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사부는 999레벨의 히든 NPC.
판타지, 무림, 어반 서버뿐 아니라 아직은 서비스되지 않은 숨겨진 세계를 통틀어도 가장 강한 자.
무적의 힘을 손에 넣은 자.
이 게임 세계관에서만큼은 전지전능한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부족하다면 부족한 표현일 수도…….
사부는 흔해 빠진 일개 게이머였던 나를 디버프 마스터로 만들어 주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비록 NPC지만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에게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시고.
“사부님을 뵙습니다!”
족자 안의 노인이 사부님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즉시 대가리부터 박고 절을 올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아홉 번.
오래간만에 뵌 만큼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렸다.
옛날에 처음 사부님을 뵈었을 때도 아홉 번 절을 올리고 제자가 되었지.
[알고 계셨나요?]
<구배지례>란 본래…….
알아!
나도 안다고!
원래 구배지례라는 게 사문의 개파조사께 세 번, 사부의 사부님께 세 번, 그리고 사부님께 세 번 나눠서 하는 거잖아!
나도 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부님께 아홉 번 절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부님은 디버프 마스터라는 직업을 직접 창안한 장본인이라서, 개파조사이자 스승 그 자체란 말씀.
그 모든 공경의 의미를 담아 사부님한테만 아홉 번 절하는 거다.
그만큼 사부님이 대단하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이 게임 세계관에서 신조차 때려잡는 분한테 아홉 번 절할 수도 있는 거지.
99번이 아닌 게 어디야?
“감히 본좌를 보고 그냥 지나쳐?”
사부님께서 족자 안에서 슥 하고 걸어 나와 눈을 부라리셨다.
“저, 절대 아닙니다!”
후들후들!
두 다리가 떨리고.
주르륵!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까딱하면 죽어!’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캐릭터가 삭제될 수도 있다.
사부님은 규격 외 존재.
말 한마디에 나를 죽이고 살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귀, 귀신인 줄 알았습니다!!!”
“귀신?”
“예!!! 갑자기 족자가 움직이는 것 같아서 쫄았습니다!!!”
“흐음.”
사부님께서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보셨다.
“참말이렷다?”
“예!!!”
“그럼 특별히 이번 한 번만 봐주도록 하마.”
“가, 감사합니다!!!”
휴.
살았다.
하마터면 캐삭당할 뻔했네.
“그래도 본좌를 보자마자 구배지례를 박긴 박았으니 봐줄 구실은 생긴 것이겠지.”
“하하하…….”
“근데 네놈이 여긴 웬일이냐?”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모르겠다.
여긴 웬일이냐니.
“악!”
그때 저 멀리서 유건명이 내지른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조, 조사(祖師)님!!!”
유건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부를 바라보더니, 이내 풀썩! 기절해 버렸다.
쟤 왜 저래……?
“쯧쯧.”
사부가 쓰러진 유건명을 힐끔 보며 혀를 찼다.
“아무리 반쪽짜리라 한들 본좌의 후예들이 저 모양 저 꼴이라니. 에잉.”
사부님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역정을 내셨다.
잠깐.
반쪽짜리?
후예?
“사, 사부님?”
“왜 그러느냐?”
“방금 하신 말씀…… 제자가 잘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뭘 말이냐?”
“반쪽짜리는 무슨 말씀이시고, 본좌의 후예라는 말씀은…….”
“귓구멍이 막혔느냐?”
“……?”
“천하제일문은 본좌의 후예가 세운 문파다.”
“예?!”
이건 또 뭔 말씀이시지……?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져 버렸다.
* * *
“천하제일문이…… 우리 무적일맥이었습니까?”
무적일맥(無敵一脈).
디버프 마스터의 힘을 가진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림 서버로 따지자면 문파에 해당하는.
문파라 해 봤자 사부님과 나뿐이지만.
“무적일맥은 아니다.”
사부님께서 고개를 저으셨다.
“진정한 무적일맥은 본좌와 네 녀석뿐이다.”
“그럼…….”
“몇백 년 전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갓 무적의 힘을 손에 넣었을 때였다. 네 녀석도 알다시피 본좌가 그리도 이기고 싶었던 놈들은 이미 다 뒈지고 없지 않았더냐.”
450년 전쯤.
사부님께서는 젊었을 적.
당시 사부님은 그랜드 마스터, 그러니까 무림 서버로 치면 현경의 경지에 오른 강자셨다.
문제는 같은 시대에 사부님보다 강한 그랜드 마스터들이 7명이나 더 있었다는 것.
뇌신 바즈라.
검성 무르시엘라고.
