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혈붕절벽에서 한 5킬로미터쯤 갔나?
갑자기 눈 덮인 설원(雪原)이 펼쳐지더니,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내리깔린 협곡이 떡하니 나타났다.
천자산 중턱.
귀막골
“뀨우. 주인놈아. 햄찌 춥다. 뀨.”
“구, 구구구.”
햄찌와 꼬꼬가 춥다고 몸을 떨었다.
“춥다고?”
“뀨우? 주인놈은 안 춥냐?”
“하나도 안 추운데?”
춥긴 개뿔.
서늘하니 시원해서 좋구만.
“니들은 양심이 있냐.”
“뀨우?”
“털복숭이들 주제에 추위 타도 돼? 하여간 양심들이 없어요, 양심들이.”
“캬아아악! 햄찌 엄살 피우는 거 아니다! 캬아악! 여기 엄청 춥다! 캬아아악!”
“하나도 안 추운데 뭔 개소리야.”
“캬아악! 주인놈 열 올라서 추위 안 느끼는 거다! 캬아악!”
아?
서문란의 화기를 흡수한 것 때문에 추위를 안 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미, 미안. 헤헤헤.”
“캬아악! 주인놈이 양심 없다! 캬아악!”
“오해할 수도 있지. 자식들이 말야.”
서문범의 배낭을 열어 보니 두꺼운 겨울옷이 나왔다.
캬.
역시 있네.
“기다려 봐.”
“뀨우?”
슥, 스윽.
싹둑, 싹둑.
서문범의 털옷을 방천가위로 대충 잘라서 햄찌와 꼬꼬에게 입혀 줬다.
“이제 됐냐?”
“뀨! 버틸 만하다! 주인놈아! 고맙다!”
“구! 구구구!”
짜식들.
무슨 강아지 옷 입혀 놓은 거 같네.
찰칵!
너무 귀여워서 스샷 한 장 찍었다.
“이제 춥다고 그만 징징대고. 바짝 긴장들 해. 여기서부터는 진짜 위험하니까.”
“뀨! 알겠다!”
“구! 구구구!”
서문범 아저씨와 천기자 영감님의 말대로라면, 이곳에는 뭔가 강력한 음기를 가진 요괴나 영물이 살고 있을 거라고 했다.
‘차라리 잘됐네.’
서문란의 화기를 흡수한 게 오히려 전화위복 같다.
햄찌와 꼬꼬 같은 털 달린 짐승들도 춥다고 할 정도면 정말로 온도가 낮은 것일 텐데, 난 멀쩡한 걸 보니 오히려 다행이다.
추위는 은근히 사람을 힘들게 하니까.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다닥…!!!
뭔가 여러 명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으응?
사람인데?
자욱한 안개를 뚫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드러내…… 가 아니라.
“거, 거미잖아?!”
알고 보니 사람이 아니라 거미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한 요괴들이었다.
[인면지주]
거미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가진 요괴.
늘 웃는 얼굴이며, 날카로운 송곳니에는 맹독이 가득하다.
분류 : 요괴 (반인반수)
등급 : ★
레벨 : 110
주의사항 : 입에서 거미줄을 뿜어내어 먹이를 꽁꽁 묶은 뒤 천천히 갉아먹는 습성이 있으므로, 산 채로 뜯어먹히고 싶지 않다면 상대하는 데 매우 주의하여야 한다.
획득 가능 아이템 : 인면지주의 가죽
“낄낄낄낄!”
“오래간만에 맛있는 먹이로구나!”
“고기! 고기다!”
얘들 말도 해?
꽈악!
산화부식장갑을 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싱싱한 고기야! 이리 와라!”
“낄낄낄! 맛있겠다! 낄낄!”
인면지주 여덟 마리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우릴 향해 덤벼들었다.
* * *
내 레벨이 78레벨.
인면지주들의 레벨은 110레벨.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그래도 해볼 만은 하다.
50레벨까지는 차이가 안 나니까, 디버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한 마리씩 처치한다면 승산은 충분하다.
중성화의 달인 칭호 효과 덕분에 나는 같은 레벨의 게이머들보다 스탯이 훨씬 높기도 하고.
좀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자존심이 밥 먹여 줘?
강하면 장땡이지!
우웅!
속력금쇄진을 펼쳐 인면지주들에게 슬로우 효과를 걸고.
화르르르!
화기를 끌어올려 산화부식장갑에 불길을 휘감았다.
‘지금!’
가장 앞에 있는 인면지주의 얼굴 정중앙에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앙!!!
강타 스킬을 머금은 산화부식장갑이 인면지주의 얼굴을 완전히 뭉개 놓았다.
“캬아아아아아악!”
인면지주가 비명을 내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취이이이이이이익!”
“취이이이이익!”
