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연오랑은 도저히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가히 환상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며 파티원들의 눈을 호강시켜 주었다.
밧줄에 몸을 의지해 몸을 날리고.
공중에서 독수리의 머리를 발로 차 추락시키고.
마지막으로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착지까지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연오랑의 싸움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고, 쇼는 이제 갓 막을 올렸을 뿐이었다.
다다다다!
연오랑이 절벽을 타고 내달리더니 다시 몸을 날렸다.
“삐이익!”
놀란 혈붕이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연오랑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휘리릭!
연오랑이 밧줄을 움켜잡고 있던 손을 놓아 길이를 연장시켰고, 그대로 혈붕을 덮쳤다.
“삐익! 삐이이익!”
혈붕이 미친 듯 몸부림쳐 댔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콰앙!
연오랑이 공중에서 잡아챈 혈붕을 절벽에 그대로 처박아 버렸다
우르르르!
부스스!
절벽 일부가 부서지며 작은 돌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삐익.”
혈붕이 힘없이 대가리를 떨궜다.
연오랑에 의해 절벽에 처박히면서,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고 즉사한 것이다.
연오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붕!
부웅!
밧줄 하나에 의지해 계속해서 몸을 날리고, 절벽을 타고 내달리며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혈붕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잡았다.
한 번은 하늘을 날던 혈붕을 발판 삼아 다시 도약하는, 그야말로 신기(神技)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심지어 공중에서 혈붕의 목을 잡아챈 뒤 절벽에 처박고, 죽빵을 마구 먹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연오랑은 밧줄에 의지해서 몸을 날리는 공중전에만 능한 게 아니었다.
“삐이익!”
혈붕 한 마리가 연오랑이 미처 몸을 날리기 전 그를 덮쳤다.
하지만 연오랑은 당황하지 않았다.
절벽에 매달려 선 채로 혈붕의 공격을 피하면서, 그대로 주먹을 내질러 반격을 가했다.
팍! 파바박!
네 번의 주먹질.
쾅!
그리고 마무리 강타까지.
“삐이익!”
기회를 틈타 근접전을 시도했던 혈붕은 절벽 아래로 추락해 최후를 맞았다.
연오랑에게 당했던 다른 혈붕들처럼…….
“미친.”
“그냥 우리랑은 종자가 다르네.”
“천재였구나.”
“지금 랭커들도 저렇게는 못 할 것 같은데요?”
파티원들은 전투 중인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저 넋 놓고 연오랑을 구경했다.
평범한 게이머들에게 있어 이런 장면을 실제로 구경한다는 건 정말이지 드문 기회였다.
프로게이머쯤 되는 사람들과 사냥할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고.
연오랑의 움직임은 일부러 최정상급 프로게이머의 매드무비 영상을 찾아보지 않는 한 직접 볼 일이 거의 없는 진풍경이었다.
오죽했으면 관람료라도 내야 하나 싶을 지경이었다.
“노, 녹화.”
“이거 영상 커뮤니티 같은 데 올리면 진짜 대박일 듯?”
몇몇 파티원들은 아예 녹화 버튼을 눌러서 연오랑의 움직임을 동영상으로 기록하기까지 했다.
지금 연오랑이 보여 주고 있는 움직임 자체만 보면, 현재 활동하고 있는 최정상급 프로게이머들에 견주었을 때 전혀 밀릴 것 같지가 않았다.
심지어 아직 100레벨도 못 찍은 뉴비인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신성(新星)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아.”
성큰파파가 그런 연오랑을 보고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연신 탄성을 내지르던 그때.
“뀨! 뭐 하냐! 얼른 싸워라! 주인놈 혼자 힘들다!”
햄찌가 소리쳤다.
“아차!”
“돈 받아놓고 우리가 일 시키고 있네요! 다들 정신 차리고 싸웁시다!”
“이, 일단 싸우죠!”
그제야 정신을 되찾은 파티원들이 연오랑을 도와 혈붕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 * *
전투가 끝났다.
“삐익! 삐이이이익!”
“삐이이이익!”
저 멀리 혈붕들이 도망치는 게 보인다.
얘들아!
어디 가!
경험치 더 주고 가야지!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중략)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잡기 힘든 요괴들이라 그런가?
혈붕들이 주는 경험치가 어마어마했다.
레벨이 비해 맷집도 약해서 나한테도 픽픽 죽어 줘서 좋고.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림: 76레벨 달성!]
