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티 (9) >
화린의 폭탄 발언에 JML 엔터 대표실은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게 얼추 10초쯤.
“잠······잠깐만. 잠깐잠깐.”
먼저 침묵을 깬 것은 JML 엔터 대표였다. 대체로 반듯한 느낌의 그가 입은 정장 재킷을 벗었다. 그러면서도 옆에 앉은 화린을 계속 응시한다.
“아니 그러니까, 화린이 너 지금 단막을 하겠다고 한 거지?”
되물음에 핸드폰을 꺼내던 화린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요.”
“···들어온 대형 미니나 영화 등등을 다 재끼고, 신인 작가가 쓴 4화짜리 단막을 하겠다고?”
“넷플렉스는 왜 빼먹는 담?”
“하- 아니! 그게 말이! 아 어지러.”
“대, 대표님!”
대표가 빈혈이 오는 듯 이마를 짚었고 뚱뚱한 실장이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이실장아, 넌 대체 저걸 안 말리고 뭐 했는데.”
“아···대표님. 그, 그게.”
이때 화린이 끼었다.
“실장님은 계속 말렸어요. 생각도 말라고. 그러니까 이실장님 그만 잡아요.”
“야! 화린! 넌 임마, 좀 말이 되는 소릴 하라고! 무슨 갑자기 단막을 하겠다는 거냐?? 아무리 넷플렉스고 걔네가 뭔 프로젝트를 한다고 해도! 네가 지금 단막 할 급이냐?”
“작품 하는 거에 무슨 급이 나뉘어 있어요? 혜연 언니는 뭔데요. 언니도 지금 국내 1티어 탑인데 단편 영화 했잖아요.”
“그, 그건!”
“거기다 대표님이 예-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작품도 의욕이 있어야 잘 된다고. 규모 따지지 말고 내가 땡기는 거 하랬잖아요.”
“······하. 단막은 너무 규모를 안 따진 거잖냐.”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대표. 화린은 확고한 듯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여튼 난 결정했어요. ‘남사친’이 땡겨. 뭣보다 좀 쉬엄쉬엄하고 싶은 것도 있어요.”
“쉬엄쉬엄?”
“응. 솔직히 우리 이번 앨범 진짜 빡셌잖아요. 대표님도 알잖아? 하루 스케줄만 몇 개였어요? 근데 그거 다 소화하고 밤 비행기 타고 일본 넘어가고. 담날에 바로 한국 와서 또 스케줄 하고. 무대에 예능에 라디오, 광고, 화보, 너튜브 등등.”
대충 들어도 지옥 같은 스케줄을 줄줄 읊던 화린이 팔짱 꼈다.
“근데 나나 애들이 싫은 소리 했어요? 안 했잖아요. 다 우리랑 회사 그리고 팬들이 좋아 해주니까 버텼다구요. 그럼 솔로 활동 때는 좀 적당히 해도 되잖아?”
솔직한 그녀의 심정에 대표는 할 말을 잃었다. 전부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덕분에 그가 긴 한숨을 뱉었다. 설득을 포기한 것.
“후- 그래라, 그래. 니 고집을 누가 꺾냐.”
“딴 애들 스케줄도 좀 줄여줘요. 이건 그룹 리더로서 요청하는 거예요.”
“알았다고.”
머리를 쓸어 넘긴 대표가 오른쪽 뚱뚱한 실장에게 물었다. 말투의 힘이 빠졌다.
“그래서. 스토리 좀 읊어봐. 그 단막 굴러가는 느낌이 어떤데.”
“예? 아. 단막 공모전 뽑힌 작품들 찍어서 몇 주마다 오픈하는 형식인 것 같습니다. 타이틀이 단막 페스티벌인가? 아직 정확히 확정된 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전부 기획 중이라는 거네. 프리 프로덕션.”
“예. 다섯 작품 정도 런칭할 것 같았고요.”
설명을 듣던 대표가 화린에게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넌 그 단막이 왜 마음에 든 건데.”
“그냥- 뭐 대본이 재밌어서요. 단막치곤 꽤 스토리라인이 촘촘하고, 신인 작가님이 썼는데도 어색한 부분도 없어요. 로코이면서도 캐릭터가 잘 살아 있기도 하고.”
