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버프로 무림정복-105화 (105/115)

제105화.

“정지, 정지, 정지.”

달려오던 개방도들을 가로막았다.

“연 소협이 아니시오? 한 푼 줍쇼.”

이춘삼이 날 알아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놈의 한 푼 줍쇼는.

컨셉이냐?

그나저나 고작 닭 세 마리 뺏겼다고 지부장까지 달려온다라…….

이게 맞아?

‘지부가 작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한편으로는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려니 했다.

정안현이 큰 도시도 아니고, 세력도 하오문에게 턱없이 밀린다는데 지부장 하나쯤 지지리 궁상인 게 뭐 대수라고.

자타공인 천하제일의 방파라는 개방치고는 영 모양 빠지는 모습이긴 한데, 직업이 거지라서 그런 거라고 이해하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네.

“천하제일문이랑 싸우러 오셨죠?”

“그렇소.”

“돌아가시죠.”

“음?”

“천하제일문에 볼일이 좀 있어서요. 자리 좀 비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럴 순 없소.”

이춘삼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는 본 방의 자존심이 걸린 중요한 문제요.”

자존심이라…….

“본 방의 방도들이 천하말석문 놈들에게 습격을 당했고, 재물까지 빼앗겼소.”

고작 닭 세 마리?

“이런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어찌 그냥 넘어가겠소이까? 천하말석문과 본 방은 몇 년 전부터 자주 마찰을 빚어 온 적대적 관계이기까지 하오.”

밥그릇 싸움이잖아, 그거.

물론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절대 아니지만.

중요하지, 중요한데.

거지들로 이루어진 문파 주제에 천하제일방이라니까 왠지 모르게 괴리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사건이 벌어진 이상 본인은 대 개방 정안현 지부의 지부장으로서, 천하말석문 놈들을…….”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소협, 편히 일 보시오. 본인은 이만 돌아가 볼 터이니.”

깡통에 은자 몇 개를 넣어 줬더니 이춘삼이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뭐 언제는 자존심 문제라며?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진짜 자본주의에 찌들대로 찌든 문파네, 개방은.’

절레절레.

어쩌면 이 세계에서 가장 자본주의에 충실한 놈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예! 지부장!”

나머지 거지들도 이춘삼을 따라 군말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누구 하나 반발하는 사람 없는 거 보면, 의견 일치가 아주 제대로 되는 모양이다.

심지어 저 무리들 중에서는 얻어맞은 사람도 있는 것 같던데.

깽값 받은 셈 치는 건가?

“지부장! 오늘 회식입니까?”

“소고기 먹으러 갑시다! 소고기!”

“오래간만에 싸구려 백주 말고 죽엽청이라도 한 병 까시죠!”

맞네.

깽값 받았다고 오히려 좋아하는 거였어…….

앞으로 개방도들을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왔다.

개방…….

자본주의의 노예…….

메모…….

* * *

개방도들을 돌려보내고 난 뒤.

“야, 꼬꼬야.”

“꾸륵?”

“너 가서 이것 좀 전해.”

쪽지에 각종 음식 좀 넉넉히 배달해 달란 내용을 적어서, 꼬꼬의 발목에 묶었다.

“시내 돌아다니다가 제일 맛있게 잘할 거 같은 집으로 가서 전해 줘.”

“구! 구구구!”

꼬꼬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푸드득! 하고 날아갔다.

“뀨! 주인놈아! 배달시키는 거냐! 뀨!”

“직접 갔다 오려면 귀찮잖아. 전서구 뒀다 어디 쓰냐? 이럴 때 쓰지.”

“뀨! 그렇다! 주인놈 똑똑하다! 배달의 민족이다! 배달의 민족! 뀨우!”

또 어디서 저런 말은 배워 와 가지고…….

“저어.”

응?

“어쩐 일이신지…….”

고개를 돌려보니 천하제일문의 대제자 유건명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밖에 소란스러워서 나와 본 모양이다.

흠.

유건명이라.

‘훤칠하니 잘생겼네. 인상도 좋고. 착하게 생겼어.’

아까 그 진영인이란 녀석을 다독이고 타일렀던 걸 들어서 그런지, 첫인상부터가 호감 가고 정감 가는 얼굴이다.

꾀죄죄한 것만 빼면.

“반갑습니다.”

유건명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연오랑이라고 합니다.”

“아, 연 소협이셨군요.”

“혹시 말씀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말씀이라 하심은…….”

“천하제일문을 찾아왔습니다.”

“아!”

“장문인을 좀 뵙고 싶은데요.”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좀 놀란 눈치다.

하긴.

