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벚꽃 (3) >
오늘 화린의 각오는 딴딴했었다. 촬영지에 도착했을 때부터 신동춘 감독과의 리허설 때, 그리고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물론, 바로 앞에 강우진이 서 있을 땐 조금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심지는 평소완 달랐다.
남들이 모르는 화린만의 복병 또는 위기. 그것을 강렬하게 헤쳐나가겠다는 그녀의 뚝심.
‘아무렇지도 않아, 우진님처럼 담담하게! 화린, 넌 지금 이보민일 뿐이야!’
그러나 그 굳건했던 화린의 각오는.
-스윽.
벚꽃잎을 사이에 두고 강우진과의 얼굴이 맞닿은 순간 하염없이 무너졌다. 그야말로 우수수. 몇 날 며칠을 쌓아왔지만 단 한 순간에 연기처럼 기화됐다.
그딴 각오 따윈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강우진의 얼굴.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있던가? 눈이 엄청 예쁘네. 화린을 응시하는 우진의 눈은 진하면서도 애정이 가득했다. 딱히 말이 없어도 그의 마음이 전해질 정도의 시선이었다.
나를 아껴준다, 보호한다, 지켜준다, 좋아한다.
한순간 어마무시한 양의 애정이 화린에게 때려 박혔다. 연기인 것을 안다. 화린은 분명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빨려 들어간다. 저 깊고 달콤한 눈동자 속으로.
‘어제 첫 컷 찍고, 감정 붙는 건 오늘이 처음이잖아. 어떻게 이 정도의 밀도가 가능한 거야? 살려주세요, 제발.’
대본 속 한인호가 눈앞에 있었다. 화린은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우진의 폭력적인 애정에 또는 연기에. 그저 눈빛을 나눌 뿐인 정적인 상황이지만 전해지는 감정은 파괴적이었다. 그것이 화린의 온몸을 휘감았다.
남들에게나 달달할 뿐 화린에겐 공격과 같다.
이쯤 어렵게 ‘이보민’을 유지하던 화린은 느꼈다.
‘······망했다.’
모든 걸 자신이 망칠 거라는 걸. 제대로 된 ‘성덕’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그것은 금세 현실로 나타났다.
-스으.
화린의 정신이 혼미했을 때쯤, 코앞의 한인호가 손 위에 쌓인 벚꽃잎을 뚫고 진격했으니까. 이보민 또는 화린은 그 어떤 리액션을 취하지 못했다.
‘온다, 오고 있어.’
무엇이 당도할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음에도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이내 한인호의 입술 감촉이 느껴진다. 순간, 화린은 온몸의 작동이 멈춘 기분이 들었다. 뇌가 새하얀 도화지처럼 리셋됐다.
덕분일까?
“끄흡!”
화린은 딸꾹질을 뱉었다. 작지 않고 큰 소리가 났다. 이에 화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이렇게 씬도 망치고 멍청이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되는구나.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강우진과 맞닿은 입술을 떼지 않았다.
‘······’
중독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생각해보라, 팬심 그득한 덕질의 대상과의 입술 박치기. 그 누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을까? 그렇기에 화린의 딸꾹질은 멈추지 않는다.
“끼흡!”
여기서 그녀와 입술을 맞댄 강우진은 혼돈에 빠졌다.
‘이거- 애드립이 맞겠지? 아닌가? 아 헷갈리는데.’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이고 딸기향이고 뭐고, 화린의 딸꾹질 덕분에 생각이 많아진 강우진이었다. 진짜인지 아닌지 가늠이 안 됐다. 멈춰야 하나? 모르겠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어버버대면 안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것.
‘아- 씨, 몰라. 일단 나는 나 대로 그냥 연기나 하자.’
자, 결정했으니 당장은 직진.
이쯤.
“가, 갑자기 딸꾹질? 감독님. 저거······화린씨 NG 같은데요?”
촬영존의 둘을 지켜보는 스탭들이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입을 붙이자마자 화린의 변화가 요상했으니까.
“근데 왜 저 타이밍에 갑자기 딸꾹질을 하시지?”
“긴장하셨나?”
“···오늘 화린님 대체로 차분하셨어요.”
“느낌이 딱- 너무 놀라서 나온 것 같은데. 감독님, 일단 가서 물어볼까요?”