“취이이이이이익!”
나머지 일곱 마리 인면지주들이 입에서 거미줄을 내뿜었다.
‘묶어 봐.’
거미줄?
굳이 피할 필요 없지.
화아아악!
초월무극 스킬을 켰다.
파직!
파지지직!
내 몸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파란색과 빨간색이 뒤섞인 울긋불긋한 전류가 뿜어져 나왔다.
[알림: <슈퍼아머> 효과가 적용되었습니다!]
[알림: 레벨이 높은 대상을 상대로 피해량이 증가합니다!]
[알림: 레벨이 높은 대상을 상대로 방어력이 증가합니다!]
[알림: 모든 능력치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알림: 디버프가 걸린 대상에게 주는 피해량이 증가합니다!]
초월무극을 켠 게 다가 아니다.
“뀨우! 주인놈아! 햄찌가 힘 준다! 뀨우우우!”
햄찌가 버프까지 더해졌다.
크으으!
그래, 이 느낌이지!
전신에 힘이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이 기분!
취이이이이이이익!
취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인면지주들이 뿜어낸 거미줄이 내 몸을 휘감았다.
‘뚫고 나가면 그만이지.’
몸을 움직였다.
툭, 투둑!
거미줄들이 힘없이 끊어져 나갔다.
‘다시.’
얼굴이 반쯤 뭉개진 인면지주를 향해 강타를 날렸다.
콰아앙!!!
폭발음과 함께 인면지주의 머리통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갔다.
손맛 좋고!
“가, 강한 놈이다!”
“무공을 익힌 고수다!”
놀란 인면지주들이 당황하는 사이.
‘더 빠르게!’
번개처럼 몸을 날려 필멸무참진을 전개했다.
쾅!
콰앙!
산화부식장갑을 낀 주먹으로 인면지주들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캬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아악!”
쾅! 쾅!
콰아아아앙!
인면지주들의 머리통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가며 거미 몸뚱이가 하나둘 쓰러져 갔다.
[알림: 경고, 경고!]
[알림: 생명력이 부족합니다!]
[알림: 지구력이 부족합니다!]
[알림: 기가 부족합니다!]
초월무극 스킬을 켰더니 생명력, 지구력, 기의 소모가 엄청나다.
아직 한 마리 남았는데…….
[알림: 초월무극 스킬이 해제되기까지 3초 전!]
[알림: 2초 전!]
[알림: 1초 전!]
아직 강타 스킬이 재사용 대기시간인데…….
에라, 모르겠다!
마지막 남은 인면지주의 이마에 방천가위를 냅다 박아 넣었다.
푸욱!
“컥!”
인면지주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더니, 그대로 쓰러져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고는 이내 축 늘어져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알림: 초월무극 스킬이 해제되었습니다!]
끄, 끝났다.
다행히 초월무극 스킬이 끝나기 직전에 해치웠다.
하얗게 불태웠어…….
* * *
초월무극 스킬을 사용한 대가는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알림: 주의하십시오!]
[알림: 지금의 당신은 매우 나약합니다!]
[알림: 운기조식을 통해 소모된 기를 보충하십시오!]
[알림: 생명력과 지구력의 소모가 극심합니다!]
[알림: 휴식을 취하십시오!]
어어?
어어어?
알림창이 뜨자마자 눈앞이 어질어질 핑그르르 돌았다.
철푸덕!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빠지고 말았다.
하 씨.
존심 상하게 이게 뭐야…….
“뀨우우우! 주인놈아! 괜찮냐!”
“나, 나 좀 일으켜 줘. 크윽.”
“뀨우! 주인놈아!”
“으으윽!”
판타지 서버에서 쓰는 것보다 후유증이 더 심각하다.
거의 수명을 바치고 강함을 얻는 느낌이다.
아직 레벨이 낮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캐릭터 자체가 약해 빠져서 그런 건지.
“야, 햄찌야. 운기조식 좀 하게 나 좀 지켜줘.”
“뀨! 알겠다! 걱정 마라!”
운기조식으로 기부터 보충하기로 했다.
인면지주의 가죽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벗길 힘도 없어…….
“와 ㅆ발. 인면지주? 대박.”
한참 운기조식하면서 내공을 보충하는데, 등 뒤에서 뭔가 ㅈ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싶어서 쫓아와 봤는데 지 혼자 꿀 빨라고 했었나 보네. 어쩐지. 꾸역꾸역 버스까지 타 가면서 혼자 어딜 가나 했네. 이런 좋은 데가 있었구만?”
어디서 들어본 목소린데.
만찐두빵.
운기조식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고자노트에 이름을 올린 놈이 이죽거리고 있었다.
“저거 ㅈ나 비싼 거 아니에요?”
“어떻게 잡았대?”