망하다 못해 거지 신세나 다름없는 문파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랍겠지.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하기도 할 테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 쓰러져 가는 움막 안으로 들어갔던 유건명이 다시 나와 말했다.

“네? 기다려 달라고요?”

“장문인께서 의관을 정제할 여유를 부탁하셨습니다.”

“아, 예.”

한 10분쯤 기다렸나?

“만나 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천하제일문의 당대 장문인 양봉길이라 하외다. 누추한 곳에 손님을 모시게 되어 부끄러울 따름이오.”

그나마 깨끗한 무복으로 갈아입은 양봉길이 포권을 취했다.

떡이 진 머리도 빗고, 급하게나마 얼굴에 묻은 땟국물도 지운 흔적이 보였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손님이라고,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려는 모습이 보기 좋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지.

몰락한 문파의 장문인이 이 정도라면, 전성기 시절엔 어땠을지 짐작이 갔다.

“본인의 몸이 불편하여 일어나서 객을 맞지 못하는 것을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리오.”

아이고.

몸도 불편하신 양반이 옷까지 갈아입으시고…….

“연오랑이라 합니다.”

“연 소협이셨구려.”

내가 포권을 취하자 양봉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어쩐 일로 본문을 찾아오시었소?”

“찾는 물건이 있습니다.”

“찾는 물건이라…….”

“저는 허공보합을 찾고 있습니다.”

“허공보합……!”

“천하제일문에 허공보합을 찾을 실마리가 있을 듯해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허허.”

양봉길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 소협께선 어찌 허공보합을 찾으시오?”

“꼭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찾아야 하는 사람?”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자세히 설명하기는 힘드니까, 대충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만 이야기해 주었다.

‘생판 남인 나한테 뭘 믿고 나한테 허공보합을 주겠어. 진정성 있게 다가가야지.’

그런 내 마음이 통했는지, 양봉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 그랬구려. 드디어 인연이 닿았나 보오.”

“인연이요?”

“연 소협.”

양봉길이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문이 허공보합을 보유하고 있단 사실은 역대 장문인들에게만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오던 기밀사항이었소.”

“헉?”

“그것을 알고 왔다는 것부터가 인연이라 할 수 있겠지.”

오.

얘기가 술술 잘 풀리는데?

“또한, 그 천기자라는 인물은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으나 풍문으로는 들어서 알고 있소이다. 그는 하늘의 뜻을 엿보는 자라 하였소. 그런 그가 소협에게 본문을 찾아가라 하였으니, 사악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소이다.”

“맞습니다.”

“믿기는 힘들지만, 소협의 진정성 있는 사연 또한 본인의 마음을 움직이는구려.”

“장문인께서 알아봐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헤헤헤.

쉽게 가는구나.

허공보합을 받아서 바로 카렐을 찾으러…….

“허나 지금은 허공보합을 가지고 있지 않소.”

이건 또 뭔 소리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설마 또 뺑뺑이?

벌써부터 어질어질해지려고 한다.

“가지고 있으시지 않다 말씀하심은…….”

“지금의 본문은 허공보합을 지킬 힘이 없소이다.”

“아.”

이건 인정.

다 쓰러져 가는 움막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사는 마당에 허공보합 같은 보물을 지킬 힘이 있을 리가.

무공이라도 잘했다면 이러고 있을 리 없지.

“부끄럽게도 몰락할 대로 몰락한 본문이 어찌 허공보합을 지킬 수 있겠소이까? 부득이하게 숨겨놓을 수밖에 없었소.”

“그럼 혹시…….”

중요한 걸 물어보려던 참인데.

“계시오!”

“중화반점이오!”

“배달 왔소이다!”

배달이 벌써 왔네.

마침 나도 배고팠던 참이라, 일단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길 나누기로 했다.

* * *

“여기요.”

배달 온 일꾼들에게 은자를 넉넉히 줘서 보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음식들은 다 무엇이오? 연 소협?”

양봉길이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서 내게 물었다.

매일 끼니 걱정을 하다가 거의 20인분이나 되는 진수성찬이 눈앞에 쫙 깔렸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꼴깍! 꼴깍! 꼴깍! 꼴깍! 꼴깍!

벌써부터 침 넘어가는 소리들이 들린다.

“예, 장문인. 도움을 구하러 온 입장에서 형편이 어려운 천하제일문의 처지를 무시할 수 없어 우선 음식이라도 대접해 드리려고 합니다.”

“허허.”

“제 작은 성의이니, 같이 식사하시지요.”

닭 세 마리 가지고 일곱 명이서 나눠먹으려던 게 어찌나 안쓰럽던지.

그 와중에 유건명과 초아란은 닭에 손도 안 댔던 걸 생각하면…….