대현자 지그하르트.
혈마 베르세르크.
법왕 마우그리스.
신궁 윈드포스.
그리고 패왕 브라움까지.
당시 판타지 서버는 사부님까지 해서 무려 8명이나 되는 그랜드 마스터들이 활동하는 시대였다고 했다.
당시 사부님은 그런 8인의 그랜드 마스터들 중 최약체로서, 수십 년 동안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들을 이기지 못하셨다.
거기에 충격을 받은 사부님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파타지 서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쿤룬산으로 들어가 폐관수련에 들었고, 결국 고행 끝에 무적의 힘을 손에 넣으셨다.
문제는 수련에 너무 집중하시다 보니 시간의 흐름마저 잊어버리셨다는 것.
무적의 힘을 손에 넣고 다시 세상으로 나와 보니 나머지 7인의 그랜드 마스터들이 이미 죽고 없어졌단다.
결국 그 한(恨)을 풀지 못하셨던 거다.
나중에 내가 7인의 그랜드 마스터들의 후예들을 모두 꺾어서, 간접적으로나마 한을 풀어 드리긴 했지만.
“놈들이 모조리 뒈져버렸다는 걸 깨닫자마자 본좌의 상대가 될 만한 강자들을 찾아 여러 차원을 떠돌아다녔느니라.”
“아?”
“이 세계도 그중 하나였느니라. 그때 당시에 천마니 뭐니 하는 허접한 놈들이랑 싸웠었는데, 별거 없었다.”
그, 그러시겠죠.
“그때 이 세계 사람들이 본좌를 뭐라고 불렀냐 하면…….”
설마.
“혹시 무적천존입니까?”
“그거 맞다.”
사부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놈들이 본좌를 그렇게 불렀지.”
“아하!”
역시 사부님.
무림 서버 놈들까지 박살내셨군요.
근데 시간대가 안 맞는데?
아니지.
생각해 보면 시간대가 일대일로 딱 맞아 떨어지지 않은 게 이상할 건 없지.
애초에 카렐이 죽은 건 4년 정도 전쯤인데, 무림 서버에서는 환생해서 충분히 성장했다고 했으니까.
“그럼 그때 제자를 거두셨던 겁니까?”
파천황이 사부님의 제자인 건가?
“제자는 무슨.”
사부님께서 피식 코웃음을 치셨다.
“싹싹한 놈이다 싶어서 수발이나 드는 수발 제자로 삼은 것이지, 진정한 무적일맥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적은 없느니라.”
역시.
아무리 다른 세계 사람이라지만 사부님께 진정한 제자가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 없지.
왜?
사부님이 인정한 진정한 제자는 나 하나뿐이니까.
“근데 오늘 보니 아주 가관이로다.”
사부님께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쓰러진 유건명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진정한 무적일맥이 아니라 한들, 본좌의 가르침을 받은 놈들이 이따위라니.”
따지고 보면 천하제일문은 우리 무적일맥에서 흘러나온 방계 문파니까, 사부님께서 언짢으신 것도 이해가 간다.
사부님이나 나나 무적일맥에 대한 자부심은 우주 제일이니까.
나도 슬슬 열이 받는데……?
“제자야.”
“예, 여기 있습니다.”
사부님의 부름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적일맥의 창시자로서 명하노니.”
“하명하십시오.”
“너는 무적일맥의 유일무이한 전승자이자 본좌의 제자로서, 천하제일문 놈들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개조시켜 다시 천하제일 문파로 만들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띠링!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다시 천하제일!]
내용 : 제자들을 훈련시켜 무적일맥의 일파인 천하제일문을 다시 천하제일의 문파로 만들어 보자!
분류 : 서사
진행률 : 0% (0/1)
보상 : 해당 없음
제한시간 : 해당 없음
경고 : 이 퀘스트를 소홀히 했다간 사부님께 단단히 혼쭐이 날 수 있으므로, 열과 성을 다해 목숨을 걸고 진행해야만 한다.
[알림: <다시 천하제일!>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아무렴.
누구 명령인데.
기쁜 마음으로 당연히 받들어야지.
당장 나조차도 천하제일문을 이대로 내버려둬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드는데.
“아무리 방계라고는 하나, 본좌의 가르침을 받은 놈들이 어찌 저리도 형편없단 말이냐? 본좌의 얼굴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일 것이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끄덕끄덕.
저 멀리 기절해 버린 유건명을 힐끔 쳐다봤다.
마음에 안 든다.
무적일맥의 방계가 저렇게 나약하다니.
딱 두고 봐.
아주 세포 하나하나까지 싹 바꿔 줄 테니까!