“···잘 될 것 같디? 뭐, 단막이 잘 돼봐야 한계가 있긴 하겠다만.”
“글쎄요. 근데 넷플이기도 하고 홍보만 잘 되면 대중들이 짧고 굵게 즐길 수 있겠죠.”
덤덤하게 답하는 화린. 반면, 대표의 걱정은 심화됐다.
“이실장. 그 단편 화린이 들어간다 치고. 상대 쪽 배우들은 결정됐나? 단막이니까 거의 무명들이 들어갈 거잖어.”
“다른 단막들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오늘 들어보니까 상대역은 나름 괜찮았습니다.”
“그래? 누구?”
“오늘 결정됐다는데 강우진이요.”
“강우진?”
턱을 쓰는 대표.
“한량에 그 강우진? 지금 라이징한. 아마- 최성건네 애였다고 봤는데.”
“네. 미팅 가니까 먼저 총괄디렉터 만나고 있었습니다.”
“오호- 걔 핫하드만. 음, 근데 걔도 우리 화린이만큼 또라이네.”
“저기요? 대표님, 나 옆에 있는데?”
“그 정도로 확 뜨고 있는 놈이 왜 단막을 한다냐. 대형 작품들도 충분히 컨택 잡힐 텐데.”
“그분···아니, 그 배우님도 작품에 급을 안 따지나 보죠.”
“화린이 넌 강우진 괜찮냐? 보니까 어땠는데?”
“뭐- 그냥 그랬어요. 별 감흥 없어.”
전혀 의미 없다는 식으로 답하는 화린. 어쨌든 대표가 짐짓 진중하게 턱을 쓸었다.
“그래? 음. 상대역이 그 강우진이라- 각만 잘 세우면 나름 괜찮을지도? 걔 연기 죽이드만. 혹시 화린이 너 강우진 알고 갔어?”
“나도 몰랐거든요.”
여기서 뚱뚱한 실장이 화린 보며 입을 열었고.
“근데 그 키스씬은 역시 빼는 게 안 좋겠냐? 너 원래 좀 빼는 식으로 말했었잖아.”
화린이 전혀 아니라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언제?”
다음 날 31일 일요일 아침. 순천.
오래된 집이나 건물 등 한 마을에 버금가는 규모의 크기인, 대형에 속하는 순천 세트 촬영장. 현재 이 세트 촬영장에는 영화 촬영이 한창이었다.
영화 ‘마약상’이었다.
최근 강우진이 ‘땜빵’으로 결정된 ‘마약상’의 배경은 부산이었지만, 몇몇 씬들은 순천 세트 촬영장에서 세트만 부산처럼 꾸며서 촬영을 진행했다.
어쨌든.
“무술팀!! 감독님이 부르십니다!”
“여기 차 좀 봐주세요!! 시동이 안 걸리는데?”
“감독님! 소품들 위치 좀 봐주십쇼!”
이곳은 여느 촬영장과 비슷하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사이 가장 바쁜 것은 ‘마약상’의 총괄 연출을 맡은 김도희 감독이었다.
“미술 감독님! 나랑 소품 좀 확인하러 가죠? 미술 감독님!! 여기!”
이쯤.
“감독님이 전투력이 급격히 올랐네.”
세트장 한켠, 각자 손에 시나리오를 든 배우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다만, 그들의 표정엔 뭔가 걱정이 서려 있다.
“오준우씨 사고로 많이 우울해 보이셨는데 다행이긴 하지. 얘기 들어보니까 준우씨 쪽이나 강우진? 걔 쪽이나 잘 해결된 것 같더만.”
“아- 이제 한 열흘 남았죠? 그 강우진이란 친구 합류까지?”
“참······일이 잘 해결돼서 좋기는 한데. 준우씨 생각하면 안 됐다 싶고. 기분이 좀 그르네.”
배우들의 대화 주제는 사고로 빠진 배우 오준우와 땜빵 강우진이었다.
“근데 진짜 괜찮을라나?”
“뭐요? 아- 강우진씨? 본인이 괜찮다면 상관없죠.”