[알림: 77레벨 달성!]
[알림: 78레벨 달성!]
눈 깜짝할 사이에 3레벨이나 올렸네.
헤헤헤.
“다들 무사하십니까!”
으응?
왜 다들 그런 눈으로 봐?
“님 사람 맞아요?”
“프로게이머세요?”
“아니면 전 프로세요?”
“이거 본캐 아니죠? 부캐죠?”
파티원들이 몰려들어 날 추궁했다.
헉.
너무 나댔나.
“하하, 하하하하.”
하 씨.
뭐라고 변명하냐…….
이러다 진짜 걸리는 거 아냐?
“이, 일단 정리부터 하죠.”
우선 절벽 아래로 기어 내려가 처치한 혈붕들의 시체를 수거하는 작업을 도왔다.
갈 땐 가더라도 내 몫은 챙겨가야지.
암, 그렇고말고.
“오랑 님 프로 맞죠?”
“혹시 다른 게임하다 오셨나?”
“본캐가 뭐예요?”
“저희한테만 살짝 얘기해 주시면 안 돼요?”
윽.
절벽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파티원들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에이, 저 프로 아니에요. 본캐도 없고요. 옛날에 판타지 서버 잠깐 하다가 일이 바빠서 접었었어요. 지금은 그냥 방구석 겜돌이입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망하네요. 하하, 하하하.”
하 씨.
믿는 눈치들이 아니다.
다들 뱀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어…….
“아닌 거 같은데.”
“어딜 봐서 일반인 실력이에요? 그게?”
“하. 기만자.”
아무래도 그냥은 안 넘어갈 것 같은 기세다.
‘ㅈ됐네. 그냥 조용히 있을걸.’
나섰던 걸 후회하는데.
“다들 그만해요.”
성큰파파 님이 나서줬다.
“오랑 님이 아니라는데 우리가 캐묻는다고 되나요. 진짜 일반인이실 수도 있고, 아니면 사정이 있으셔서 프로게이머라는 걸 밝히기 어려우실 수도 있죠.”
오오!
역시 우리 길드원!
뚝배기단이여!
영원하라!
“아까 영상 찍으신 분들도 계시던데. 오랑 님 허락도 안 받으셨잖아요.”
그런 성큰파파 님 말에 파티원들이 멋쩍은 피소를 지으며 땀을 삐질 흘렸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잘하셔서 저희도 모르게.”
“영상은…… 올리면 안 되겠죠?”
당연히 안 되지!
“영상은 지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냥 조용히 게임하고 싶어서요. 유명해지는 걸 바라지도 않고요.”
정중하게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워 드릴게요.”
파티원들도 나름 괜찮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내 부탁을 들어줬다.
진짜 영상을 지웠는지, 아니면 내 앞에선 지웠다고 하고 나중에 가서 올릴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일단 정리하고 아이템 분배부터 하죠.”
성큰파파 님이 나서 준 덕분에 곤란한 상황을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앞으로 게이머들은 멀리해야지. 계속 이런 식이면 언젠가는 들통날 테니.’
정리가 끝나고.
[알림: <혈붕의 부리>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알림: <혈붕의 발톱>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알림: <혈붕의 피>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아이템은 공평하게 분배했다.
파티원들이 몫을 좀 더 몰아주겠다는 걸 애써 거절했다.
애초에 재료템 파밍하러 온 것도 아닌데 욕심낼 이유도 없고.
“저어, 오랑 님.”
성큰파파 님이 다가와 말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얘기 좀 하실래요?”
“얘기요?”
“네, 잠시면 됩니다.”
뭐, 뭐지.
괜히 사람 불안하게.
설마 눈치챈 건 아니겠지?
다른 파티원들은 몰라도 이 사람은 왠지 불안한데…….
“네, 말씀하시죠.”
일단 뭐라고 하는지 들어 봐야겠다.
* * *
자리를 옮겨 성큰파파 님과 얘기를 나눴다.
하아.
파티원들 눈초리가 좀 신경 쓰이긴 하네.
“오랑 님,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네?”
갑자기?
“오랑 님 덕분에 그때 생각나더라고요.”
“언제요?”
“한태성 선수와 같이 파티 사냥했을 때요.”
“아.”
“오랑 님이랑 같이 파티 사냥하면서 그때 느꼈던 기분을 똑같이 느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에이, 별말씀을요.”
