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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버프로 무림정복-96화 (96/115)

제96화.

“어르신……?”

천기자 영감님을 돌아보았다.

“이게 뭔 뜻이죠?”

내가 무슨 중국인도 아니고.

이렇게 한자로 써 주면 내가 어떻게 알아먹어?

“먼저 앞에 있는 글자 하나가 보이느냐?”

“허락할 허(許)요?”

“그렇다.”

“이게 왜요?”

“그것은 이 늙은이가 네 녀석에게 천기를 누설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아하?”

“다행히도 우리가 쌓은 공덕이 천기누설을 허락할 정도로 큰 것으로 인정을 받았구나.”

“당연히 그래야죠. 제가 얼마나 개고생했는데.”

장장 한 달이 넘는 퀘스트였지.

천기자 영감님을 찾는 것부터 해서 산적토벌, 요괴퇴치, 인형설삼, 자전혈망, 백련교와의 싸움, 그리고 기도까지.

퀘스트 하나 깨는데 뭐 이렇게 힘든지, 아주 진이 빠진다.

원래 이 게임이 이렇지만.

“그럼 그다음은요? 천하제일문 허공보합? 이건 뭔 뜻입니까?”

“우선 천하제일문이란…….”

천하제일문이란?

털썩!

천기자 영감님이 쓰러졌다.

“어? 영감님! 영감니이이임!”

“…….”

“영감니이이이임!”

당괴괴 영감님이 호다닥 달려와 천기자 영감님의 상태를 살폈다.

“큰 건 아닐세. 그저 너무 열심히 기도를 올리느라 기력이 쇠해서 그런 것이네.”

“아?”

“우리야 하루 다섯 시진밖에 기도를 안 했지만, 형님은 하루에 열한 시진을 기도하지 않았나. 한 주 동안 열한 시진을 기도했으니 기력이 쇠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무리하셨구나.

그럴 만도 하지.

“젊은 사람도 체력적으로 버텨내기 힘든 일인데, 늙은 몸을 이끌고 하려니 아주 죽을 맛이었을 게야.”

“아이고오.”

“얘기는 나중에 듣고 일단 형님부터 옮기세. 이러다 몸이 크게 상할지도 모르니.”

“그러죠.”

신탁 내용이 궁금하긴 했지만, 일단은 좀 참기로 했다.

탈진해서 쓰러진 노약자를 억지로 깨워서 물어볼 수도 없잖아?

어휴.

그나저나 제사 두 번 지냈다간 사람 잡겠네.

* * *

당괴괴 영감님은 천기자 영감님에게 탕약을 먹이고, 침까지 놔줬다.

덜덜덜!

근데…… 수전증이 저렇게 심한데 침을 어떻게 놓는 거야?

옆에서 봐도 신기해 죽겠다.

“맥을 짚어보니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금방 회복하실 게다.”

“고생하셨어요.”

“끌끌. 고생은 무슨.”

당괴괴 영감님이 히죽 웃더니 슬쩍 나를 잡아당겼다.

“잠깐 이리 좀 와 봐라.”

“예?”

“이리 와 보래도.”

당괴괴 영감님이 주변을 살펴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뭐야.

무슨 범죄라도 작당하는 줄 알겠네.

“이거 받아라.”

당괴괴 영감님이 품속에서 투명한 액체가 든 유리병 몇 개와 투박하게 생긴 주사기를 꺼냈다.

……무림에 주사기가 왜 있어.

“이게 뭔데요?”

“뭐긴.”

당괴괴 영감님이 히죽 웃었다.

“네 녀석이 부탁한 물건이지.”

“헉!”

“이 탕약은 말이다…….”

당괴괴 영감님이 짐짓 뿌듯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태로이도(獸太路而道)라고 한다.”

스, 스테로이드?!

[수태로이드]

사천당문의 비법을 이용해서 만든 남성용 자양강장제.

매우 순도 높은 양기를 품은 약이다.

분류 : 소모품 (주사액)

등급 : 희귀

효과 :

- 남성호르몬 +1,500

지속시간 : 30일

주의사항 : 전문의의 처방 없이 함부로 사용했다간 각종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으므로, 어지간해서는 손대지 않는 게 좋다.

참고 : 과거 이 약물이 무림인들 사이에서 유행한 적이 있었지만, 심한 부작용으로 인해 지금은 사용하는 이가 극히 드물다.

“이건 주사기라고 하는 물건이다. 서역에서 구해 온 것이지. 이 주사기를 이렇게 병 입구에 넣고 쭉 하고 빨아들이면.”

