중략)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오?
경험치 오르는 거 보소?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림: 70레벨 달성!]
레벨업까지?
캬!
좋고요!
요괴들 때려잡는 속도가 빨라서 그런지, 경험치 오르는 속도도 무시무시하다.
쩝.
요괴들이 다 죽어버리는 바람에 전투가 금방 끝나 버린 건 아쉽다.
경험치 더 먹고 싶은데…….
홱!
파티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날 노려보았다.
“오, 오랑 님?”
성큰파파가 다가와 물었다.
“방금 뭡니까? 딜 박히는 게 말이 안 되던데요?”
“아, 이거요. 그냥 디버프 필드죠.”
“디버프 장판이라면…….”
설마 눈치챘나?
“혹시…….”
흠칫!
‘이렇게 걸리나? 아닌데. 걸릴 리가 없는데.’
디버프 필드가 디버프 마스터만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몇몇 디버프 필드를 사용하는 이들이 소수지만 있기는 하다.
위력 차이가 디버프 마스터가 넘사벽이라 그렇지.
“한태성이라고 아세요?”
헉?
두근두근!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다.
“하, 한태성이요? 그… 지금은 은퇴하신 전설의 프로게이머요? 아, 알죠. 잘 알죠. 모를 리가요. 하하, 하하하하…….”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꼭 그분 같네요.”
“네? 제가요?”
“아뇨.”
그럼 뭐가?
“디버프 필드요.”
“……?”
“오랑님이 디버프 필드 까는 거 보니까 한태성 선수 같네요. 캬. 진짜 옛날 생각나네.”
성큰파파의 얼굴이 추억에 잠겼다.
“한 7년 전쯤인가? 같이 사냥한 적 있었거든요.”
“한태성이랑?”
“그럼요.”
어어?
저기요, 아저씨…….
갑자기 그렇게 추억에 잠겨 버리기 있냐고요…….
“판타지 서버에 있던 시절인데. 소호카 유적지라고 있었거든요. 거기서 한동안 쭉 같이 사냥했던 적이 있었죠.”
소호카 유적지라면…….
‘내가 디버프 마스터가 되고 처음으로 파티사냥한 곳인데?!’
옛 기억이 떠올랐다.
파티에서 처음으로 귀족으로 대우받던 그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