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숙부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천만다행입니다!”
녹안독군(綠眼毒君) 당천위는 서문세가에서 큰 고초를 치르고 돌아온 당괴괴를 크게 반겼다.
사실 사천당문 역시 서문세가가 백련교에 의한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지원군을 보낸 바가 있었다.
다만 거리가 멀다 보니 미처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상황이 종료되었던 것일 뿐.
“끌끌!”
당괴괴가 웃었다.
“이 늙은이가 뭐라고 가주께서 그리 걱정을 하나? 끌끌끌! 별 탈 없이 돌아왔으니 된 게지.”
“아닙니다, 숙부님.”
당천위가 고개를 저었다.
“숙부님께서는 본가의 큰 기둥이 아니십니까?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조상님들이 굽어살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음!”
당괴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번에는 조상님들께서 이 늙은이를 보살펴주신 게 맞긴 하지. 아니, 정확히는 대 사천당문을 보살피고 계신 게 분명하네.”
“예?”
“가주.”
“예, 숙부님.”
“사실 이 늙은이가 이번에 큰 기연을 얻었다네.”
“기연이라 하심은…….”
“어쩌면 죽음의 꽃비를 구현해낼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네.”
“주, 죽음의 꽃비라면!”
만천(滿天), 온 하늘을 뒤덮는.
화우(花雨), 꽃의 비.
그것은 전설의 무공 만천화우를 가리킴이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숙부님? 이 조카에게 자세히 좀 설명을 해주십시오! 만천화우를 구현해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니! 그게 어인 말씀이십니까!”
“가주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늙은이가 서문세가에 들른 것은 천기자 형님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일세.”
“예, 숙부님. 계속 말씀해 주시지요.”
“허허. 거, 사람 참. 어찌 그리 성미가 급하단 말인가?”
“…….”
“진득하니 기다리게. 대 사천당문의 가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어찌 그리 독촉하는가.”
순간 당천위는 당괴괴의 타박에 어이가 없었다.
‘본가에서 가장 성질 급하신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닙니다만?’
평소 당괴괴가 얼마나 괴팍하고 성질머리가 불같은지 너무나도 잘 아는 당천위로서는 그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감히 숙부를 상대로 한 마디 쏘아붙일 수도 없고 해서, 당천위는 일단 꾹 참기로 했다.
‘그 성질 급한 숙부님께서 이리도 뜸을 들이시는 걸 보면 만천화우를 재현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결코 허언은 아닐 터.’
당천위는 사천당문의 가주답게 차분한 마음으로 당괴괴를 살살 달랬다.
“숙부님께서 말씀해 주시면, 이 조카가 경청해서 듣겠습니다.”
“끌끌. 가주께서 어지간히도 애간장이 타는 모양이군.”
“만천화우에 관한 이야기인데 어찌 애가 타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가주께서 그리 얘기하시니 말해 주도록 하겠네.”
“예, 숙부님.”
“어떻게 된 일이냐면…….”
당괴괴가 서문세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당천위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까, 그 연오랑이라는 소협이 어쩌면 만천화우를 구현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허어!”
“그 녀석은 천기자 형님께서 보증한 인물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천기자 형님께서 어디 허언을 하시는 분이시던가?”
“아니지요.”
당천위 역시 천기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만큼, 당괴괴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뜬구름 잡듯 명확하게 말해 주시지 않으실 때는 많으나, 말씀에 대한 신뢰도만큼은 절대적인 분 아닙니까?”
“그렇지!”
“천기자 어르신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어쩌면 그 연오랑이라는 소협이 정말로 만천화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말이 바로 그거라네!”
당괴괴가 신이 나서 말했다.
“게다가 녀석은 온몸에서 독무를 뿜어내기까지 했지!”
“독무까지……!”
당천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독무를 뿜어내는 것은 독공(毒功)을 전문적으로 익힌 사람들조차 어려워하는 상승의 경지.
가지고 있던 독을 푸는 것과, 내공을 이용해서 독을 만들어 내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오죽했으면 당천위조차 독무를 뿜어내는 경지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을까.
“독무를 뿜어내는 자가 만천화우가 가능하다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데, 믿지 않을 도리가 어디 있겠는가? 아니 그런가? 가주?”
“허어!”
“어쩌면 녀석은 자기 세계에서 독공과 암기술로 생사경(生死境)의 경지를 깨달은 존재일지도 모르네.”