시범보일 필요 없어…….

나도 안다고…….

“이렇게 주사기 안에 수태로이도가 들어가게 되지. 그리고 이걸 여기 엉덩이에…….”

“어딜 만져욧!”

“어허! 얌전히 있어라!”

당괴괴 영감님이 내 바지를 내리더니 내 엉덩이를…….

드륵.

“천기자 어르신께서는 괜찮으신…….”

서문범이 덜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나와 당괴괴 영감님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아, 아무것도 못 본 것으로 하겠습니다.”

서문범이 재빨리 문을 닫고 나갔다.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푹.

천기자 영감님이 내 엉덩이에 주사기를 찔러 넣었다.

“허억!”

“크흐흐흐!”

“하윽, 허어억!”

“반응이 꽤나 정직하구나? 끌끌끌끌!”

“하윽… 흐아아악……!”

“역시 몸은 거짓말을 못하는구먼! 아주 정직한 엉덩이를 가졌어!”

아프다.

진짜 너무 아프다.

주삿바늘이 두꺼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냥 약 자체가 엄청 아픈 것 같다.

욱신욱신!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온다.

“이 수태로이도를 한 달에 한 번씩 엉덩이에 주사하면 부족했던 양기를 유지할 수 있을 게다.”

“그, 그렇군요. 아야야. 진짜 너무 아프네.”

“그리 아프냐? 노부가 문질러주랴?”

“어딜 만져욧!”

찰싹!

이 영감탱이…… 수상해???

[알림: 양기가 보충되었습니다!]

[알림: 양기가 보충되었습니다!]

[알림: 양기가 보충되었습니다!]

(중략)

[알림: 양기가 보충되었습니다!]

오?

그래도 효과는 빠르네.

[알림: 현재 근육량이 낮아 근력이 더 이상 상승할 수 없습니다!]

[알림: 수태로이도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도 높은 근력 운동이 필요합니다!]

[알림: 근력 운동을 통해 근육을 키워 보세요!]

하.

이젠 게임에서까지 운동하게 생겼네.

운동은 현실에서 하는 거로도 족하다고…….

“근육이 거저 생기는 게 아니니 앞으로는 밥 잘 챙겨 먹고 외공(外功) 위주의 수련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야죠. 흑흑.”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네?”

“어디 가서 이 수태로이도를 사용하는 걸 들키면 안 된다.”

“왜죠?”

“무림에선 금지된 약물이거든.”

“…….”

“옛날에 잠시 유행했던 시절이 있는데, 부작용이 너무 심해서 많은 무림인들이 몸을 망치고 은퇴했지.”

“그, 그렇군요.”

“요즘엔 이걸 사용하다가는 손가락질당하고 놀림거리가 되기 십상이지.”

“하아…….”

“물론 네 녀석이야 순수하게 치료 목적에서 사용하는 것이니 떳떳한 입장이긴 하다만, 고자라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것도 아니지 않느냐.”

주르륵.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남들에게 들켜서 좋을 게 없으니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사용하도록 해라.”

“……네.”

땅콩 없는 게 이렇게 서러운 일이구나.

띠링!

뭔데……?

[알림: 새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칭호 같은 거 주지 마…….

보나마니 또 놀릴 거면서…….

[로이도]

근육량 증가를 위해 약물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

분류 : 칭호

등급 : 일반

효과 : 없음

참고 : 이 칭호는 명예롭지 못합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고 스테로이드 사용자가 되어 버렸네.

아아.

가시밭길 인생이여.

* * *

그날 저녁.

“후우! 흐읍!”

“뀨! 주인놈아! 운동 그만해라!”

“응?”

“천기자 어르신 깨어났다! 뀨!”

“알겠어.”

곧장 운동을 멈추고 천기자 영감님을 만나러 갔다.

“왔느냐?”

“고생하셨습니다.”

“끌끌. 고생은 무슨.”

천기자 영감님이 웃었다.

“늙으니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로구먼.”

“쉬엄쉬엄하시지 그러셨어요.”

“쉬엄쉬엄했다가 하늘이 우리 부탁을 안 들어주기라도 하면 자네가 가만히 있었겠나? 끌끌끌!”

뜨끔!

어, 어떻게 알았지?

“에이~ 설마요~”

“설마는 무슨.”

천기자 영감님이 내게 눈을 흘겼다.

“아무튼, 하늘의 허락을 받았으니 해석을 들려줘도 괜찮을 걸세.”

