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뜬금없이 불려온 당석영은 당천위와 당괴괴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문득 불안해지고 말았다.
뭔가 큰 짐을 짊어지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소가주인 당석영은 장차 사천당문의 가주가 될 사람이었기에, 이미 두 어깨가 매우 무거운 입장이었다.
하여, 부담을 짊어진다는 것은 그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뭔가 달랐다.
자신을 바라보는 당천위와 당괴괴의 눈빛에 실린 기대감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석영아.”
“예, 아버님.”
“내 너를 이리 급히 부른 이유는, 긴히 할 말이 있어서다.”
“하명하십시오, 아버님.”
“너도 알다시피, 너는 본가의 소가주로서 가문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이 아니더냐.”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이미 소가주로서의 어깨가 무거운 것은 익히 알고 있다마는, 본가의 미래를 위해 더욱 막중한 임무를 부여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다오. 부디 이 아비를 탓하지 말거라.”
“본가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무슨 임무인들 못하겠습니까? 편히 하명하십시오.”
“숙부님과 함께 귀주성 천하제일문으로 가서 연오랑이란 소협을 만나라.”
“연 소협은 어떤 사람입니까? 소자가 견문이 짧아…….”
들어보지 못한 이름에 당석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지간한 젊은 후기지수들은 죄다 궤고 있을뿐더러, 실제로 친분도 있는 당석영조차 연오랑이란 이름은 금시초문이었다.
“연 소협은 강호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아니다.”
“한데 어찌…….”
“그는 어쩌면 만천화우의 심득과 독무의 구결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
당석영은 당천위의 말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어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무명소졸이 사천당문의 실전된 절기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정말이지 터무니없게만 들렸던 것이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하나 이건 매우 신뢰도 높은 정보에 의한 것이다. 무려 천기자 어르신께서 연 소협의 신변을 보장하셨으니, 너는 믿어도 좋을 것이다.”
“천기자 어르신께서……!”
“석영아, 가문의 미래가 네 손에 달렸다.”
당천위가 당석영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앞으로 연 소협의 곁에서 머무르며 만천화우의 심득과 독무의 구결을 배워 올 수 있겠느냐?”
“아버님, 만천화우의 심득과 독무의 구결을 얻을 수만 있다면 개방 거지의 발바닥인들 핥지 못하겠습니까? 소자 반드시 연 소협으로부터 배워 오도록 하겠습니다.”
“크핫핫핫핫핫!”
당천위는 당석영이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자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기꺼워했다.
아들이자 소가주인 당석영이 이렇듯 결연한 모습을 보여 주니, 아비로서 정말이지 듬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껄껄껄! 아주 믿음직스럽구먼! 껄껄껄!”
당괴괴 역시 그런 당석영이 기특하다는 듯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흠.’
당괴괴는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오랑이 녀석의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던데. 석영이가 잘 버틸 수 있을는지 모르겠구먼. 쩝. 허구한 날 두들겨 맞는 건 아닌지…….’
연오랑을 직접 겪어 본 당괴괴로서는 당석영이 못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천인치고도 성질머리가 고약할뿐더러 성격도 자유분방한 데다가, 어딘가 모르게 살짝 삐뚤어진 인성의 소유자.
그런 놈의 비위를 맞춰 가면서 살살 구슬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두들겨 맞지는 않을지언정,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게 분명했다.
그래서 당괴괴로서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고, 한편으로는 측은지심마저 들었다.
어쩌면 장차 가주가 될 아이에게 못 할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만천화우와 독무의 재현을 위한 일.
소가주라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의무였기에, 당괴괴는 애써 죄책감을 털어내려고 노력했다.
다음 날.
당괴괴와 당석영은 연오랑에게 줄 약재들과 그가 의뢰했던 물건들을 가지고 당문을 떠나 귀주성으로 향했다.
‘반드시 만천화우의 심득과 독무의 구결을 배워 와 당당하게 금의환향할 것이다!’
당문을 떠나는 당석영은 포부에 부풀어 있었다.
* * *
“츄릅!”
흉가 안에 떨어져 있을 게이머들의 랜덤드랍 아이템을 챙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군침이 줄줄 흘렀다.
“뀨! 주인놈아! 언제 쳐들어가냐! 뀨우!”
“지금.”
흉가?
다른 게이머들한테는 어려울지 몰라도, 나한테는 아니다.
일단 각 흉가의 보스라고 할 수 있는 처녀귀신들의 섭혼술이 나한테는 안 통하니까.
탈모귀들이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그마저도 방천가위 덕분에 쉽고.
