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한바탕 피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난 뒤.
쿠웅!
뭔가 큰 소리가 나더니 몸부림치던 자전혈망의 몸뚱이가 잠잠해졌다.
“쿨럭! 쿨럭쿨럭!”
으으.
생각 없이 심장을 찔렀다가 터져 나온 피에 익사할 뻔했다.
[알림: 자전혈망을 처치하셨습니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축하드립니다!]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림: 82레벨 달성!]
[알림: 83레벨 달성!]
[알림: 84레벨 달성!]
[알림: 85레벨 달성!]
300레벨짜리 영물을 잡아서 그런지 엄청난 양의 경험치가 주어지며 4레벨이 한꺼번에 올랐다.
[알림: 새 스킬의 사용이 가능합니다!]
[알림: 지금부터 <천지개벽>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
85레벨을 찍었더니 광역기까지 생겼다.
[알림: 축하드립니다!]
[알림: 새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알림: <이무기 사냥꾼>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새로 획득한 칭호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무기 사냥꾼]
녹각혈망 이상의 이무기를 사냥했을 때 획득할 수 있는 칭호.
매우 영광스러운 칭호이므로, 어디 갈 때마다 동네방네 자랑하는 걸 추천한다.
분류 : 칭호
등급 : 전설
효과 :
- 이무기 형태의 적을 대상으로 피해량 150퍼센트 증가
- 이무기 형태의 적을 대상으로 받는 피해량 50퍼센트 감소
참고 : 이 칭호는 명예롭습니다!
크흑!
감격에 겨워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한다.
얼마 만에 명예로운 칭호를 획득한 건지 모르겠다.
복귀 이후 쓰레기 같은 칭호만 획득했었는데…….
‘일단 빠져나가자.’
산소가 부족한지 슬슬 숨이 막혀서 일단 자전혈망의 몸속에서 빠져나가기로 했다.
“뀨! 주인놈아!”
햄찌가 힘으로 자전혈망의 턱을 떠받쳐 내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주인놈아! 괜찮냐! 뀨!”
“나야 괜찮지. 좀 더러운 거 빼면.”
온통 위액 범벅에 피범벅이라 몰골이 말이 아니다.
“뀨! 저기 웅덩이 가서 좀 씻고 와라!”
“그래.”
햄찌의 말대로 오염되지 않은 웅덩이로 가 대충 몸을 씻었다.
아, 개운해.
“뀨! 주인놈아! 정말 고생했다! 뀨우! 자전혈망 해치웠다! 뀨!”
햄찌가 수건을 건네줬다.
슥, 스윽.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으며 햄찌에게 물었다.
“너 근데 어떻게 움직이냐? 뱀 앞이라서 못 움직이겠다며.”
“뀨! 주인놈 잡아먹힌 거 보고 화나서 무서운 거 극복했다! 뀨우!”
“그래?”
“뀨! 그렇다! 뱀 놈이 주인놈 잡아먹는 거 내버려둘 수 없다! 뀨!”
짜식.
그래도 의리는 있단 말씀이야?
“뀨! 어차피 주인놈 안 죽을 줄 알았다!”
“으응?”
“뱀 놈 멍청하다!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탈 나는 거 몰랐다! 뀨! 상한 거 먹었으니 배탈 나는 거 당연하다! 뀨우!”
“뭐 인마? 이게 진짜! 누굴 상한 음식 취급하고 있어!”
“뀨우?”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일이나 해라.”
“뀨? 주인놈 뭐 할 거 있냐?”
“해체해야지. 저게 얼마나 비싼 건데 그냥 두고 가냐?”
자전혈망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뭐 하나 버릴 게 없는,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
게이머로서 시체를 그냥 놓고 간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암, 그렇고말고.
* * *
“자.”
“뀨? 이거 그 객잔에서 뚱뚱이들이 쓰던 거 아니냐?”
“그래.”
햄찌에게 내민 칼은 다름 아닌 참골도.
인육 요리사 비돈·비저 형제가 쓰던 거다.
역시 언제든 쓸 데가 있다니까?
“뀨우우! 찝찝하게 이걸 어떻게 쓰냐!”
충분히 이해할 만한 반응이긴 하지.
사람 고기 손질할 때 쓰던 칼이니까.
“칼이 문제냐? 사람이 문제지?”
“뀨우?”
“인육 만들 때 쓰던 거라 나도 좀 찝찝하긴 한데. 날이 선 모든 날붙이들은 사람 죽일 때 쓰는 거야. 깨끗한 칼이랑 더러운 칼이 따로 있겠냐? 착한 사람이랑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거지.”
“뀨! 그건 그렇다!”
