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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뜸 착각당했다 괴물 천재배우로-105화 (105/201)

< 단막 (5) >

[“‘A:한인호’의 리딩을 종료합니다.”]

익숙한 로봇 같은 여자의 목소리를 끝으로, ‘남사친’의 리딩(경험)을 마친 강우진이 현실로 돌아왔다. 여러 배우들과 관계자들이 들어찬, 한창 수정된 대본을 돌리고 있는 리딩장.

그런 리딩장 전체를 둘러보던 강우진.

-스윽.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방금 받은 대본을 확인하는 화린부터, 최나나 작가와 대화하는 신동춘 감독, 긴장 서린 배우들, 수군대는 관계자들, 출입이 허가된 너덧 명의 기자들 등등.

“······”

어떤 누구도 우진이 한인호의 삶을 살다 나왔을 거란 생각을 하진 못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나 단 몇 초였고, 강우진은 분명 한인호의 세상을 살다 왔으며 그의 모든 것이 각인됐다.

‘확실히 다르네, 뭐랄까 기분이?’

이번이 한인호를 리딩한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강우진은 재차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다른 작품들과는 리딩 후의 상태가 달랐다. 예를 들어 한량의 박대리는 자신을 계속 다독여야 했다.

컨셉질이나 착각들이 자아를 지탱해주는 것도 명확했다.

그런데 한인호는 뭔가 몽글몽글했다. 딱히 불편한 건 없다. 오히려 마음이 따듯해진다. 선명해진 한인호의 세상도 즐겁다. 누구나 상상해본, 되돌아가고 싶은 학창시절 또는 대학교.

그 에너지 넘치는 청춘의 모든 게 스며들었기 때문일까?

‘뭐 매번 이런 작품만 할 순 없겠다만, 확실히 중간마다 달달한 걸 하는 게 좋겠어.’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산뜻한 작품도 같이 해줘야 한다. 지금이야 큰 문제 없지만 이 단단한 마음이 계속 이어질지는 미지수. 언제나 피폐해질 것을 상정하고 아공간을 사용해야 했다.

이렇듯 강우진은 다시금 성장한다.

와중에.

“자- 다들 수정된 대본 좀 읽어보셨으면 슬슬 시작할까요?”

ㄷ자 책상 상석의 사각턱 신동춘 감독이 리딩의 시작을 알렸다. 따라서 홍보 출입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었고, 배우석을 감싼 수십 관계자들의 집중도가 높아졌다. 특히 제작사나 넷플렉스 쪽 인원들이 그랬다.

그중 통통한 김소향 총괄디렉터가 옆자리 팀장들에게 속삭였다.

“리딩이라 적당히 하겠지만 기대되네요, 우진씨의 로코.”

“그러니까요. 한량 박대리처럼 저 덤덤한 얼굴이 이번에도 단숨에 휙 바뀌려나?”

되물음에 김소향은 시니컬함 최대치인 강우진을 보며 턱을 쓸었다.

“‘한인호’는 무조건 여심 쓸어 먹을 캐릭터고, 연기도 연기지만 싱크로율이 우진씨한테 딱이죠. 이번 거로 우진씨 이미지는 100% 다채로워질 거야.”

“완전요. 박대리로 빌런 포스 터트렸는데 한인호로 남친 재질 반전을 콱!”

“우진씨 스케줄 더 바빠지기 전에 작품 몇 개 더 보내봐야겠어요, 우리 괜찮은 로코 대본이나 시나리오 있나?”

“내일 확인해볼게요.”

이쯤 ‘남사친’ 핵심인물의 소개가 시작됐다. 시작은 신동춘 감독이 본인을, 그다음이 최나나 작가. 이어 강우진이 불렸다.

“우리 남주 배우님.”

무덤덤하게 일어난 우진이 배우들과 관계자들에게 인사했고.

“안녕하세요, 한인호 역을 맡은 강우진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짝짝짝짝짝짝짝!

화린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이보민 역을 맡은 화린입니다- 오늘 처음 봬서 조오금 어색한데 즐겁게 촬영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다시금 박수.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 뒤로 배우들의 소개가 차례차례 이어졌다. 이때 닫혔던 리딩장 문이 슬쩍 열리며 꽁지머리 남자가 들어섰다.

