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귀왕이 장의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내 추론은, 꽤나 근거가 명확했다.
“왜 귀왕이 장의사라는 거죠?”
“들어 봐.”
자, 이제 설명 들어갑니다.
“여기 다 살아생전 일면식도 없는 남남이잖아? 근데 또 사는 지역은 가깝고.”
“맞아요.”
“그럼 귀왕은 금사현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
끄덕끄덕-
한령령을 포함한 처녀귀식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추론에 동의를 표시했다.
무슨 학생들 모아 놓고 수업하는 거 같네.
아무튼.
일단 지역은 특정했고.
“자, 누가 죽었대. 근데 죽은 사람이 한을 품고 죽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아무리 정보를 열심히 수집한다고 해도, 유가족들이나 주변인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직접 듣기가 쉬울까? 상식적으로?”
도리도리-
처녀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사인(死人)을 말한다는 건 문화적으로도 터부시되는 행위.
외부인으로서는 쉽게 알아내기 힘든 정보였다.
특히나, 살아생전 한을 품었는지 품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의 눈으로 감시한다고 해도,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처녀귀신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기구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더욱.
“자, 그럼 유족들이 쉬쉬하는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는 부류가 뭐가 있을까?”
“아!”
한령령이 알아들었다는 듯 탄성을 자아냈다.
다른 처녀귀신들 역시도 내 추론에 100퍼센트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의사라면 유족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몰래 엿들을 수도 있겠네요!”
“정답.”
하지만 이것 하나만으로는 결정적인 설득력이 없지.
중요한 건 그 다음.
“장의사들은 망자의 사연을 엿듣는 것도 가능하고, 남들이 들여다보지 않는 은밀한 장소에서 망자를 귀신으로 만드는 대법(大法)을 부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아!”
“유품을 슬쩍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테고?”
처녀귀신들이 깃든 유품들은 살아생전 가장 아끼던 물건으로, 유족들이 관 속에 넣어 준 부장품.
외부인이 그걸 슬쩍하려면 공동묘지를 도굴해야 할 테니, 그 역시 쉬운 일은 아닐 거다.
“맞아요!”
“그리고 장의사가 아닌 제3자가 그런 짓을 했다간 일단 시신부터 사라져서 난리가 날 테니까.”
“맞는 말씀 같아요!”
물론 억지로 한을 품게 만들어서 죽인 뒤 처녀귀신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드는 노력과 시간이 너무 커서, 이렇게 많은 처녀귀신들을 만들어 내기 불가능에 가까울 거다.
“귀왕은 장의사이거나, 혹은 장의사에 깊게 관련된 인물이야.”
“그렇겠네요.”
“금사현을 중심으로 장의사들을 찾아가 보면 귀왕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최소한 귀왕과 연결되어 있는 공범은 잡을 수 있을 거야.”
“연 소협은 정말 똑똑하시군요.”
한령령과 처녀귀신들이 다시 봤다는 듯 나를 칭찬했다.
“뀨! 주인놈아! 다시 지능 돌아왔냐! 뀨!”
“뭐 인마?”
“주인놈 예전엔 똑똑했는데 요즘 감 많이 죽은 것 같았다! 뀨우! 근데 지금 보니 아직 안 죽은 거 같다! 뀨!”
“조용히 해라.”
팍 씨.
또 끼어들어서 찬물을 끼얹네.
하여간 이놈의 쥐새끼…….
[알림: <흉가탐방>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그래, 이거지.
BNW는 정형화된 퀘스트만 툭, 하고 던져 주는 게임이 아니다.
퀘스트 하나를 진행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연계, 파생 퀘스트가 발생하는 데다가 진행방식 역시 다양하다.
그래서 퀘스트를 수행하다 보면 이런저런 난관에 부딪히기 마련인데, 그럴 때는 추리력을 발휘하는 것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무슨 로봇처럼 퀘스트창이 시키는 대로만 해서 다 되는 게임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 그럼 장의사들을 만나러 가 보자.”
“좋아요, 연 소협.”
“다들 헤쳐 모여!”
내 말에 처녀귀신들이 일제히 흩어지더니, 자신들의 유품으로 되돌아갔다.
“뀨! 주인놈아! 그럼 이제 장의사들 조지러 가는 거냐!”
“멀쩡한 장의사들은 왜 조지냐?”
“뀨우? 문부터 때려 부수고 들어가서 패고 보는 거 아니었냐! 뀨우!”
“내가 깡패냐? 나쁜놈만 골라내서 조질 거거든?”