* * *
“제자야.”
“예, 사부님.”
“네 녀석도 이제 본좌의 마음을 알게 되겠구나.”
“예?”
“여태까지의 네 녀석은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었느니라. 그러나 이제는 입장이 다르다.”
사부님께서 내 어깨에 슬쩍 손을 올려놓으시며 말씀하셨다.
“이제 네 녀석도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구나.”
“아……!”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이참에 한번 경험해 보도록 하여라.”
그래, 그렇지.
여태까지의 난 누군가를 붙잡고 가르쳐본 적이 없지.
나 하나 성장하기에도 바빴으니까.
“단언컨대, 가르치는 것 역시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큰 기쁨 중 하나이니라. 본좌는 네 녀석이 그 기쁨을 누려 보았으면 좋겠구나.”
역시 사부님이시다.
내가 다 커서 머리가 한껏 굵어진 지금도 가르침을 내려 주시는 걸 보면.
“예, 사부님. 제가 반드시 천하제일문을 우리 무적일맥의 일파에 걸맞은 천하제일의 문파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좋다. 본좌가 한번 지켜보도록 하겠노라.”
사부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흡족한 표정을 지으셨다.
“허면, 본좌는 이만 가 볼 터이니 일 보도록 하여라.”
“예, 사부님. 살펴 가십시오.”
“끌끌끌.”
사부님께서 다시 족자로 걸어 들어가시며 한 마디를 툭 던지셨다.
“어디 한번 ㅈ뺑이 쳐 보도록 해라.”
“예……?”
“가르치는 게 얼마나 속 터지는 일인지 깨닫게 될 터이니. 끌끌끌.”
그 말을 끝으로, 사부님의 모습이 사라졌다.
“…….”
뭔가 찜찜한데?
ㅈ뺑이 한번 쳐 보라고?
가르치는 게 그렇게 힘든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본격적으로 가르쳐 본 적이 없으니까.
딱히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뭐, 일단 가르쳐 보면 알겠지.
괜히 백문이 불여일견이겠어?
“으음.”
때마침 유건명이 깨어났다.
“여, 연 소협.”
“일어났냐?”
무적일맥 일파의 제자라는 걸 알게 되니 대뜸 반말부터 튀어나왔다.
마!
내가 배분으로 따지면 너희 개파조사 누구야?
그 파천황인가 뭔가 하는 양반보다 높다고!
“언제까지 거기서 퍼질러 자고 있을래? 빨리 일어나.”
“예……?”
“빨리 일어나라고.”
“아, 예.”
유건명이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이거 다시 보니 어리바리하네?
영 마음에 안 들어.
천하말석문의 대제자일 땐 나름 괜찮은 놈 같더니, 한식구라고 생각하니까 폐급이 따로 없다.
“저어…… 연 소협.”
“응?”
“방금 족자 안에서…….”
“아아. 그건 신경 쓰지 마. 이따 가서 얘기해 줄게.”
“예……?”
“이따 가서 얘기해 준다고.”
유건명에게 인상을 팍! 써 보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돼지촌으로 가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저저 눈알 데록데록 굴리는 것도 어리숙해 보인다.
물론 내 태도가 180도 달라져서 당황한 것일 테지만.
일단 유건명을 데리고 보물창고로 떠나 밖으로 나갔다.
‘가서 자초지종부터 설명하고, 허공보합부터 찾자.’
그럴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웬 여인이 천하제일문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공자님들! 살려 주세요! 무서운 도적들이…….”
어?
“너, 너는!”
한령령이 날 알아보고 빽! 소리쳤다.
뭐야.
또 처녀귀신 너냐?
“어제 그 고자새끼?!”
빠직!
이마에 힘줄이 툭 튀어나왔다.
뭐?
고자새끼이?
이게 선을 넘어도 한참 넘네?
옆에 나름 사제인 놈도 같이 있는데?
“앗! 너는!”
유건명도 한령령을 알아보고 버럭 소리쳤다.
맞다.
천하제일문 제자들이 여기서 쫓겨난 이유가 쟤 때문이었지?
“두, 두고 보자!”
한령령이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쳐?
덥석!
“꺄악!”
한령령의 뒷덜미를 낚아채서,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즉시 한령령을 덮쳐 다리를 움켜쥐고 레슬링 기술 중 하나인 피겨 포 레그락을 걸었다.
“아? 어제 두 번 뒈지셨지? 오늘로 세 번 뒈질 줄 알아! 뒈져, 뒈져어어어!”
꽈아악!
으드드득!
“꺄아아아아악!”
한령령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