아까부터 안 보이던 최성건이었고.

-스윽.

눈치를 살피던 그가 동행한 누군가와 함께 입구 쪽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누군가는 흰 마스크를 쓴 중년 여자. 묶은 긴 파마머리가 익숙하다. 다행히 한창 소개가 진행 중이기에 딱히 시선이 쏠리진 않았다. 곧, 최성건이 옆자리 여자에게 말했다.

“늦진 않은 것 같네요, 박작가님.”

“미안해요. 진짜 차가 너무 막혔어.”

“괜찮습니다.”

중년 여자는 한량 완결 후 쉬는 중인 스타작가 박은미였다. 그녀는 한량으로 인해 몸값이 몇 배는 뛰었다. 그런 박은미 작가가 ‘남사친’ 리딩장에 조용히 나타난 이유는 간단했다.

“좀 긴장한 것 같긴 한데, 나나가 잘하고 있네요. 감개무량하네.”

보조작가인 최나나 작가의 응원차 들른 것. 물론, 박은미 작가의 속내는 그것만이 아니긴 했다. 상석 쪽 최나나 작가에서 왼쪽 첫 자리 강우진을 보는 박은미 작가.

‘토템······아니, 우진씨 첫 로코 연기. 이건 무조건 봐 놔야지.’

편집된 영상이 아닌 실제 강우진의 폼을 보기 위해서였다. 첫 로코 연기를 생생하기 담아야 했다. 이는 박은미 작가의 버릇이었다.

‘배우를 두고 캐릭터를 쓰려면 많은 모습을 봐둬야 돼.’

인물을 만든 후 배우를 붙이는 게 아닌 배우에 맞춰서 인물을 쓸 때의. 이미 박은미 작가의 차기작에는 강우진이 원픽이었으니까. 당연했다. 신봉하고 있으니까.

이어 그녀가 옆자리 최성건에게 속삭였고.

“최대표님, 우진씨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스케줄 정해진 거 있어요?”

작게 웃던 최성건이 여유 있게 답했다.

“확인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작가님. 혹시 차기작 관련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죠. 무조건 송 PD님보다 빨리 연락 부탁드려요.”

“역시 다음 건 같이 안 하시나 보네요.”

“또 같이 가면 별로인 거 아시잖아요, 사람들 보는 눈도 그렇고 한량이랑 대놓고 비교되니까.”

한량까지는 동지였으나, 지금 박은미 작가와 송만우 PD는 경쟁자로 바뀔 예정이었다. 아마도. 아니, 거의 확정적으로 둘 다 차기작에 강우진을 노릴 테니까.

여기서 최성건은 확신했다.

‘거물들, 주무를 수 있겠어.’

대단한 거물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것을.

잠시 후.

리딩장 전체적으로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퍼졌다. 강우진, 화린을 포함한 배우들 모두가 대본을 넘겼으니까. 지문은 신동춘 감독의 차지.

“S#1. 벚꽃 나무가 늘어섰다. 많은 인파 속 한인호와 이보민이 섞였다.”

한창 신동춘 감독이 지문을 읽고 있을 때, 호리호리한 최나나 작가의 시선은 가까운 강우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떨린다, 어떤 연기를 보여줄까.’

기대감이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자신의 대본에 응답해준, 스승인 박은미 작가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연기를 펼치는 배우.

물론, 이 순간 강우진을 보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다. 주변 배우들도 덤덤한 우진을 힐끔대기 바빴다.

‘아직은 평범해. 오늘은 좀 가볍게 갈 생각인가. 로코는 처음이라던데, 좀 긴장해서일지도.’

‘딱히 변화된 건 없는데? 왜 아무 준비를 안 하지?’

‘감정을 끌어올리지도 않아, 오히려 좀 심드렁하고. 왜 저래. 컨디션이 별로?’