즉, 흉가야말로 날로 먹는 사냥터였다.
다른 사냥터들에 비해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막대한 양의 경험치를 챙길 수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그런 땅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들어가는 데 있어 망설일 이유가 없지.
통통통!
“포로패시아(捕虜敗時啞)! 포로패시아(捕虜敗時啞)!”
“포로패시아(捕虜敗時啞)! 포로패시아(捕虜敗時啞)!”
“포로패시아(捕虜敗時啞)! 포로패시아(捕虜敗時啞)!”
흉가에 들어가자마자 탈모귀들이 괴상망측한 주문을 외우며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푹, 푸욱!
방천가위를 꺼내 탈모귀들을 터뜨려 죽였다.
“구! 구구구!”
푸드덕!
꼬꼬도 맹렬히 회전하면서, 부리로 탈모귀들을 꿰뚫어 죽였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중략)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탈모귀들이 풍선 터지듯 펑! 하고 터져 죽을 때마다 경험치가 쑥쑥 올랐다.
[알림: <탈모귀의 두피>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인피면구 제작에 필요하다는 재료템도 착실히 챙기던 도중.
“이 어리석은 놈.”
거대한 덩치를 지닌 처녀귀신이 나타나 귀화가 번뜩이는 두 눈을 빛냈다.
“아주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호호호! 이리 오렴. 누나가 안아 줄게.”
“…….”
“이리 오라니까?”
“…….”
“이리 오라고!”
처녀귀신이 계속해서 섭혼술을 시도했지만, 고자인 내게 통할 리 없었다.
조금 전 게이머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몰살시켜 버릴 수 있었던 그 강력한 군중제어기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짓거리가 되어 버린 거다.
“네, 네놈.”
처녀귀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놈은 사내가 아니로구나?”
“큭.”
이거, 이거.
그만 들켜 버렸네?
“그래, 나 고자다. 어쩔래.”
“역시! 내 섭혼술이 통하지 않더라니!”
“지금부터 고자한테 어디 한번 뒈지게 쳐 맞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처녀귀신을 응징하려는데.
“소소 언니!”
어느새 나타난 한령령이 처녀귀신을 향해 소리쳤다.
소소?
저렇게 기골이 장대한데?
“령령아! 네가 여긴 어찐 일이야? 아버지께서 주신 임무는 어찌하고?”
“언니, 사실은…….”
한령령이 소소라 불린 처녀귀신에게 귀왕이 벌인 사기극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 그게 정말이니?”
소소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신 거였니?”
“네, 언니.”
“믿을 수 없어…….”
소소가 고개를 푹 떨궜다.
그녀 역시 한령령처럼 귀왕에게 속아 악행을 벌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흑흑, 흑흑흑.”
운다, 울어.
“그 말을 믿고 끔찍한 악행들을 저질렀는데… 흑흑흑…….”
차마 보고 있기가 힘들어서, 게이머들이 떨구고 간 랜덤드랍 아이템들을 줍기 위해 자리를 피해 주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연 소협.”
소소가 말했다.
“저도 연 소협을 따라가겠어요. 부디 저를 거두어주세요.”
“귀왕의 정체는 모르시고?”
“네.”
“그럽시다.”
귀왕의 정체나 행선지를 모른다고 하니 아쉽긴 했지만, 어쨌거나 데려가 갈라니 그러기로 했다.
업고 가달란 것도 아니고, 유품만 챙겨서 가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뀨! 주인놈아! 허탕이냐!”
“첫술에 배부를 수 없잖아.”
“뀨! 그건 그렇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긍정적으로.”
딱히 손해 볼 건 없다.
앞으로 흉가를 몇 개나 털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경험치도 얻고 각종 재료템도 얻게 될 테니까.
퀘스트만 생각하면 엄청난 뺑뺑이에 노가다였지만, 성장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꽤 괜찮은 여정이었다.
어차피 레벨도 올려야 하는데, 그러려거든 사냥은 불가피한 일이다.
가만 엉덩이 붙이고 있는데 레벨이 저절로 오를 리도 없고.
* * *
계속해서 귀주성 곳곳을 이 잡듯이 뒤지며 흉가란 흉가는 다 찾아다녔다.
막상 본격적으로 흉가를 찾아다니기 시작하자, 귀왕의 딸들이 있는 곳들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이곳 귀주성 일대는 귀신이 출몰하는 흉가 사냥터로 유명한 지역이라서, 게이머들 간에 정보 교환이 곧잘 일어나는 곳이었다.