생사경이란 현경의 다음 단계로서, 수천 년 무림 역사상 오직 무적천존만이 이룩했다고 전해지는 경지.
당장 화경만 해도 모든 무림인들의 꿈꾸는 꿈의 경지다.
현경을 깨달으면 천하제일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데 생사경이라니.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는 미지의 경지가 바로 생사경이었다.
“어떤가? 실전된 만천화우를 다시 재현해내고, 본가의 독공을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
당천위의 입에서 사천당문의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꿈꾸는 바람이 흘러나왔다.
* * *
현재 오대세가는 남궁세가, 사천당문, 구양세가, 하북팽가, 그리고 제갈세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무림세가의 근본을 꼽으라면, 누가 뭐래도 사천당문이었다.
사천당문은 가문의 역사로 보나 그간 배출해낸 고수의 숫자로 보나 오대세가 중 단연코 독보적인 이름값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사천당문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한물 간 가문 취급을 받고 있었다.
오랜 세월 무림의 풍파를 거치면서 만천화우가 실전되고, 강력한 독공들의 구결들도 명맥이 끊기면서 그 위세가 크게 꺾인 상황이었다.
독과 암기의 명가임에도 불구하고 만천화우가 없고, 독무를 뿜어낼 줄 아는 고수 하나 없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간신히 오대세가의 말석을 유지하면서도 최근 들어서는 모용세가와 황보세가에 그 자리를 위협받고 있을 지경이었다.
천하제일가는커녕, 오대세가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만도 벅찼던 것이다.
하지만 만천화우를 재현해낸다면…….
독무를 뿜어낼 수 있는 구결을 얻는다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은 물론 천하제일의 무림세가에 등극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늘 남궁세가에 밀려 만년 2인자 신세를 면치 못했던 사천당문.
그러나 만천화우를 재현하고 독무를 마음껏 뿜어낼 수만 있다면 결코 불가능은 아니었다.
실추된 가문의 명예와 땅에 떨어진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가 온 것이다!
두근두근!
멈춰 있던 당천위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천하제일가, 천하제일가…….”
당천위가 그 설레는 단어를 곱씹으며 당괴괴를 돌아보았다.
“숙부님.”
“말씀하시게.”
“그 연오랑이란 소협에게 본가의 명운이 달려있습니다.”
“알지, 잘 알지.”
당괴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내가 가주께 얘기하는 것 아니겠나? 껄껄껄!”
“앞으로 연 소협의 요구하면 뭐든 들어줘야 합니다. 간이고 쓸개도 다 빼줄 각오로 그를 접대해야 할 것입니다.”
“암, 그렇고말고. 우리 가문의 운명이 녀석의 손에 들렸으니, 당연히 그래야겠지.”
“즉시 가문의 모든 장로들과 가신들을 소집해 대책마련에 나설 것입니다.”
“잘하고 있네, 아주 잘하고 있어.”
“그리고…….”
당천위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연 소협의 의뢰는 백부님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당괴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품명장(天品名匠) 당도철.
사천당문 최고의 대장장이이자 중원 최고의 대장장이들 가운데 하나인 그에게 연오랑의 의뢰를 맡기기로 한 것이다.
* * *
귀주성 정안현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햄찌 녀석이 좀 빨라야지?
애초에 서문세가가 있는 호남성 고장현이랑 그리 먼 거리도 아니라서, 굳이 도약문을 타야할 필요도 없었고.
대명제국.
귀주성 정안현(正安縣).
거의 도착할 때쯤 눈앞에 현재 위치를 알리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고 계셨나요?]
현재의 귀주성은 대명제국의 행정력이 크게 미치지 못하는 지역으로서, 치안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인적이 드문 장소뿐 아니라 도시 한복판도 무법천지나 다름없으니 각별히 주의하세요!
친절하기도 하셔라.
근데 얼마나 치안이 안 좋으면 도시 한복판도 무법천지가 따로 없데?
치안 수준이 소말리아나 아프가니스탄 정도는 된다는 건가?
“야, 햄찌야.”
“뀨?”
“조심하래. 여기 치안 안 좋다고.”
“조심은 주인놈 상대하는 놈들이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뀨우?”
“그건 맞지.”
짜식.
오랜만에 맞는 말하기는.