“성격이 특이한가? 누가봐도 대놓고 땜빵인데 그냥 해버리네. 한창 뜨는 중인데 보통 그러면 이런 역은 패스하지 않아요?”
“케바케지. 것보다 나는 그 신인 친구가 배역을 잘 소화할까가 걱정이라.”
이미 중반부 이상의 촬영을 마친 배우들로선 당연한 걱정이긴 했다.
“하긴 그렇죠, 그 배역이 쉬운 것도 아니고. 더럽게 어려운 역이잖아요.”
“좀 급하게 정한 거 아닌가 싶어. 아무리 그래도 이제 한 작품 들어간 신인을······”
“상황이 상황이었잖아요. 감독님 입장에선 발등에 불 떨어졌었고. 근데 시나리오 넘어가고 대충 2주 좀 넘는 시간이었을 텐데, 그 강우진이란 친구한텐 좀 촉박했을 것 같긴 해요.”
“근데 연기는 좋던데요? ‘프로파일러 한량’ 봤거든요. 박대리 연기 죽였어요.”
여기서 배우들 대부분이 인정하는 분위기로 변했다.
“나도 봤어요. 연기 결이 좀 특이하더만. 그래도 대충 2주면 이게 소화가 될까가 문제지. 일반적인 신인들은 절대 못 할 건데. 버겁지 좀. 한량 그건 시간이 충분했을 거잖아?”
“하긴······준우씨도 꽤 오래 준비했잖아요.”
“그래도 강우진씨 천재천재 난리잖아요? 언론에서.”
“천재도 천재 나름이지. 시나리오 읽고 캐릭터 분석만 일주일 훌쩍 넘을 텐데···퀄리티가 나오려나?”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면 좀 애매해지는데.”
아직 강우진을 경험 못 한 배우들 사이로 걱정이 심화됐다.
“여기서 떠들어 봐야 어쩌겠어요. 직접 봐야겠죠, 폼이 어떤지.”
이 시각, 강우진의 승합차.
아침부터 우진이 승합차를 타고 회사로 이동 중이었다. 다만.
“어후- 겁나 막히네.”
조수석 최성건의 말처럼 아침임에도 꽉 막힌 도로는 지옥이었다. 이에 시니컬한 표정의 강우진은.
“······”
방금까지 자신의 SNS를 구경하다가 핸드폰을 내렸다. 그리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숨이 턱턱 막힐 교통체증을 보니 오래 걸릴 듯싶었고.
‘흠- 막간을 이용해서 리딩(경험)이나 할까?’
강우진이 오른쪽 자리에 쌓아둔 대본과 시나리오에 눈을 돌렸다.
퍽 쌓인 작품들.
죄다 강우진이 들어가야 할 것들이었다. 요즘 우진은 집에서 작품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따라서 짬이 나면 작품을 읽고, 아공간에 진입해 배역 리딩을 반복했다.
‘촬영 가까운 순으로.’
곧, 쌓인 작품 중 제일 위의 시나리오를 집는 강우진. 열흘 안에 촬영이 잡힌 영화 ‘마약상’ 시나리오였고, 우진이 시나리오 옆에 붙은 검은 사각형을 검지로 푹 찔렀다.
금세 바뀌는 세상.
어느새 우진은 차 안이 아닌 온통 컴컴한 아공간에 서 있었다.
강우진이 선택한 것은 ‘마약상’의 흰 사각형.
-[4/시나리오(제목: 마약상)를 선택하셨습니다.]
-[리딩(경험) 가능한 인물을 나열합니다.]
-[A:정성훈, B:최준호, C김현수······G:이상만]
이상만. 우진이 리딩(경험)할 배역은 ‘이상만’이었다.
“이게 살인 뭐 그런 거랑은 좀 결이 다르단 말이지.”
마약 중독이 포함된 배역. 어쨌든 강우진은 약간 천천히 검지를 움직여 이상만을 선택했다. 곧, 익숙한 로봇 같은 여자 목소리가 아공간에 퍼졌고.
[“‘G:이상만’ 리딩 준비 중······”]
옅은 심호흡을 하는 강우진을.