“그래도 좀 찝찝하긴 하니까 잘 씻어서 쓰자.”
“뀨! 알겠다!”
동굴에 고여 있던 물에 참골도를 깨끗하게 씻은 뒤 자전혈망 해체에 나섰다.
해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실 난 어지간한 도축업자보다 솜씨가 좋았다.
[기술숙련]
- 도축 (12성)
- 해체 (12성)
- 손질 (12성)
판타지 서버에서부터 온갖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도축하고, 해체한 경험이 있는 나다.
자전혈망 하나쯤 해체하는 건 일도 아니지.
나중에 정육점이나 차릴까?
[알림: <자전혈망의 비늘>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알림: <자전혈망의 가죽>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우선 비늘이랑 가죽부터 벗기고.
[알림: <자전혈망의 피>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알림: <자전혈망의 고기>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피는 가죽 주머니에 담고, 고기는 종이로 쌌다.
[알림: <자전혈망의 송곳니>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알림: <자전혈망의 이빨>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이빨도 모조리 뽑았다.
근데 금이빨 같은 건 없나?
[알림: <자전혈망의 눈>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알림: <자전혈망의 독액 주머니>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눈과 맹독이 든 주머니도 알뜰하게 챙겼다.
[알림: <자전혈망의 생식기>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짜식.
수컷이었군.
[알림: <자전혈망의 내단>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전혈망의 내단까지 확실하게 챙겼다.
[자전혈망의 내단]
자전혈망이 체내에 품고 있던 기의 결정체.
독액 주머니와 같이 맹독성의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섭취 시 1갑자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
분류 : 내단
등급 : 전설
효과 :
- 내공 +1갑자 (독기)
- 독 내성 +500
주의사항 : 맹독성의 내단이므로, 독기를 제어할 자신이 없으면 입에도 대서는 안 된다.
에이.
인형설삼만큼은 아니네.
살짝 실망감이 들었지만 700년 묵은 놈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란다 싶은 생각이 들어 투덜거리지 않기로 했다.
“쳇. 너무 일찍 잡았나.”
그냥 한 200년 더 묵어서 묵린혈망이 될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나,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든다.
쩝.
묵린혈망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야, 햄찌야.”
“뀨?”
“나 인벤토리 용량 부족하니까 네 주머니에도 좀 나눠 담자.”
내가 품속에 아공간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듯이 햄찌도 마법의 주머니라는 저장 공간을 지니고 있었다.
“뀨! 안 된다!”
“왜 안 돼?”
“햄찌도 용량 없다!”
“없긴 뭐가 없어! 너 용량 엄청 크잖아!”
“뀨우! 햄찌 진짜 용량 없다!”
“야, 그럼 이걸 다 놔두고 가냐? 이 아까운 걸?”
“뀨우! 그래도 안 된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돼!”
햄찌의 뒷덜미를 낚아채서 거꾸로 뒤집은 다음 탈탈탈! 털어 보았다.
그러자 햄찌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잡동사니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캬아아악! 주인놈아! 놔라! 안 놓냐! 놔라! 캬아아악!”
“어어? 계속 나와?”
“캬아아아아악! 놔라! 캬아아악!”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더니.
터니까 잡동사니들이 무슨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온다.
소방관 옷, 기모노, 경찰 제복, 스님 옷, 신부복, 드레스, 정장, 쫄쫄이, 잠옷, 군복, 츄리닝…….
뭐 이렇게 옷이 많아!!!
거의 수천 벌에 달하는 각양각색의 코스튬들이 쏟아져 나와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맞다.
이 자식 취미가 옷 갈아입는 거였지.
어쩐지 옛날부터 시도 때도 없이 옷 갈아입는다 했어…….
“캬아아악! 주인놈 지금 뭐 하는 짓이냐! 햄찌 소장품들 내다 버리는 거냐!”
“누가 내다 버린대? 새로 사 주면 될 거 아냐! 사 주면!”
“캬아아악! 한정판 코스튬도 있단 말이다! 캬아아아악!”
“그럼 한정판만 따로 챙기던가. 쓸데없는 건 좀 버려라, 제발.”
아니, 노란색 군용 깔깔이는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 * *
햄찌의 눈물겨운 희생 덕분에 자전혈망을 해체해 얻은 부산물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챙기는 데 성공했다.
“야, 햄찌야. 혹시 모르니까 나 운기조식하는 동안 호법 좀 서 주라.”
“뀨! 알겠다!”
일단 자전혈망의 내단을 입에 넣고 으적으적 씹었다.
자전혈망의 내단을 섭취하는 이유는 내공 때문만은 아니었다.
