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서문란, 서문범을 어떻게 아세요?”
“어찌 그 부녀를 모르겠느냐? 서문세가는 고장현에서 오랜 시간 공덕을 베풀어 온 유서 깊은 명문가가 아니더냐?”
“그렇죠?”
“그런 서문세가의 당대의 가주와 그 딸을 모르는 게 어디 말이나 되겠느냐.”
아니이…….
뭔 산신령 주제에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 그리 빠삭해?
산속에 틀어박혀서 연못에 금도끼 은도끼나 던져 놓는 게 주요 업무 아니었나?
“노부에게도 눈과 귀가 있느니라.”
산신령이 내 생각을 읽었는지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눈치는 빨라 가지고.
“산신령이라고 해서 어찌 산에만 틀어박혀 있겠느냐? 적당히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알고 해야 산을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거 아니냐?”
“아, 예.”
“본론으로 돌아가서.”
산신령이 짐짓 어깨를 으쓱! 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서문세가의 가주 녀석이 찾아왔기에 흔쾌히 영약을 내어주려고 했다. 딸을 살리려는 아비의 마음을 어찌 몰라주겠느냐? 사사로운 욕심 때문이 아니니, 그 모습이 기꺼워서라도 내주려 했었다.”
“근데 왜 빈손으로 보내셨어요?”
“노부가 다가가기도 전에 하산하더구나.”
“예?”
뭔 소리야…….
“노부는 산신령이라 아무 곳에서나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어 부득이하게 녀석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하?”
“그런데 서문범이 안 오고 네 녀석이 왔구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음?”
“이차저차해서 여차저차…….”
산신령에게 서문세가에서 벌어진 일을 말해 주었다.
“허어!”
산신령이 탄식했다.
“화령마신(火霊魔神)이라니! 필시 그 악마적 존재를 만들려 했던 것이 분명하구나!”
“화령마신이요……?”
“화령마신은 만물을 절멸시키는 끔찍한 대재앙을 일으키는 존재이니라. 사악한 술법을 이용해 구양절맥의 체질을 가진 사람으로 만든다 하였거늘.”
“헉!”
“허어. 어찌 그런 무리들이 활개를 치고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말하는 걸 들어보면 꼭 종말을 불러일으키겠단 걸로 들린다.
그럼, 백련교의 목표는 세계멸망인 건가?
‘이놈의 악당 놈들은 뭐만 하면 세계멸망이야.’
판타지 서버나 무림 서버나 악당들이 하는 생각은 도긴개긴인 모양이다.
“더 자세히 아시는 건 없나요?”
“그 이상은 노부도 모른다.”
“산신령이시잖아요.”
“산신령이면 뭐 다 알아야 하냐!”
“왜 화를 내고 그러세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윽.
귀 따가워.
무림 서버 영감탱이들은 어떻게 된 게 하나같이 목청이 좋냐…….
“화령마신에 대해서는 천계의 천신들이나 선계의 신선들쯤 돼야 자세히 알지, 나 같은 일개 산신령으로서는 그 이상 알지 못한단 말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지.
그걸 또 화를 내네.
“아무튼. 백련교라. 아주 위험천만한 놈들이로구나. 마땅히 토벌해서 이 세상을 평안케 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죠.”
“어찌 됐건 서문세가가 큰 어려움에 처했다고 하니 네 녀석에게라도 영약을 내어줄 수밖에 없겠구나. 서문범과 같은 협객이 딸을 잃어서야 되겠느냐.”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이래서 사람이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건가 싶다.
산신령까지 나서서 영약을 주려는 걸 보면.
“다만 영약이 네 녀석에게 자신을 허락할지 말지는 두고 봐야 알 것이니, 삿된 마음은 추호도 없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자신을 허락하고 말고가 무슨 말씀이시죠? 삿된 마음은 또 뭐고요?”
“가보면 알아!”
산신령이 빽! 소리를 질렀다.
“뭘 그리 궁금한 게 많아! 어르신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아주 어르신 말씀하시는 데 따박따박 말대답을 해? 에잉! 이런 싸가지 없는 놈!”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한바탕하고 싶은데 참는다.
무림 서버 영감탱이들은 왜 하나같이 꼬장꼬장한 건지 모르겠다.
판타지 서버 어르신들은 나 엄청 예뻐했는데.
“안쪽으로 쭉 가다 보면 영약이 있을 테니 가 보든지 말든지 네놈 맘대로 해라.”
“눼.”
아무래도 아까 식상하다고 말한 것 때문에 삐친 것 같다.
어휴.
저 삐돌이 영감탱이.
* * *
산신령이 가르쳐준 대로 안쪽으로 쭉 들어가 본 결과.
“와우.”
눈앞에 펼쳐진 설원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뀨! 주인놈아! 여기 정말 예쁘다! 뀨우!”