“그래서 그 천하제일문 허공보합이 무슨 뜻이죠?”

“천하제일문은 파천황이 세운 문파일세.”

“파천황이라면…….”

어디서 들은 기억이 나는데.

아, 맞다.

예전에 제갈참 교관님이랑 처음 만났을 때 파천황에 대해서 잠깐 알아보긴 했지.

“그 300년 전에 활동했던 사람 아닙니까? 건곤합벽으로 다 때려 부쉈다던?”

“파천황을 아는 걸 보니 자네도 이곳 사람 다 됐구먼.”

“예, 뭐.”

나도 건곤합벽 할 줄 아는데…….

아직 사용할 수 있으려면 한참 멀었지만.

“하늘의 뜻에 따르면, 천하제일문으로 가서 허공보합이란 보패를 찾으라는군.”

띠링!

눈앞에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지금은 천하말석문]

내용 : 천하제일문을 찾아 귀주성 정안현으로 가보고, 허공보합을 찾아보자.

분류 : 서사 퀘스트 / 연계

진행률 : 0% (0/1)

보상 : 허공보합

제한시간 : 없음

참고 : 현재 천하제일문은 그 위치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수소문을 통해 소재지를 파악하도록 하자.

이거 퀘스트 내용이 좀 쎄한데…….

문파 이름은 천하제일문인데 지금은 천하말석문?

소재지가 명확하지 않아?

“문제는 천하제일문의 소재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일세.”

“왜죠?”

“천하제일문은 50년 전쯤 완전히 망해 버렸다네.”

“…….”

“파천황이 문파를 세웠을 당시 천하제일문의 위세는 그야말로 대단했지. 하나 파천황 사후에 그 무공을 제대로 이어받은 이가 없었다는 게 문제였네. 대를 거듭할수록 점점 쇠락할 수 밖에 없었지.”

“아.”

“그러다 한 50년 전쯤 홍건적들에 의해 초토화되면서 완전히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네. 아, 혹시 모를까 봐 말해 주자면 당시 천하제일문을 궤멸시켰던 홍건적 무리들이 지금의 백련교 놈들이라네.”

으득!

또 백련교야?

나랑 번번이 부딪치는 거로도 모자라서 이젠 퀘스트까지 방해하네.

강해지기만 해 봐라.

본진으로 쳐들어가서 아주 뿌리째 뽑아 버릴 테니까.

백련교 놈들이라면 씨를 말려버릴 테다.

“참 안타까운 일일세. 한때는 천하제일이었던 문파가 이제는 천하말석(天下末席)이라 조롱받다니.”

아.

말석이 꼴찌란 뜻이구나.

“이제는 소재지마저 불분명해서 더는 사람들의 입에도 오르내리지 않는구먼.”

“그래도 찾을 수는 있겠죠?”

“하늘이 일부러 자네를 엿 먹이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찾을 순 있을 걸세.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을 찾아가라 알려 주진 않았을 터이니.”

좀 불안한데.

빌어먹을 놈의 하늘.

심심하면 나 엿 먹이려고 작정했잖아.

“내 마지막으로 듣기를 귀주성 정안현에서 근근이 명맥이 이어가고 있다 했으니, 그곳으로 가서 천하제일문을 찾아보게.”

“그럼 허공보합은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성모낭랑(聖母娘娘)의 보패라고만 알고 있네. 하늘의 뜻을 미루어 짐작해봤을 때, 천하제일문에서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그렇군요.”

“허공보합의 생김새와 쓰임새는 나도 잘 모르니 직접 찾아보게. 자네가 가진 심안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걸세.”

“알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어르신.”

“끌끌. 뭘 이런 걸 가지고. 자네를 돕게 돼서 기쁘구먼.”

천기자 영감님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알림: <지금은 천하말석문>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부디 자네의 옛 부하를 찾기를 이 늙은이 또한 간절히 바란다네. 그…… 카래루라고 했던가?”

“카렐이라니까요! 카렐!”

“그래! 카래루!”

“카! 렐!”

“카! 래루!”

“카레에에에엘!!!!”

더 실랑이를 벌였다간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천기자 영감님의 방을 뛰쳐나가다가 누구와 부딪혔다.

말캉!

뭐, 뭐지?

이 느낌은?

본의 아니게 누군가의 품에 안겨버린 거 같은데…….

“오랜만이군요, 연오랑 교육생.”

헉?

“그간 잘 지냈나요?”

동창제독 견쌍섭.

두목님이 나를 품에 안은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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