“와. 인면지주 가죽 이거 진짜 귀한 재료인데.”
만찐두빵의 파티원들이 인면지주들의 시체를 살펴보며 탐욕에 가득 찬 눈을 빛냈다.
‘하필 이럴 때.’
맘 같아선 당장에라도 패 주고 싶은데, 타이밍이 안 좋다.
진짜 숟가락 하나 들 힘도 없다고…….
“어떻게 이런 좋은 사냥터를 발견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덕분에 고맙다. 꿀은 우리가 빨게. 히히히.”
만찐두빵이 날 향해 다가왔다.
“뭔 하이에나 새끼들도 아니고. 크윽.”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는데, 다리가 후들거려서 도저히 일어나지지도 않는다.
“어떻게 쫓아왔냐?”
“다 방법이 있지.”
“방법?”
“개 코가 하나 있어서.”
만찐두빵이 턱 끝으로 파티원 하나를 가리켰다.
술법가네?
개처럼 냄새로 사람을 추적하는 술법이라도 쓴 모양이다.
저건 미처 생각 못 했다.
개도 없는데 냄새로 추적해 올 수 있을 줄은.
“아까 올라오는데 니네 파티에 너만 없더라고.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쫓아와 봤지. 후후.”
꼴에 잔머리를 잘 굴리긴 했네.
“여기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만찐두빵 새끼가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파티까지 버리고 혼자 해 처먹으러 왔으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뭔가가 있다는 거겠지?”
내가 이래서 눈치 빠른 놈들이 싫다니까…….
“네 꿀단지는 우리가 잘 빨아 먹을 테니까, 넌 이쯤에서 꺼져라. 어떡하냐? 기껏 돈까지 써가면서 버스 탔는데 여기서 뒈져서?”
“안 뒈질 건데?”
누구 멋대로.
적당히 말 섞어 주는 척하다 니 모가지부터 딸 거다.
“뒈지는 건 너지.”
“꼴에 존심은.”
만찐두빵이 피식 코웃음 쳤다.
그래, 방심해라.
그 방심이 네 숨통을 끊어놓을 테니까.
“실력도 없는 주제에 돈 써서 레벨 올리고 템 맞춰 봐라. 소용 있나. 결국엔 이렇게 남들한테 다 빨ㄹ…….”
쒜에에엑!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한 발이 만찐두빵의 목 언저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뭐야!
갑자기 웬 화살?
* * *
쒜엑!
쒜에엑!
본격적으로 날아들기 시작한 화살들이 만찐두빵 일행을 향해 비 오듯 쏟아졌다.
설마?
“오랑 님!!!”
성난 호랑이처럼 뛰어든 성큰파파 님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어?
저 양반이 여길 왜?
“오랑 님! 숙이세요!”
“저희가 상대할게요!”
“이 새끼들! 잘 걸렸다!”
나머지 파티원들이 만찐두빵 일행을 향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어 댔다.
갑자기 지원군 뭐야?
“오랑 님! 괜찮으세요?”
성큰파파 님이 다가와 물었다.
“여긴 어떻게…….”
“내려가는 길에 저 새끼들이랑 마주쳤는데 낌새가 영 수상해서 뒤쫓아와 봤죠. 혹시나 싶어 가지고. 안 그래도 오랑 님 혼자 보내고 걱정됐었거든요.”
핑-
갑자기 눈가에 습기가 차오른다.
이렇게 도움을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찡긋찡긋!
성큰파파 님이 윙크를 해 보이며 뚝배기단 길드 문장이 새겨진 팔뚝을 슥 드러내 보였다.
이참에 나도 하나 새겨야 하나…….
아니, 그보다.
‘진짜 식사 자리 한번 마련해서 잘 대접해 드려야지.’
성큰파파 님한테는 차원이 다른 팬서비스로 보답해 드려야겠단 생각밖에 안 든다.
“오랑 님.”
성큰파파 님이 손을 내밀었다.
덥석.
“감사합니다.”
성큰파파 님의 손을 맞잡고 몸을 일으켰다.
“쉬고 계세요. 저 새끼들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에이, 그럴 순 없죠.”
쉴 땐 쉬더라도 할 건 해 놓고 쉬어야지.
스윽.
손을 들어 만찐두빵을 가리켰다.
“저 새끼는 제가 직접 조질 테니까, 나머지만 좀 부탁드려요.”
“괜찮으시겠어요? 상태 안 좋아 보이시는데.”
“상태 안 좋아도.”
한 발걸음을 떼어놓으며 성큰파파 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새끼 하나쯤은 족칠 수 있어요.”
아무렴.
내가 누군데.
“갑니다.”
성큰파파 님께 슬쩍 목례를 해 보이고, 즉시 만찐두빵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