괴물 같은 연기력으로 국내를 뒤집은 그 임팩트를 체감하고 싶어서였다. 그 파괴력을 눈앞에서 볼 기회. 이는 김소향 총괄디렉터나 최성건, 박은미 작가, 제작사, 기자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당연히 그를 처음 경험하는 이들의 시선이 더 짙다.

가시방석. 우진도 이 집중된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다.

‘어후, 울렁거려. 주연 자리 겁나 불편하네. 힐끔거리는 거 티 난다고 이 양반들아.’

긴장감이 퍽 늘어난다. 하지만 티 낼 순 없다. 주연의 무게 따위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묵직함을 유지하면서도 한인호만을 생각하자. 늘 그렇듯 강우진은 컨셉질과 연기 딱 두 가지만 상기한다.

단순하면서도 직진인 코스.

평범하면서도 특별하며 과하지 않지만 유별난 한인호. 우진은 각인된 한인호를 단숨에 끌어낸다. 기분이, 감정이, 생각이, 표현이 뒤집힌다. 곧, 우진이 보는 광경이 서서히 탈바꿈된다.

리딩장은 줄지어 선 벚꽃 나무로, 수십 배우들은 꽃놀이 온 인파들로, 뜨끈한 실내 온도는 포근한 감정으로.

여기서 은은히 들리는 신동춘 감독의 지문.

“한인호, 몇 걸음 앞에서 방방 뛰는 이보민을 묘하게 바라본다. 정감 가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듯한 눈빛이다.”

-스윽.

대본 내려보던 우진이 시선을 올렸다. 건너편의 화린을 보는 것. 아니, 지금 우진의 눈엔 화린이 아닌 저 앞에서 훌쩍훌쩍 뛰는 이보민이었다.

그리곤 작게 고개를 꺾는다.

“······”

감상 또는 응시. 지금껏 둔탁했던 강우진의 시선 처리가 단숨에 온도를 바꾼다. 눈에 담긴 감정의 색이 오묘하다.

이 순간.

“!!!”

여러 배우들이 작게 놀랐다.

‘우와- 뭐야 저 감정 올리는 속도.’

‘생동감이 무슨······시선 처리 한 번인데 왜 한인호가 바로 보이는 것 같냐.’

‘뭐라 표현하긴 힘든데- 눈에 뭔가 감정이 엄청 많아. 솔직히 지려, 와 이래서 거물들이 반하는 거구나.’

시선 처리 단 하나였다. 아주 짧은 연기 한 번으로 강우진이 리딩장의 공기를 뒤집었다. 첫 등장부터 뿜어대던 특유의 딱딱함이 사라지고, 어느새 우진에게는 한인호만의 거칠면서도 묘하게 따듯한 표정이 서렸으니까.

성격 더러운 고양이 같은 느낌.

공격적이지만 미워할 순 없다. 그런 강우진에게 화린의 첫 대사와 신동춘 감독의 지문이 연달아 던져진다.

“야! 한인호!”

“한인호를 돌아본 이보민이 재빨리 달려온다. 이보민, 양손 가득한 벚꽃잎을 한인호에게 자랑한다.”

화린과 시선 맞춘 우진이 작게 헛기침하며 눈을 피한다. 방금까지 그의 얼굴에 떠 있던 묘한 감정이 급작스레 없어졌다. 그저 귀찮음이 팽배할 뿐.

“어쩌라고.”

“아! 향기 맡아보라고 향기!”

잠시간 이어지는 강우진과 화린의 티키타카.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신동춘 감독.

“한숨 쉬는 한인호. 하지만 이보민은 양손에 담긴 벚꽃잎을 그에게 더 밀어댄다. 어쩔 수 없이 냄새를 맡아보는 한인호. 둘의 거리는 주먹 하나로 가깝다. 이때, 한인호의 시선이 이보민의 입술에 닿는다.”

지문이 끝나자 내렸던 시선을 다시금 올리는 강우진. 종착지는 당연히 건너편 화린이었다. 다만, 시선을 유지하진 않는다. 짧은 순간 그녀를 봤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

“······”

결국엔 화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강우진. 그 시선의 흐름 속에 비슷하지만 결다른 감정이 헤엄친다. 고민과 고뇌, 현실, 관계, 미래의 걱정. 무수한 감정을 격정적으로 뿜어댄다. 그런 우진이 돌연 작게 웃었다. 크진 않다. 무표정과 웃음 그 중간의 애매함.