[“······준비 완료. 완성도가 매우 높은 대본이나 시나리오입니다. 구현도는 100%입니다. 리딩을 시작합니다.”]
거대한 회색이 덮쳤다.
피부로 느껴지는 온도가 달라졌다.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애매한 중간쯤. 서서히 온통 회색이던 세상이 걷혀간다. 강우진의 보는 시야는 낯선 곳으로 변했다. 들리는 소리 역시 선명하지만 익숙지 않다.
-쏴아.
차 안. 우진은 고급스러운 차의 뒷좌석에 앉은 채였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문엔 거센 물줄기가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으니까. 메케한 담배 향이 우진의 코를 찔렀다.
텁텁하고 불편한 냄새지만 지금의 강우진에겐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향이었다.
“······”
말없이 창밖을 보던 강우진의 시선이 앞 좌석으로 움직였다. 운전하는 사내나 조수석에 앉은 사내 둘 다 약간은 큰 정장을 입고 있었다. 우진은 조수석에 앉은 사내에게 짤막이 말했다.
“담배.”
목소리가 까끌하다. 무겁고 중압적이지만 나른한 것 같기도 하다. 곧, 조수석 사내가 고개를 푹 숙이면서도.
“예, 형님.”
재빨리 담배 한 개비를 대령한다. 담배를 입에 문 우진은 가슴 속 깊숙이 숨을 넣었다가, 생명과 함께 흰색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후우-”
맛있다. 그런 감각이었다. 담배를 하지 않는 우진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피우는 담배가 평범했고 일상적이었다. 스며든 감정과 세상이 그렇게 하라고 압박했으니까. 어느새 이상만의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스며들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뒤바뀐다.
지금 강우진은 부산 초거대 조식의 보스인 이상만이니 당연했다.
이상만은 말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매섭고 날카롭다. 얼굴 근육은 빳빳하니 무표정이지만 그것이 이상만의 폭력성을 부각시킨다. 조용하고 섬세하지만 옅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무겁고 짙다.
카리스마를 넘는 포악한 맹수.
차 안은 고요했다. 후드득후드득 폭우가 차를 때리는 소음만이 가득했다. 온몸에 미약하게 번지는 서늘함과 습도. 점점 차 안을 가득 메우는 담배 연기. 슬슬 강우진은 기분이 더러워졌다.
“스읍”
필터까지 다 태운 담배를 우진이 창밖으로 훅 던진다. 순간, 자신을 공격하듯 빗물이 정장 소매를 적신다.
“······”
불쾌하다. 왜인지 불쾌했다. 그리고 팔뚝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긁어도 긁어도 끝없이 간지럽다. 이쯤 강우진의 시야에 검은 점들이 수북이 쌓였다. 그것들이 움직인다. 저 밑에서부터 차오른 검은 점들은 그의 시야 반을 차지했다.
벌레인가? 아니면 헛것인가?
남들이라면 발광하며 눈을 부비겠지만, 왜인지 우진은 무뚝뚝한 표정에 변화 없이 그저 눈을 감았다 뜬다. 익숙한 광경이었기에. 그러자 보이던 검은 점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스윽.
강우진은 뜬금 오른쪽 왼쪽 팔뚝을 조용히 긁었다. 검은 점이 사라짐과 동시에 미묘한 간지러움이 폭발했으니까. 하지만 해소되지 않았다. 긁으면 긁을수록 간지러움은 심화됐다.
더러운 기분이 끈적이는 분노로 바뀌는 강우진. 그런 그가 작게 말을 뱉었다. 일본어였다.
“빨리 꽂아야겠어.”
서서히 초조함이 온몸에 퍼지는 우진이었다. 뭔가를 꽂겠다는 목표를 뱉자마자, 그의 뇌는 이상하리만큼 맹목적으로 한가지 생각만을 뿌려댔다. 빌어먹을 것을 네 팔뚝에 꽂아라.
그리고 해방돼라.
심연 또는 안개. 해방되고픈 결론이 나오자마자 강우진의 분노는 분탕질로 탈바꿈한다. 그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다리를 떨고 손을 떤다. 진정이 안 됐다.
이때.
“형님, 괜찮으십니까.”