가끔 드는 생각인데, 할 수만 있다면 햄찌 녀석의 머리를 열어서 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도대체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 * *
즉시 햄찌를 타고 장의사들을 찾아 나섰다.
첫 번째 장의사를 만나기 전.
“니들은 여기 있어.”
“뀨?”
“꾸륵?”
“괜히 의심 받잖아. 이상한 놈이라고.”
녀석들은 다 좋은데 같이 다니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게 문제라, 각자 움직이는 게 나았다.
‘위장부터 좀 해야겠지.’
인피면구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하필 덕팔이 아저씨한테 빌려주는 바람에 아쉽게 됐다.
우선 싸구려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이것저것 흙도 좀 바르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헝클어뜨렸다.
위장을 하는 이유는 혹시나 장의사가 귀왕일지도 모르니까, 경계심을 풀기 위해서였다.
젊은 무림인이 접근해 오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이것들 좀 가지고 있어.”
“뀨우?”
“덜컥 귀왕을 만났는데 처녀귀신들의 유품을 가지고 있으면 귀기 때문에 걸릴 수도 있잖아. 놓고 가야지.”
“뀨! 알겠다! 주인놈 철두철미하다! 뀨!”
햄찌에게 처녀귀신들의 유품까지 맡겨 놓고, 장의사들을 만나러 다녔다.
“어찌 오시었소?”
“곧 집안에 상이 있을 것 같아 찾아왔습니다.”
“그렇소이까? 일단 들어오시구려.”
처음 만난 장의사는 늙은 노인이었는데, 심안으로 살펴본 결과 딱히 특이사항이 없는 평범한 NPC였다.
‘여긴 아니네.’
대충 급한 일이 있어 가 봐야겠다고 둘러대고 다른 장의사를 찾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할 만하지.’
장의사가 그리 흔하지도, 많지도 않은 직업이라 둘러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귀주성 전체에 흉가가 수백 개쯤 될 테지만, 금사현 일대에 장의사라 해 봐야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흉가탐방만큼 노가다는 아니란 말씀.
2~3일이면 일대의 모든 장의사들을 만나 볼 수 있을 테니까, 느긋하게 진행하면 그만이다.
‘오늘 못 찾으면 내일은 찾겠지.’
그런 생각으로 몇 군데를 더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됐다.
‘여기까지만 찍고 로그아웃해야지.’
그 장의사는 마을로부터 한참 떨어진 외딴곳에 살고 있었는데, 상당히 젊어 보였다.
“여기 장의사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는데요.”
“예, 들어오십시오.”
여러 말 섞을 것 없이 여태까지 해 왔던 것처럼 심안을 이용해 그 장의사를 들여다보았다.
[이무옥]
장의사.
타입 : NPC
종족 : 인간
성별 : 남
나이 : 21
레벨 : 7
등급 : 해당 없음
직업 : 장의사 (자영업자)
특징 : 젊은 장의사치곤 솜씨가 좋고 가격이 저렴해 상당히 인기가 많다.
칭호 :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역시 특별할 건 없는 평범한 장의ㅅ…….
[심안 추가 통찰 효과]
레벨 : 200
소속 : 귀왕문
직위 : 문주
등급 : 절정
직업 : 술법가
특징 : 사악한 술법가로서, 귀왕문의 문주이니 상대할 때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씨익, 마음속에 미소가 떠올랐다.
잡았다, 이 새끼.
* * *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어쩐 일로 오긴.
너 때려잡으러 왔지.
“아, 예. 집안에 조만간 상이 있을 듯해 찾아왔습니다.”
“그러시군요.”
“먼 친척인데, 아주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처자가 있습니다. 병이 깊어 오늘내일하는 상황이니, 준비를 좀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처자 말씀이십니까?”
이 새끼 표정 봐라?
겉으로는 안타깝다는 표정인데, 그 안에 담긴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얼굴에 다 쓰여 있다.
이게 무슨 횡재야, 하고 좋아하는 게 훤히 보인다.
“먼 친척분이 이리 오셨을 정도면 얼마나 기구한 사연을 지닌 분이신지 짐작이 갑니다.”
“그렇지요.”
“사정이 그러하니, 제가 특별히 장례비용은 받지 않겠습니다.”
귀왕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덕을 베풀자는 차원에서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망자들을 무료로 모시기도 했는데, 잘 찾아오셨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순간 뱃속 깊은 곳에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
겉으로는 이렇게 위선을 떨면서 뒤로는 망자들을 욕보였을 걸 생각하니 치가 거꾸로 솟는 기분.