휴.
다행이다.
눈치는 못 챈 것 같…….
“두 번이나 이런 추억을 만들어 주시네요. 한태성 선수.”
“아니, 별말씀을…… 히익?!”
방, 방금 뭐라고 했어?
한태성?!
“네? 제가요? 에이, 그럴 리가요. 제가 무슨 한태성이에요. 하하, 하하하하.”
“사정이 있으시겠죠.”
“절대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진짜 감사해요. 그때랑 같은 추억 만들어 주셔서.”
아무래도 내 정체를 확신하는 눈치다.
“오랑 님이 태성 선수라는 건 어디 가서 절대 말 안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저 믿으셔도 됩니다.”
성큰파파 님이 뚝배기단의 문장을 새긴 문신을 슥 들어 보였다.
“하하하하…….”
“진짜 어디 가서 말 안 할게요. 저 혼자만의 추억으로 간직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예, 뭐. 제가 한태성도 아닌데요, 뭘. 하하하하…….”
“나중에라도 밝히시게 되면.”
성큰파파 님이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네줬다.
“이게 제 전화번호인데…… 나중에 팬미팅하실 때 우리 아들한테 아빠랑 친한 사이라고 한 말씀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빠로서 자랑하고 싶어서 그래요. 한태성 선수랑 같이 사냥하던 사이였다고.”
에이, 그건 너무 나가셨다.
이제 초등학교 들어간 애가 날 어떻게 알아요.
나중에 프로로 복귀하면 몰라도.
“에이, 저 한태성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연락처는 받아두겠습니다. 기회 되면 나중에 밥이나 한 끼 하시죠. 제가 연락드릴게요.”
일단 성큰파파 님의 쪽지를 받아 들었다.
혹시 모르니까.
“정말 감사해요, 한태성 선수. 너무 즐거운 추억 두 번이나 만들어 주셔서.”
“그건 나중에 한태성 선수 팬미팅에 가셔서 말씀하셔야죠. 저 말고요.”
“하하하.”
이럴 땐 정체를 못 밝히는 게 아쉽다.
맘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밥도 사 주고, 팬서비스도 실컷 해주고 싶은데.
‘기회가 있겠지.’
언젠가 꼭 연락하겠단 마음으로, 성큰파파 님이 준 쪽지를 품에 넣었다.
성큰파파 님과 비밀 얘기를 나눈 후 파티원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원래 솔플을 선호하는 나지만, 이번만큼은 파티플레이를 하길 잘했다.
디버프 필드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지금 내 스펙으로는 대미지가 제대로 안 박혀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다.
파티원들이 요괴들의 시선을 분산시켜 주고 딜을 같이 넣어 준 덕분에 이렇게 빠르게 올 수 있었던 거지, 혼자였다면 아직도 약초림을 못 벗어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옛 동료이자 전우인 성큰파파 님과 만날 수 있었던 게 가장 좋았고.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성큰파파 님이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진짜 센 요괴들이 나올 텐데.”
“괜찮습니다.”
“저희 시간도 많이 남는데 그냥 같이 가시죠.”
그러자 다른 파티원들도 너도나도 동행하고 싶단 의사를 전해왔다.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그냥 같이 가요. 사냥 속도가 빨라서 시간도 엄청 남아서 괜찮아요.”
“같이 해요.”
솔직히 맘 같아선 귀막골까지 같이 가고 싶다.
근데, 보스를 처치하고 난 뒤에 쟁탈전이 안 벌어질 거라 장담을 못 하겠다는 게 문제다.
성큰파파 님이라면 몰라도, 나머지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게임 하루 이틀 해 본 것도 아니고.
방금까지 하하호호 웃으며 떠들던 사람이 한순간에 돌변하는 걸 한두 번 봤어야지.
서문란을 치료할 영약인데 혹시 강탈이라도 당했다간…….
어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다들 감사합니다. 저 이제 가 볼게요. 즐거웠습니다.”
성큰파파 님과 파티원들을 뒤로하고, 다시 혈붕절벽을 올라 귀막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서문세가는 지금쯤 잘 버티고 있으려나.
걱정된다.
내가 늦더라도 지원군은 제때 도착해야 할 텐데…….
전서구들을 보내 놨으니 지원군이 제때 도착할 거라 믿고, 일단은 영약을 얻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