“주인놈만큼 위험한 인간이 또 어딨냐! 뀨우!”
“그럼!”
“주인놈 뒤통수도 잘 치고! 뀨!”
“내가 뒤통수를 좀 잘 치긴 해? 헤헤헤!”
“거짓말도 잘하고! 뀨!”
뭐 인마?
“돈도 밝히고! 뀨! 사기도 잘 치지 않냐! 뀨! 심지어 폭력도 좋아한다! 뀨!”
“이게 진짜!”
니가 그럼 그렇지.
웬일로 바른말 하나 했다, 내가.
늘 그렇듯이 햄찌랑 티격태격하면서 정안현에 들어갔다.
‘어디 보자. 안내책자가…….’
없네.
안내책자가 비치되어 있어야 할 선반이 텅 비어 있었다.
얼마나 오래 관리를 안 했는지, 선반도 다 쓰러져 가기 일보 직전이다.
치안이 안 좋다더니, 입구부터 느낌이 팍 오는데?
“이 새끼가!”
“뒈져!”
“다 죽여 버려!”
좀 더 안쪽으로 들어와 보니 웬 건달들이 우정의 주먹다짐을 벌이는 풍경이 보였다.
헤헷.
사이가 좋아 보이네.
근데 니들은 대낮부터 쌈박질이나 하고 싶냐?
아주 정력들도 좋아요.
“어이! 소협! 잠깐 이리와 봐! 우리 가게에 좋은 물건이 많다고?”
“어머! 소협! 저희 기루에 놀러 와요! 어여쁜 기녀들이 참 많답니다!”
“거기 젊은 총각! 멈춰! 일단 보고가! 싸게 줄게!”
저잣거리에 들어서자마자 호객행위를 일삼는 상인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어 우릴 포위했다.
뭔 하이에나들이냐…….
스윽.
어쭈?
그 와중에 내 주머니에서 은자가 든 주머니를 빼가려는 소매치기까지 보인다.
‘치안이 안 좋다더니 진짜 개막장이잖아?’
저잣거리 입구에서부터 이러면 실태가 얼마나 심각할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야 이.”
“악!”
“어딜 손이 들어와.”
“크으윽!”
소매치기의 손모가지를 붙들고 힘을 빡! 줬다.
빠각!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소매치기가 부러진 손모가지를 붙들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죽을라고.”
소매치기를 향해 눈을 한번 부라려 주고, 녀석의 품속을 뒤져서 안에 있던 것들을 싸그리 털어먹었다.
에라이.
별거 없네.
“혀, 형님들! 이 새끼가 저 때렸어요! 형님드으으으을!”
풉.
친구들 부르는 거 보소?
소매치기 주제에 친구들을 불러봐야 뭐 얼마나…… 응?
홱! 홱! 홱! 홱! 홱! 홱! 홱! 홱! 홱! 홱! 홱! 홱! 홱! 홱…… 홱!
저잣거리를 지나던 사람들 중 거의 3분의 1 이상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날 노려보았다.
한 100명은 넘을 거 같은데……?
“네놈이 우리 동생을 때렸냐!”
“이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내 동생을 때렸으니 당장 치료비를 내놔라!”
“우리 애를 건드리고도 네놈이 사지 멀쩡하게 돌아다닐 것 같았냐? 가진 거 모조리 내놔!”
뭔 범죄도시야?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죄다 건달인 게 말이 되냐고…….
“어쭈!”
덩치 큰 건달 놈이 다가와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형님들이 말씀하시는데 듣는 둥 마는 둥 하시겠다?”
“놓지?”
이게 미쳤나…….
“크흐흐! 꼴에 무공이라도 한 수 익혔답시고 까부는 모양이로구나!”
꽈악!
“놓는 게 놓을 텐데. 너 죽어.”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
“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혀가 짧…… 컥!”
내 멱살을 틀어쥐었던 건달 놈이 갑자기 제 목을 움켜쥐고 괴로워했다.
철푸덕!
“컥! 커헉! 컥컥! 커어어억!”
쓰러진 놈이 입에 허연 게거품을 문 채로 몸을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었다.
“……꽥!”
그러더니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고는 잠잠해졌다.
거 봐.
죽는다 그랬지?
스으으으!
“할 말 더 있으신 분?”
황천독무를 뿜어내며 날 둘러쌌던 놈들에게 물…….
휑~~
응?
다 어디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