“때마침 저도 시장하던 참이라 함께 식사라도 할 겸 시킨 것이니, 장문인께서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으음.”

양봉길이 좌우를 슥 둘러보았다.

“…….”

“…….”

“…….”

천하제일문의 제자들이 차마 먹고 싶단 말도 못하고, 침만 꼴딱 삼키면서 양봉길의 눈치만 살폈다.

뚝, 뚝.

진영인, 왕춘식, 고덕룡 입에서 침 질질 흘러내리는 거 보소?

“연 소협의 성의가 있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소이까. 감사히 먹겠소.”

“예, 장문인. 드시지요.”

그러자 유건명이 몸이 불편한 양봉길을 대신해 젓가락으로 오향장육 한 점을 집어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제자 분들께서도 드시ㅈ…….”

깜짝이야!

제자들이 고삐 풀린 맹수처럼 일제히 음식을 향해 덤벼들었다.

양봉길과 어린 제자들을 위해 식욕을 꾹 참고 있던 유건명과 초아란마저도.

“촵촵촵촵!”

“쩝쩝쩝쩝!”

“우걱우걱!”

“와구와구!”

“후룩후룩!”

“옴뇸뇸뇸!”

“후릅후릅!”

제자들의 모습이 마치 굶주린 늑대 떼 같다.

“구와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악!”

눈이 완전히 뒤집혔는지, 허연 흰자위까지 드러내며 음식을 닥치는 대로 입에 쑤셔 넣는 중이다.

이, 이거 뭐야.

나 무서워…….

무슨 좀비들이 인육먹방하는 거 같다고…….

“뀨, 뀨우? 주인놈아? 우리 먹을 수 있는 거냐?”

“구! 구구구!”

그 식탐 강한 햄찌와 구구 녀석도 감히 천하제일문의 연회에 끼어들 엄두를 못 냈다.

“……우린 이따가 먹자.”

나 역시 저 아귀다툼에 낄 엄두가 도저히 안 난다.

밥은 이따 자전혈망의 고기나 구워 먹든지 해야겠다.

어차피 운동도 해야 되니까.

* * *

식사…… 가 아니라.

전투가 끝났다.

음식이랑 무슨 원수라도 진 것처럼 해치워 버리던데, 그걸 도저히 식사라고 볼 순 없지.

오죽 치열한 전투였냐 하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내가 입도 뻥긋 못했을 정도다.

반짝반짝!

아니, 도대체 얼마나 싹싹 긁어먹은 거야?

그릇에서 윤기가 흐르는 게 말이 돼?

그릇까지 핥아먹지 마…….

무슨 양념 한 방울 안 남기냐고…….

“연 소협 덕분에…… 끅!”

양봉길이 치밀어 오르는 트림을 가까스로 집어삼키며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에 배를 든든히…… 끅! 채웠소이다. 정말 감…… 끅! 사 하오.”

“아, 예.”

어떻게 콜라라도 사다 드려야 하나…….

“허면 연 소협께서는 허공보합이 필요하다 이 말씀이시겠소.”

“예, 필요합니다.”

이젠 본론을 이야기해도 되겠지.

“넘겨달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찾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만 잠시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으음!”

“대여료는 넉넉하게 챙겨드리겠습니다.”

“대, 대여료?!”

반짝반짝!

순간 제자들의 눈이 반짝였다.

윽, 따가워.

뭔 눈빛이 피부로 느껴지냐…….

별빛이 내린다~

샤라랄라랄랄라~

어디서 브금이 들려오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천하제일문의 보물을 빌리는 일인데, 응당 대가를 치러야죠. 공짜로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 그렇구려.”

“섭섭지 않게 충분히 챙겨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문파를 재건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요.”

“그게 정말이오?”

“물론입니다.”

까짓것 문파 하나쯤 재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뭐가 대수라고.

“선금부터 드리겠습니다.”

서문범으로부터 받았던 주머니를 양봉길에게 건넸다.

“이, 이건!”

주머니를 열어 본 양봉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놀랍겠지.

안에 금자가 잔뜩 들어 있으니까.

그 정도 액수면 어지간한 장원 하나쯤은 당장에 살 수 있을걸?

“허공보합,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양봉길이 대답했다.

“허공보합은 본문 지하에 자리한 보물창고에 보관되어 있소.”

“이 밑에요?”

내가 움막 아래를 가리키며 양봉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본인이 말하는 본문이란 지금은 떠나온 총타 장원을 뜻하오.”

“총타 장원이라면…….”

설마.

“혹시 그 버려진 건물 말씀하시나요? 흉가가 되어 버린?”

“그렇소이다.”

양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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