[심안 추가 통찰 효과]
디버프 마스터가 섭취 시 쇠약자멸진이 강화됩니다!
나름 700년 묵은 영물의 내단이라 그런지 내공뿐 아니라 스킬 강화 효과까지 있었다.
쓰다, 써.
알사탕이라도 가지고 다닐걸.
찌릿찌릿!
입 안에서부터 독 기운이 퍼지는지 벌써 혀가 얼얼해져 갔다.
오독오독!
내친김에 산적 소굴에서 훔친 백년하수오도 씹어 먹고.
벌컥벌컥!
최하급 공청석유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이윽고 반응이 왔다.
우웅!
단전에서부터 웅혼한 기운이 끓어올라 전신 혈도를 타고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이이이이!
고오오오오오오오오!
내단의 독기.
그리고 백년하수오와 최하급 공청석유의 기운이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휘몰아쳤다.
‘집중.’
포식대법을 이용해 그 모든 기운들을 흡수하면서, 우주근원진기를 통해 내공으로 탈바꿈시켰다.
포식대법과 우주근원진기가 워낙 고등한 스킬이라 그런지 흡수는 식은 죽 먹기였다.
[알림: 내공이 상승했습니다!]
[알림: 내공이 상승했습니다!]
[알림: 내공이 상승했습니다!]
[알림: 내공이 상승했습니다!]
[알림: 내공이 상승했습니다!]
(중략)
[알림: 내공이 상승했습니다!]
알림창이 주르륵 떠올랐다 사라지며 1갑자하고도 반 정도의 내공이 추가되었다.
[알림: 스킬이 강화되었습니다!]
[알림: <쇠약자멸진> 스킬이 강화되어 <황천독무> 스킬이 되었습니다!]
새로 얻은 스킬인 황천독무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황천독무]
독이라… 적을 약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일 터.
- 데우스
분류 : 액티브
레벨 : 6
효과 : 독안개를 뿜어내 주변을 장악하고, 적들을 중독시킵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 없음
참고 : 독을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스킬이 더욱 강화됩니다!
단, 만독불침의 경지에 오르기 전에 감당하지 못할 맹독을 섭취했다간 중독사 할 위험성이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굿.
내공도 야무지게 올렸고.
스킬 강화도 됐고.
이제 여길 빠져나가서 서문세가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네.
근데 길을 어떻게 찾나…….
자전혈망의 잔해를 뒤로하고 일단 걸어봤다.
조금 걷다 보니 세 갈래 갈림길이 나왔다.
“어디로 가야 되지?”
“뀨! 일단 아무 데나 가 보는 수밖에 없지 않냐! 뀨우!”
“그건 그렇지.”
가장 왼쪽에 자리한 길을 골라 쭉 걸었다.
“……이번엔 일곱 개냐.”
또 아무 길이나 선택해서 걸었더니, 이번에는 두 개짜리 갈림길이 나왔다.
걷고, 걷고, 또 걷고.
도대체 몇 시간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아, 햄찌야.”
“뀨?”
“우리 ㅈ된 거 같지 않냐?”
이쯤 되니까 슬슬 겁이 난다.
동굴 안은 무슨 미로처럼 얽히고설켜 있어서, 도저히 밖으로 통하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미니맵에도 아무것도 안 보이고.
인터페이스의 나침반도 아까부터 빙글빙글 도는 게 먹통이 된 지 오래.
‘설마 못 나가는 건 아니겠지?’
누가 나한테 잘 못하는 걸 하나만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길 찾기를 선택할 거다.
판타지 서버에서부터 인자기의 천리안이라는 아이템에 의지해 길을 찾는 습관이 들어 버려서, 내 힘만으로 길을 찾는 데 익숙하지가 않다.
게다가 게임 BNW는 게이머가 길을 잃어버리든 말든 시스템적으로 그 어떠한 지원도 해 주지 않는 게임.
때문에, 정말 재수 없는 경우 미궁 같은 곳에 갇혀서 수년 동안 빠져나오지 못하는 게이머들도 있었다.
실제로도 그런 케이스를 본 적도 있었고.
‘갇힌 건가…….’
그때.
푸드덕!
어?
힘찬 날갯짓 소리와 함께 꼬꼬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게 보였다.
“어? 꼬꼬야!”
“구! 구구구!”
설마…… 우릴 구하러 온 거야?
파닥파닥!
으응?
저건 뭔데?
박쥐?
박쥐가 하나, 둘, 셋…… 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열하나열둘열셋열넷…….
파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꼬꼬가 수만 마리는 족히 될 것 같은 박쥐들을 몰고 오고 있었다.
오, 오지 마!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으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