누가봐도 NG처럼 보이긴 했다. 애초 대본에 있지도 않은 딸꾹질이었으니. 허나 왜인지.
“······아니. 그냥 끊는 것 없이 갑니다.”
“네??”
모니터 속 우진과 화린을 뚫어져라 보는 신동춘 감독은 NG를 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그가 사각턱을 쓸었다.
“일부러 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애드립이란 말씀이세요? 저게?”
“음, 증거로 우진씨가 감정을 계속 이어가고 있어. 저 연기 귀신이 눈앞 화린씨의 실수를 모를 리가 없어요. 만약 실수가 아니라면- 봐요, 친구의 충격적인 행동에 ‘이보민’이 까무러치게 놀란 게 되는 거잖아.”
즉, 신동춘 감독은 화린의 딸꾹질을 의도한 것으로 추측했다. 찍히는 그림도 기대 이상. 그것의 근간엔 강우진이란 존재가 있었다. 우진이 지금 착각을 종용하는 그림이었다. 짙은 오해가 안개처럼 촬영장을 뒤덮는다.
“······와- 저, 저게 계산한 거면 지금 상황이랑 완전 찰떡이긴 하네요.”
“한인호의 키스에 너무 놀란 이보민이 히끅히끅 거린다. 그림도 재밌어.”
화린의 실수가 우진으로 인해 의도치 않은 메소드로 재창조된다.
그쯤.
-스윽.
붙어 있던 입술을 천천히 떼는 강우진. 동시에 화린은 속으로 한탄했다.
‘일단 사과부터.’
자신의 부족함을 강우진이나 제작진에게 실토해야 했으니까. 허나 정면의 우진과 눈을 맞춘 화린이.
“······!”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이유야 간단했다. 정면의 남자는 강우진이 아니었다. 상기된 얼굴, 생각과 고뇌가 뒤죽박죽된 듯한 눈, 당황이 섞여 빠르게 깜빡이는 눈꺼풀, 어쩔 바를 몰라 미세히 떠는 디테일한 손동작.
그는 여전히 한인호 그 자체였다.
어째서? 왜? 내가 실수를 했는데 왜 우진님은 계속 연기를 속행하고 있지? 심지어 감정의 밀도가 더 빡빡하다. 이때 한인호가 자신의 실수를 인지한 듯 짧은 말을 뱉었다.
“아.”
대본에 있는 표현 그대로였다. 이때야 화린은 알았다.
‘계속···하라는 거야. 괜찮으니까, 가보자는 신호.’
강우진이 자신을 보듬어 줬다는 것을. 명백한 오해지만 덕분에 화린이 차분해졌다. 어느새 딸꾹질도 멈췄다. 그래, 끝까지 가보자. 그런 화린. 아니, 이보민이 친구로 여겼던 한인호를 보며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리곤 다시 딸꾹질.
“히끅!”
이건 진짜가 아닌 연기. 그리곤 정해진 대사.
“······미친놈.”
여기서부터 이보민의 가슴엔 숨어 있던 것들이 주르륵 흘렀다. 애써 감추고, 눈을 돌리고, 피했던 감정이 말이다. 한인호에 의해서 폭발한다.
참을 수 없다.
결국, 이보민은.
“씨!”
양팔을 훅 벌려 한인호에게 달려들었다. 덮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속도. 키 차이 덕에 점프해야 했지만 이보민은.
-텁!
한인호의 어깨를 거쳐 목덜미를 양팔로 감쌌고, 점차 눈이 커지던 한인호 역시 짐승처럼 달려드는 그녀를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카메라, 포개진 한인호와 이보민을 옆에서 클로즈업.
둘은 무아지경이었다. 좀 전에 간질간질하던, 미묘한 감정이 오가던 가벼운 입술 터치와는 천지 차이인 키스씬. 둘의 얼굴이 좌우로 교차 되고 포개진 몸은 점점 더 밀착된다. 농도가 짙다.
그야말로 ‘찐하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이를 보는 신동춘 감독과 스탭들은 입을 다물었으나 속으론 과한 리액션 중이었고.
‘좋아! 딱 좋다, 저 정도는 해줘야 찐하다 할 수 있지! 크- 그림 미쳤고.’
‘와······개찐하네?’
‘미니 로코에서도 저렇게까지 하는 건 드물지 않나? 시청자들 놀라 자빠지겠는데??!’