“구! 구구구!”
햄찌와 꼬꼬가 좋다고 눈밭을 데굴데굴 굴렀나.
니들이 강아지냐……?
짜식들.
귀여워 죽겠네.
뽀득, 뽀드득.
눈 덮인 설원을 걸어 쭉 앞으로 가 보았다.
어?
“오셨군요.”
웬 앳되어 보이는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세요?”
“저는 인형설삼이랍니다.”
인형설삼?
이건 처음 들어 보는데.
[알고 계셨나요?]
인형설삼(人形雪蔘)이란 눈 덮인 설원에 서식하는 산삼으로서, 그 형상이 사람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인형설삼은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약 1,000년 정도 묵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형설삼이구나.
‘다만 영약이 네 녀석에게 자신을 허락할지 말지는 두고 봐야 알 것이니, 삿된 마음은 추호도 없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산신령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자신을 허락한다는 표현을 썼던 이유가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단 생각이 든다.
“연오랑이라고 합니다.”
인형설삼에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반갑습니다, 연오랑 님. 연오랑 님께서는 저를 데려가려고 오신 것이겠죠?”
“아, 예.”
막상 산삼이랑 대화하려니까 말문이 막힌다.
아 씨.
말을 어떻게 해야 되지?
널 가져다가 백숙 배에 넣고 가마솥에 푹 끓일 거야?
아니면 약탕기에 넣고 탕약을 우려낼 거야?
아니면 죽엽청에 넣고 산삼주를 담가버릴 거야?
“어. 음. 그게. 그러니까. 흠.”
이거 난감하네.
당사자 앞에서 너를 캐 가겠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
“네.”
“그게…….”
“네에.”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편히 말씀하셔도 되어요.”
“저, 정말로요?”
“네.”
“제가 그… 선생님이 필요해서요. 아, 물론 제가 먹을 건 아닙니다. 서문란이라고 난치병에 걸려서 고통받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오늘내일하거든요. 그 친구 병을 치료하려면 선생님이 꼭 필요해요. 그래서 인형설삼 선생님을 모셔 가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불러야 할지 딱히 생각이 안 나서 그냥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좀 어색하긴 한데, 천년 묵었으면 선생님 맞지.
으으으.
차마 캐 가겠다고는 말 못 하겠다.
“허락하겠습니다.”
“네?”
“연오랑 님이 저를 데려가시는 것을 허락합니다. 다만.”
인형설삼이 덧붙였다.
“오직 그 서문란이란 분을 치료하는 데에만 쓰셔야 합니다. 그것만 약속해 주신다면 저를 드리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렴.
내 욕심에 온 것도 아닌데.
“제가 선생님을 데려가려는 건 오직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서니까.”
“좋습니다.”
인형설삼이 생긋 웃었다.
“이곳에서 천 년을 자생하며 기운을 쌓았습니다. 언젠가 꼭 필요한 사람이 저를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면서. 오늘 마침내 저를 데려갈 주인을 만났네요. 연오랑 님께 제가 쌓은 천 년의 기운을 맡기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좋은 일에 쓰시기를…….”
스으으!
인형설삼이 상서로운 빛에 휩싸이더니, 서서히 옅어지며 종적을 감췄다.
그러자 눈앞에 눈 덮인 설원에 아름다운 꽃봉오리와 열매가 맺힌 산삼이 나타났다.
“감사합니다.”
슥, 스윽.
슥슥슥.
혹시 뿌리라도 상할까 조심조심 언 땅을 긁어내 가며 인형설삼을 캤다.
거의 3시간쯤 땀을 뻘뻘 흘리며 언 땅을 긁어낸 결과.
“와아-!”
정말이지 아름다운 산삼 한 뿌리가 나타났다.
마치 아름다운 여인이 다소곳이 누워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한…….
“구륵?”
꼬꼬가 호기심에 인형설삼에게 다가가 부리를 들이밀…….
“처먹지 마! 이 미친놈아!”
“캑! 캑캑캑!”
“너 줄 거 아냐!”
“캑캑캑!”
“뭔 비둘기 주제에 산삼이야!”
하여간 이 새뀌 식탐이 보통이 아니라니까?
스윽.
인형설삼을 고운 천으로 감싸 품속에 집어넣었다.
[알림: <인형설삼>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천 년 묵은 산삼은 어떨까?
문득 든 호기심에 심안으로 인형설삼을 들여다보았다.
“헉!”
미, 미쳤다.
“이게…… 천 년 묵은 산삼???”
심안으로 들여다본 인형설삼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 * *
인형설삼에 대해 알아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인형설삼]
눈 덮인 설원에서 자라난 천 년 묵은 산삼.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기에 인형설삼이라 불린다.