“얼마나 위중하면 미리 장례까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속히 준비하도록 하겠…….”
도저히 못 참겠다.
콰앙!
나도 모르게 냅다 귀왕의 죽빵부터 후려갈겼다.
“커헉!”
피를 토하면서 나가떨어지는 귀왕.
‘초전박살.’
기세를 몰아 나가떨어진 귀왕을 덮쳤다.
초장부터 반항 한번 못하게끔 개박살을 내놓을 생각으로, 쥐 잡듯이 몰아붙일…….
와장창!
“끼이이이이익!”
“꺄르르르르르르!”
난데없이 나타난 요괴들이 공격해 오는 바람에, 귀왕을 공격하는 걸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시녀귀]
귀왕을 모시는 시녀 귀신.
지능이 거의 유아 수준에 머물러 있고, 언어능력도 잃어버린 상태지만 그 전투력만큼은 가히 압권이다.
분류 : 귀신
레벨 : 120
특징 : 물리 내성 / 독 내성
주의사항 :
획득 가능 아이템 : 없음
시녀귀들의 공격이 무척이나 매서웠지만, 최근 레벨이 꽤 올라 상대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뀨! 주인놈아! 무슨 일이냐!”
“구! 구구구!”
밖에 숨어 있던 햄찌와 꼬꼬가 황급히 뛰어 들어와 날 도왔다.
“꺄아아악!”
“꺄악! 꺄아아악!”
시녀귀들을 하나둘 쓰러뜨리는 사이.
“……감히.”
어느새 몸을 일으킨 귀왕이 본모습을 드러냈다.
풀어헤친 머리, 시퍼런 얼굴, 붉은 눈.
본모습을 드러낸 귀왕의 모습은 그야말로 귀신같아서, 꽤나 섬뜩했다.
“본 귀왕을 기습하다니.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글쎄.”
시녀귀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귀왕과 마주했다.
“니 새끼 지옥으로 보내줄 사람?”
“네놈 따위가 본 귀왕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귀왕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흘리던 그때.
“이 악독한 놈!”
“다 거짓말이었다는 게 사실이냐!”
“이 쳐 죽일 놈아!”
처녀귀신들이 나타나 귀왕을 압박했다.
“흐으!”
귀왕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이제 보니 네년들이 아비인 나를 배신하고 저 새파란 애송이와 붙어먹은 모양이로구나. 흐흐흐.”
귀왕은 처녀귀신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네년들이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로구나! 흐흐흐!”
귀왕이 품속에서 방울을 꺼내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짜르르르르르르르!
시끄러운 방울소리가 울려 퍼지고.
“꺄아아아악!”
“흐윽!”
“그, 그만! 꺄아아아아악!”
처녀귀신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털썩! 주저앉았다.
“크흐흐흐흐! 이 더러운 암캐들! 개만도 못한 주제에 감히 주인을 물려 하다니!”
처녀귀신들을 제압한 귀왕이 날 돌아보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본 귀왕을 찾아낸 것은 대견하다만, 네놈은 크게 실수한 것이다. 크흐흐흐! 네놈을 죽이고 그 몸뚱이는 강시로 만들고, 혼은 귀신으로 만들어 영원히 본 귀왕의 노예로 삼아 주마!”
그렇게 말한 귀왕이 수인(手印)을 맺으며 술법을 부렸다.
“급급여율령!”
……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급급여율령!”
귀왕이 다시 주문을 외웠지만, 역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급급여율령! 급급여율령! 급급여율령! 급급여율령! 급급여율령! 급급여율령! 급급여율령! 급급여율령! 급급여율령! 급급여율령!”
당황한 귀왕이 계속해서 수인을 맺으며 주문을 외웠지만, 헛수고에 불과했다.
“어, 어찌 법력의 흐름이……!”
그래, 난생처음 경험하는 거겠지.
“왜? 오늘따라 술법이 잘 안 되시나 보지?”
우득,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귀왕을 향해 다가섰다.
“네, 네놈! 무슨 사술(邪術)을 부린 것이냐!”
“사술은 니가 부리는 거고.”
“뭐라!”
“내가 예전부터 마법사…… 가 아니라.”
아, 실수.
“술법가 하나는 끝내주게 잘 잡거든. 다른 것도 잘 잡지만.”
디버프 마스터가 왜 마법사 계열 클래스들의 천적이라 불리는지 보여 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