인피면구를 제작하기 위해 일부러 귀주성을 찾는 게이머들이 꽤 있기에, 무림 서버 관련 커뮤니티에 흉가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곧장 공유되고 있었던 거다.
덕분에 흉가를 찾는 건 쉬웠고, 그때마다 사냥터를 싹쓸이하다시피 하면서 귀왕의 딸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 결과.
[알림: 88레벨 달성!]
[알림: 89레벨 달성!]
[알림: 90레벨 달성!]
(중략)
[알림: 95레벨 달성!]
10번째 흉가를 털었을 무렵 95레벨을 찍었고.
[알림: <압제신기> 스킬이 해금되었습니다!]
“크으.”
스킬 해금은 언제나 반갑고, 즐거운 일.
하지만 이번만큼은 더더욱 반가웠다.
압제신기(壓制神氣).
본래 명칭은 압제자의 파동.
디버프 마스터가 가진 스킬들 중에서도 어쩌면 가장 가치 있을지도 모르는, 특정 대상들에게는 사실상 죽음이나 다름없는 무시무시한 능력이다.
옛날에 이 스킬로…….
오싹!
갑자기 몸에 한기가 돌았다.
헉?
설마 또 독감인가?
[알림: 상태이상!]
[알림: <상태이상 : 한기>에 걸렸습니다!]
[알림: 오한이 듭니다!]
[알림: 캐릭터의 성능이 10퍼센트 떨어졌습니다!]
[알림: 음기가 강한 물건들을 너무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봤더니, 처녀귀신들의 유품을 너무 많이 지니고 있어서 생긴 부작용인 것 같다.
한두 개면 모르겠는데, 10개나 지니고 있으니 귀기(鬼氣)에 몸이 버티질 못하는 모양.
“……이 빈틈없는 새끼.”
한령령 포함 11명이나 되는 처녀귀신들 중 귀왕의 정체나 현재 위치에 대해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하긴. 고레벨 NPC들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릴 테니까. 혹여 악행이 드러나더라도 재빨리 도망갈 수 있게 보안유지에 철저한 거겠지.’
무림 서버는 이른바 자칭 협객이라 불리는 NPC들이 어디 때려잡을 마두 없나, 하고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돌아다니는 곳.
어쭙잖은 재주로 악행을 벌였다간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자칭 협객 놈들에게 토벌당하기 일쑤.
무당파가 그쪽 방면으로는 도가 텄다던데…….
‘속는 셈치고 뺑뺑이 쳐 주긴 했는데, 레벨도 많이 올렸으니까.’
귀주성에 흉가가 몇 개나 있을지 모르고, 귀왕의 딸이 앞으로 몇 명이나 더 있을지 모르는 상황.
계속 이런 식이라면 몇 개월 내내 흉가 탐방만 할 것 같다.
납량특집도 한철이지, 1년 내내 공포물을 볼 순 없잖아?
‘생각을 하자.’
이쯤 했으니까 오래간만에 추리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처녀귀신들 증언으로는 하나 같이 눈 떠 보니 귀신이 되어 있었다는데…….’
머릿속에서 생각의 촉수가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잠깐.’
뭔가 좋은 생각이 났다.
“다들 나와 봐.”
처녀귀신들을 불러다 모여 앉혀 놓고, 그들에게 차근차근 물어보았다.
“너희 살아생전 어디 살았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
우선 피해자들의 증언부터 모아보기로 했다.
“저는 금사현에서…….”
“저는 준의현…….”
처녀귀신들이 차례대로 자신의 출신지, 사망 당시 나이, 사망지, 사망원인, 자신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매장지 등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그러던 중.
‘어?’
공통점을 발견했다.
‘인회, 대방, 필절, 대방.’
처녀귀신들이 사망한 장소가 금사현을 중심으로 한 다섯 개 현이다.
‘금사현을 중심지로 놓고 보면 이 지역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건데…….’
조금만 더 생각을 해 보자.
거의 다 온 것 같으니까.
‘귀신을 만들어서 부리려면 장소가 은밀해야 할 거고. 보는 눈이 없어야 되겠지. 한을 품고 죽은 사람의 사연도 알아야 하고. 그럼 가까운 사람이라는 건데. 처녀귀신들은 생판 모르는 남이니까, 가까운 사람도 아냐. 뭐지? 망자의 사연까지 알 수 있는 부류가…….’
촉이 왔다.
“아!”
깨달았다.
“뭐 알아낸 거라도 있어요?”
한령령이 내게 물었다.
“장의사.”
“네?”
“귀왕은 장의사일 가능성이 제일 높아.”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