스탭들 사이 우람한 김대영은 입을 작게 벌렸다. 지금 본인이 보고 있는 게 진짜인가 싶어서였다.
‘돌았···다. 시발, 진짜 미친 듯이 부럽다.’
핵심이 될 찐- 한 컷은 제대로였다. 그렇게 약 10초 정도. 만족할만한 샷을 담아낸 신동춘 감독이.
“커엇!!!”
자리서 훅 일어나 확성기에 대고 외쳤다.
“오오오케이!! 오케이!!”
엄지를 추켜세워대는 신동춘 감독과 감동한 듯 박수치는 스탭들. 그때야 붙어 있던 우진과 화린이 스르륵 떨어졌다. 민망한 듯 헛기침하는 화린.
“어흠. 큼.”
강우진은 뭔가 시니컬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고 있었다. 다만, 근엄한 건 아니었다.
‘······뭐였지 방금. 기억이 잘.’
그저 이게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헷갈렸을 뿐이었다. 아직도 입술에 좀전의 격한 감각이 선명했다.
이때.
“우진씨! 화린씨!!”
흥분한 신동춘 감독이 우다다 달려왔다.
“죽여줬어요! 어! 이거 나가면 그냥 다 씹어 먹겠어! 크- 화린씨, 딸꾹질 그거 애드립 맞죠?”
살짝 머뭇하는 화린. 그녀를 대신한 것은 강우진이었다.
‘역시 애드립 맞았나 보네.’
어느새 냉정을 되찾은 그가 낮게 읊조렸다.
“씬에 생동감이 훨씬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저는.”
“동감! 한인호의 급작스런 행동에 너무 놀란 이보민의 심정이 기가 막히게 뽑혔어요.”
여기서 화린은 강우진을 향한 팬심이 수십 배는 두터워졌다.
‘내 실수를 애드립으로 덮어주는 건가?······나를, 이 컷을 우진님이 핸들링하고 있어. 완전 내가 묻어간 느낌이야.’
배포라거나 연기적인 측면 등등.
‘우진님은 내가 실수한 걸 느꼈겠지? 아니, 분명 느꼈어. 근데도 상황상 분위기가 잘 어울린다 싶으니까, 내 딸꾹질을 소화하고 받아들이고 아무렇지 않게 연기를 이어갔어.’
순순히 대단하다고 느끼는 화린.
‘순발력, 센스, 상대 배우에 관한 이해도. 뭐든 최고치야. 대단해, 역시 우진님은 개쩔어.’
팬심과 더불어 착각이 거대해진다. 이어 강우진과 화린을 흐뭇하게 보던 신동춘 감독이 입을 열었고.
“방금 거 그냥 찢었는데, 솔직히 딸꾹질이 없는 버전도 보고 싶긴 하거든요? 원래 대본대로 한 번 더 가볼게요.”
화린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력이 높다.
“네, 감독님.”
무심한 얼굴의 우진도 대답하긴 했으나.
“···알겠습니다.”
속으론 입을 쩍 벌렸다.
‘또??! 또 해요, 이거?! 트루?’
물론 좋아서였다.
‘완전 환영입니다, 저는.’
이후.
강우진과 화린의 찐한 키스씬은 계속해서 속행됐다. 이번엔 신동춘 감독의 요구대로 대본 그대로였다. 벚꽃잎을 품고 달려오는 이보민.
“이거 봐봐.”
“어쩌라고.”
“아! 향기 맡아보라고 향기!”
뒤로 이어진 입맞춤. 물론, 이번엔 화린의 딸꾹질이 없었고 자연스레 찐한 키스까지. 두 배우의 연기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다만.
“컷! NG!! 강풍기 뭔 문제 있어요??!”
뒷배경으로 흩날릴 벚꽃잎이 실종했다. 강풍기 하나가 멈췄으니까. 따라서.
“후딱 점검합시다! 우진씨! 화린씨! 미안한데, 다시 가야 될 것 같네요!”
키스씬의 3번째 촬영이 확정됐다. 그러나 강풍기가 고쳐진 뒤에도.
“컷컷! NG! 붐마이크 왜 내려옵니까? 모니터에 나온다고! 올려요, 올려!”
스탭의 실수가 있었다. 한마디로.
“다시다시! 다시 갑니다!”