분류 : 영약 (산삼)
등급 : 전설
효과 :
- +200레벨 (299레벨 이상에게는 효과 없음) (298레벨이 섭취 시 1레벨 증가)
- 내공 +3갑자 (음기)
- 무병장수
- 수명 +50년
주의사항 : 순수한 음기로 이루어진 영약이므로, 무턱대고 섭취했다간 얼어 죽는 수가 있다.
“미, 미쳤다.”
나도 모르게 미쳤단 소리가 절로 나온다.
무병장수와 수명 50년 증가는 그렇다 치고.
무려 200레벨이라니?
지금 내가 81레벨이니까, 이걸 먹으면 281레벨이 된다는 거잖아?
내공이 무려 3갑자나 오르고?
여기서 말하는 내공 1갑자란 인터페이스상에 표시되는 내공 1줄을 뜻한다.
1갑자가 수치상으로 내공 6,000이니까.
18,000이나 오른다고?
지금 내 내공의 총량이 2,000도 안 되는데?
이건 진짜 미친 거다.
판타지 서버에서도 이런 영약은 거의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이건 누구라도 눈이 돌아가겠는데?’
장담컨대, 인형설삼을 보고도 NPC를 돕는 데 쓸 게이머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래 사이트에 올린다 해도 최소 수십억 단위는 받겠지.
이거 한 뿌리에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고급 아파트나 빌라를 살 수 있다는 얘기다.
한강뷰가 보이는 곳으로.
‘카렐을 찾는 게 우선이지. 레벨이야 올리면 되고. 영약은 또 구하면 되지.’
물론 난 흔들리지 않는다.
은퇴하면서 더는 게임 아이템을 사고팔아 돈을 벌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 마음은 아직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길거리에 나앉지 않는 한.
게임으로 돈을 벌거나 돈을 쓸 것 같았으면 진작 현질부터 했지.
기왕 복귀한 김에 카렐도 찾고, 무자본으로 시작해 랭킹 1위를 찍는 것.
그게 내 목표다.
이미 내가 가진 경험들과 디버프 마스터의 스킬이 있는데 현질이 왜 필요해?
* * *
“갔던 일은 잘 되었느냐?”
인형설삼을 캐고 밖으로 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산신령이 물었다.
“예, 잘 됐습니다.”
“그럼 어서 가서 인형설삼을 서문란 그 아이에게 먹여 몹쓸 병을 치료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서둘러 가려는데.
“잠깐!”
“네?”
“심 봤다를 외쳐야지!”
“예……?”
“인형설삼을 캤으니 심 봤다! 하고 크게 외쳐야 할 것 아니냐! 그래야 내가 네 녀석에게 복락을 빌어주지!”
거 쪽팔리게.
“그냥 빌어주시면 안 되나요?”
“안 된다!”
“아! 왜요!”
“그게 법칙이야! 싫으면 마!”
하여간 영감탱이.
“시, 심 봤다?”
“더 크게!”
“심 봤다아?”
“목소리가 그것밖에 안 나오느냐! 더 크게!”
에라이.
해 준다, 해 줘.
“심-봤-드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까짓것 온 산이 떠나가라 소리쳐줬다.
[알림: 산신령이 당신의 복락을 빌어주었습니다!]
[알림: 일주일 동안 200레벨만큼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쩌, 쩐다.
200레벨이라니.
인형설삼을 캐서 버프의 강도도 센 건가?
“껄껄! 내려갈 때 조심해라! 이 산엔 무시무시한 것들이 많아! 노부가 다 도와줄 수 없으니 조심해라!”
“네! 감사합니다!”
산신령의 배웅을 뒤로하고 즉시 귀막골을 나서 혈붕절벽으로 향했다.
“뀨! 주인놈아! 고생했다! 얼른 가자!”
“그래!”
혈붕절벽에 도착하자마자 박혀 있는 말뚝에 밧줄을 묶고, 몸에 매달았다.
푸드덕!
저저!
의리 없는 새끼!
날짐승이라고 지 혼자 날아가는 거 봐라?
‘무림 서버엔 날개옷 같은 거 없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려가던 도중.
[알림: 3초 후 벼락이 떨어집니다!]
으응?
[알림: 3!]
[알림: 2!]
[알림: 1!]
아니 왜!!!
왜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
[알림: 잊지 마십시오!]
[알림: 우주의 법칙은 호시탐탐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알림: 우주의 법칙은 1주일에 1번씩 당신에게 <천벌>을 내립니다!]
야 이!
천벌을 내릴 거면 예고를 해!!! 예고를!!!
번쩍!
콰앙-!!!
벼락이 내리쳤다.
“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는데, 멀쩡하다.
뭐야?
아무 일 없잖아?
“헤헤.”
실실 웃음이 나왔다.
“안 맞았지롱~ 안 맞았지롱~ 안 맞았지롱~ 안 맞았…….”
와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절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하.
ㅆ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