감정의 냄새가 확고해진다.

좀 전에 휘몰아치던 고민이 사라지고 그저 화린을. 아니, 이보민을 감상한다. 취했으니까. 이 포근한 분위기에, 기분에, 상황에. 이내 강우진의 진한 눈동자에 애증이 아닌 애정이 담겼다. 딴딴하게 봉인해왔던 진심이 한순간 폭발해서였다.

여기서.

‘우진님 개쩔어! 씨! 완전 내가 짠 한인호! 미쳤다, 미쳤다, 미쳤다!’

‘남사친’을 쓴 최나나 작가가 속으로 악을 질러댔다. 마음 같아서는 강우진을 와락 안고 싶었다. 감격을 넘어선 비명.

반면.

‘······잘하네. 로코도 잘해. 저걸 코앞에서 보면 누가 버텨.’

한 손으로 입을 감싼 박은미 작가는 차분한 소름이 돋은 참이었다.

‘박대리는 보이지도 않아. 아니, 진짜 같은 사람이 맞아? 어떻게 배역마다 온도가 저리 확 다를 수가 있지?’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괴물이다 싶었으니까. 지금 그녀가 보는 우진은 그저 서툰 연애를 시작하기 전의 남자 또는 한인호였다.

‘숨겨온 마음을 허술하게 표현하는 게 진짜···기가 막혀.’

‘흥신소’의 김류진을 경험한 신동춘 감독도 마찬가지.

‘저거야 저거. 우진씨는 많은 대사 없어도 얼굴 근육이나 눈빛만으로 감정을 그려내. 그게 농도가 짙고 확실해서 눈을 못 떼는 거고. 누가 봐도 그냥 화린씨를 좋아하는 남자잖아 지금’

김소향 총괄디렉터는 눈을 반짝반짝 빛낼 정도였다.

‘······솔직히 우진씨 연기를 직접 본 건 처음인데. 하, 왜 거물들이 반하는지 알겠어. 됐다, 저 한인호는 무조건 터진다.’

강우진의 귀신같은 연기 변신은 많은 이에게 닭살을 선사했다. 와중 우진과 화린의 눈 맞춤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때, 포근한 시선을 보내던 강우진이 화린의 입술을 힐끗했다.

그리곤 다시 화린을 본다. 물론, 대본상의 흐름이었다.

이 순간.

“자, 잠깐만요.”

돌연 화린이 우진의 시선을 피하면서 손을 올렸다. 리딩을 중단한 것. 따라서 모든 이의 관심을 집중 받은 화린이 스륵 일어났다.

“정말정말 죄송해요. 저 진짜 금방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갑자기 급해서.”

약간 놀란 신동춘 감독이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어어, 다녀와요 얼른.”

곧, 화린이 빠른 걸음으로 리딩장을 가로질렀다. 그런 화린의 뒷모습을 덤덤히 보던 강우진은 어느새 한인호 냄새를 싹 빼곤.

‘진짜 급했나 보네?’

속으로 가볍게 읊조렸고.

‘하긴 아아 먹으면 자주 마렵지, 스읍 나도 신호 오는 것도 같고.’

리딩장을 빠져나온 화린이 닫힌 문 앞에서 길게 숨을 내쉰 뒤, 좀 전까지 연기를 나눴던 강우진을 떠올렸다.

“하- 연기가 맞지? 근데 눈빛이 완전···아냐 연기가 맞아.”

이어 화린이 아랫입술을 잘근 씹는다.

“미치도록 사실적일 뿐이야. 씨, 좀 살살 해달라고 말하는 것도 오바고.”

그녀에게 이 리딩장은 고문실과 같았으니까. 혼자만 험난한 화린이었다. 곧, ‘성덕’인 화린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린다.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고동치는 중이었다.

진정이 힘들 정도로.

“미치겠네 진짜······좋으면서 힘들어, 빡세.”

의외의 복병이었다.

< 단막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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