4번째 키스씬. 물론, 강우진은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척을 했지만, 실수한 스탭을 안아 줘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결과적으론.
“커어엇!! OK!!”
이 찐한 키스씬은 무려 다섯 번의 재촬영 끝에 최종적 OK가 떨어졌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고, 우진은 약간 몽롱해진 기분을 애써 차갑게 식혀야 했다. 까딱하면 실실 웃을 판이었으니까. 악플에는 도움이 되는 알맹이 소시민이 이럴 땐 독이었다.
어쨌든.
“수고하셨습니다, 화린님.”
스탭들에게 메이크업 수정을 당하는 화린에게 작게 인사하는 강우진. 화린 역시 담담히 화답했고.
“네, 우진씨도요. 그리고 고마워요.”
“예? 뭐가 말입니까?”
목소리 죽여 속삭였다.
“숨겨줘서요.”
실수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우진은 뭔 소린지 도통 몰랐다. 하지만 되묻는 건 그림이 이상하다. 찐한 키스씬 직후였다. 여기선 컨셉상 쿨하게 빠지는 게 맞다.
“아, 예.”
근엄히 답한 우진이 몸을 돌렸다. 지금부터는 화린의 솔로컷이고 강우진은 대기였으니까. 곧, 그늘 아래 의자로 복귀한 우진이 작게 숨을 뱉었다.
“후-”
그리곤 역사에 남을 지금까지의 일들을 멍- 하니 되새긴다. 입술에 감촉은 여전히 선명했다. 여기서 끼어드는 최성건.
“우진아, 고생 많았다.”
아니요? 고생이라뇨. 오히려 축복에 가깝다. 허나 과한 기분을 억누른 우진이 목소리를 깔았다.
“아니요. 저보단 화린님이 고생하셨죠.”
“크크, 너답다 진짜. 그 찐한 키스씬 뒨데도 이렇게 덤덤하면 화린씨 서운하겠는데?”
“······”
“그보다, 자 이거. 읽어 둬 익숙해지게.”
곧, 최성건이 얇은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가사 수정본. 스타트는 일본어야.”
강우진의 너튜브 채널 얘기였다.
22일, 베트남 다낭.
한국은 아침 11시쯤 됐겠지만, 베트남 다낭은 9시를 조금 넘겼다. 날씨는 무덥기 그지없다. 아침임에도 후덥지근한 공기가 맴돌 정도. 그러거나 말거나 베트남 다낭의 도로는 오토바이로 가득하다.
어느 나라나 아침의 풍경은 한국과 다를 게 없다.
그런 다낭엔 최근 한국의 촬영팀 무리가 도착했다. 그들은 현재 다낭의 한 울창한 숲을 해치고 있었다. 기나긴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곳이었다.
인원은 얼추 열댓 명.
전부 햇볕을 가릴 사파리 모자를 썼고, 제일 선두에 선 턱살 통통한 남자가 모두에게 외쳤다.
“여기쯤이 어떠십니까??!”
턱살 남자는 회색 반팔을 입고 있었는데 이미 땀으로 다 젖은 상태였다. 그는 해외 로케(해외촬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인 라인 PD였다.
라인 PD가 맡는 업무는 다양하다.
현지 코디네이터로서 시나리오상에 있는 촬영 장소를 물색하는 것, 현지 관계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 촬영 시 필요한 현지 스탭 동원 등등. 해외로케 촬영에 동반된 모든 것을 핸들링한다.
해외 로케 촬영이 라인 PD에게 달렸다 봐도 될 정도.
그런 그의 외침에 열댓 명 무리 중, 헐렁한 반팔 셔츠를 입은 새치 가득한 남자가 주변을 쭉 훑는다. 얼굴을 보니 거장 권기택 감독이었다. 그 역시 땀으로 온 얼굴이 범벅됐다.
그러나 장소를 확인하는 눈빛만큼은 날카롭다.
“······음.”
나무와 풀들이 무성한 그림, 어디선가 들리는 이름 모를 짐승 소리, 쿰쿰한 냄새, 귀 주변을 맴도는 벌레, 저 멀리 보이는 폐가, 나무 사이를 스치는 뜨거운 바람.
순간, 권기택 감독의 머릿속에는.
‘역시, 세트장보다는 훨씬 낫군.’
‘실종의 섬’ 세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 벚꽃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