조수석의 사내가 묻자 우진이 그를 가만히 노려본다. 눈빛이 폭력적이다. 몽둥이만 안 들었을 뿐 강우진은 침묵으로 사내를 후려 때렸다. 덕분에 사내가 잔뜩 움츠린다. 실수를 인지했기에.
이때 강우진이 까끌한 목소리를 냈다.
“왜. 내가 병신으로 보여?”
“······예?? 아, 아닙니다. 그저 조금 불편해 보이셔서.”
“넌 뭘 본 걸까.”
“그, 그게.”
“그 눈알을 뽑아서 먹으면 나도 알 수 있냐?”
“죄송···합니다.”
사내의 죄스러운 목소리가 뱉어지자마자 달리던 차가 한 건물 앞에 멈췄고, 운전석의 사내가 장우산을 챙겨선 재빨리 내려 뒤쪽 차 문을 열었다. 강우진은 별수롭지 않게 차에서 내렸다.
-스윽.
주변은 온통 검다. 곳곳에 주황색이 보인다. 깜빡이기도 한다. 가로등이 저 끝까지 줄지어 빛내는 것을 보던 우진이 시선을 돌렸다. 총 4대의 차에서 정장 입은 사내들이 앞에 줄지어 섰다.
그들을 잠시간 둘러보던 강우진이 건물 입구로 몸을 돌렸다.
“혀혀형님! 살려주십쇼! 제가! 제가 미쳤었나 봅니다! 제발! 형님!”
얼굴이 피떡이 된 남자 한 명이 무릎 꿇고 절규하고 있다. 바라보는 것은 당연히 이상만. 아니, 강우진이었다. 하지만 우진에겐 그의 살고자 하는 절규가 잘 들리지 않았다.
-쏴아.
발목을 적실 정도의 강렬한 폭우와 그 장대비가 우산을 때리는 소음 때문이었다. 이쯤 우진의 빳빳한 얼굴엔 일말의 온정 따윈 없었다. 그저 앞에 꿇어앉은 남자가 방해였다. 앞길을 막는.
따라서.
“······”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비는 남자를 가만히 보던 강우진이 옆에 선 부하에게 말했다. 어투가 일정하고 말라비틀어졌다.
“공구리.”
지시였다. 이 병신을 내 눈앞에서 치우라는. 아무도 모르게 드럼통에 처박고 굳어지게 만들어 바다에 던져버리라는. 곧, 얼굴이 피떡이 된 남자는 여러 정장 입은 사내들에게 질질 끌려간다. 최후의 발악으로 목청껏 소리치지만.
“형님!!! 살려주십쇼!! 제가! 제가 진짜 잘하겠! 악! 놔! 놔!!!”
강우진은 이미 건물로 들어선 뒤였다. 부하들은 따라오지 않는다. 뚜벅뚜벅. 청명한 구둣발 소리가 고요한 건물로 퍼진다. 그 소리가 점점 빨라진다. 우진은 한 계단씩 오르던 속도를 두 개 세 개로 바꾼다.
발걸음이 초조하다. 그런 감정이 팽배해진다.
직전의 그 카리스마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저 오줌마려운 개 마냥 뛰기 시작했다. 그런 우진이 도착한 것은 넓디넓은 사무실. 소파나 책상이나 죄다 비싸 보이는 것이 즐비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진은.
-덜컥!
재빨리 책상 서랍을 훅 열어 여러 기구들을 꺼냈다.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어 던진 뒤 셔츠 소매를 미친 듯 걷는다.
“후웁- 후우.”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는 그였고, 뭔가를 팔뚝 위에 칭칭 감은 우진이 잠시간 묘한 행동을 취한다. 이쯤 강우진의 표정은 안도가 가득했다. 딱딱하지만 온화하기도 했다.
순간, 그의 등 뒤의 빗물이 가득한 넓은 창문에서 번쩍한다. 천둥 번개가 친 것이었다.
-우르르르, 콰광!
어느새 푹신한 소파에 앉은 강우진은 천장을 올려본다.
“으흐흐-”
웃음과 천둥 번개 소리가 뒤섞인 기묘한 소리가 퍼졌다.
< 멀티 (9)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