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국 (6) >
사람은 때때로 자신을 되돌아볼 때가 있다. 대체로 비슷한 말을 뱉는다. ‘와- 내가 이걸 어떻게 했지?’ 따위의. 강우진 역시 살아오며 그런 걸 많이 느꼈다. 디자인회사에서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나날들.
그리고 방금 우진에겐 하나가 추가됐다.
‘내가 방금 한 게 일본 수어가 맞아? 맞지? 쟤가 알아들었으니까 맞을 거야. 근데 어떻게?’
바로 일본 수어였다. 직전까진 별생각 없이 몸과 표정이 움직였었다. 그런데 열 몇 살이나 됐을 법한 저 어린 남자의 질문. ‘어떻게 일본 수어를 할 줄 아냐는’ 물음을 보자마자 강우진의 내면엔 의문이 쏟아졌다.
‘···그러게. 왜 됐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너는 알어?’
본인도 모르는 걸 일본 수어를 던진 어린 남자가 알 턱이 없었다. 어쨌든 아주 짧은 시간에 우진의 머릿속에선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나라별로 수어가 다르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아니, 몰랐지만 알아냈다는 게 정확했다. 아공간을 통해 수어를 습득한 뒤에 검색해봤었으니까. 그 낯설며 어려운 언어를 단박에 습득했는데 기본적인 정보는 알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나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을 테니.
정보를 확인한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었다.
생각해보면 수많은 나라는 모두 언어가 다른데, 그 언어를 기반으로 한 수어가 같다는 건 말이 안 되긴 했다. 그렇게 강우진은 자신이 습득한 것이 한국 수어구나- 라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강우진은 ‘아메토크 show!’의 스튜디오에서 돌연 일본 수어를 보였다.
심지어 전문가도 극찬했던 한국 수어와 동일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우진이 당황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
이어 강우진은.
‘잠깐만. 일단, 좀 침착하고. 다시 되는지 확인을 해보자. 우연인가 아닌가.’
우연일 리는 없었지만 확신은 필요했다. 곧, 우진은 눈 커진 방청객의 어린 남자에게 시선을 붙였고.
-스윽.
손을 올렸다. 최대한 방금의 감각을 상기하며 일본 수어를 시도한 것. 근데 ‘시도’라는 말이 무색했다. 강우진은 무탈하게 일본 수어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뭐랄까, 몸이 기억하는 느낌과 비슷했다.
[“제가 지금 일본 수어를 정확하게 하고 있나요?”]
우진이 부드럽게 수어를 던지자 어린 남자의 눈이 더 커졌다. 그리곤 그 역시 손을 올렸다.
[“네. 정확해요. 저보다 더 잘하시는 것 같아요, 전 아직 실수할 때가 있거든요. 지금 하시는 수어 실력은 마치 저의 수어 선생님과 비슷해요. 아니다, 더 잘하세요!”]
[“고맙습니다, 저도 일본 수어가 왜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네??”]
[“아니요. 농담입니다.”]
능수능란한 일본 수어. 실제로 어린 남자보다 강우진 쪽이 더 스무스했다. 이쯤 강우진은 인지했다.
‘뇌가 일본어를 떠올리면 수어를 기억하는 몸이 알아서 움직여준다. 뭔가 융합이 되는 기분이야.’
일본 수어가 나오는 과정이었다. 와중, 두 남자가 수어를 주고받는 넓은 스튜디오는 적막했다.
“······”
“······”
“······”
신조 PD도, MC 소요도, 최성건도, 이 세트장에 있는 200여 명의 방청객도, 수십 스탭들도. 모두 우진과 어린 남자를 번갈아 볼 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 때문이기도, 뭔가 난생 처음보는 광경에 정신을 뺏긴 것도 있었다.
그렇잖은가?
애초 수어를 보는 것도 자주 없지만 지금은 토크쇼 녹화 중이고, 일본 수어를 수준급으로 하는 것은 일본인도 아닌 한국의 신인배우였다. 왜 저 배우는 한국 수어도 아닌 일본 수어를 할 줄 아는 것인가?
넋이 나갈만했다.
여기서.
“······아, 아!”
멍하니 둘의 수어를 관람하던 빼싹 마른 신조 PD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옆에 선 두 명의 통역 중 수어 통역가에게 물었다.
“지금 우진씨가 하는 수어가 일본 수어 맞죠? 한국 게 아니라.”
“네···일본 수어예요. 근데 저분 한국 배우라고 안 하셨어요? 솔직히 일본어를 너무 잘하셔서 놀랐는데 설마 수어까지 할 거라곤.”
“저도 그렇습니다.”
약간 진중해진 신조 PD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고.
“잠시만 녹화 스톱하겠습니다!!”
무대 위로 우다다다 달려갔다. 핸드 마이크를 든 MC 소요는 여전히 우진을 보며 멍때리고 있었지만, 신조 PD는 아랑곳없이 강우진에게 붙어 바로 물었다. 흥분이 가득하다.
“우진씨! 일본 수어도 할 줄 아시는 겁니까?? 일본어만 하는 게 아니라?”
예, 그런가 봐요. 속으로 답한 우진은 겉으로는 목소리를 착 깔았다.
“네. 조금. 한국 수어도 가능합니다.”
“······한국 수어까지- 뭐 혹시 과거에 수어 관련해서 일을 준비하셨다거나.”
“아니요, 전혀요.”
“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지금 한국어, 일본어, 두 언어의 수어까지. 총 4개 언어가 가능하시다는.”
정확하게는 영어까지 포함이다만 우진은 딱히 그 부분은 꺼내지 않았다.
“그런 셈입니다, 자랑할 정도는 아니구요.”
신조 PD가 바로 일본어를 뱉어댔다.
“무슨! 자랑해야죠! 그 정도면 충분히 자랑하고도 남습니다! 와- 우진씨는 대체······그만한 언어들에다가 연기까지. 솔직히 인생 2회차가 아니면 힘들지 않습니까? 혹시 인생 2회차 십니까??”
“그럴 리가요.”
충격받은 김에 뱉은 물음이라 신조 PD도 바로 수긍하긴 했고, 차츰 고조됐던 기분이 차분해지는 그가 현 상황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우진씨. 혹시, 그- 한국·일본 수어를 숨길 생각이 있습니까? 방송에 나가도 괜찮냐는 뜻입니다.”
“나가도 상관없습니다. 숨길 이유는 없어서요.”
곧, 토크쇼 연출자다운 표정으로 돌변하는 신조 PD.
“알겠습니다. 저는 그냥 알아서 이해하겠습니다. 어쨌든 이게 지금 그림이 좋거든요? 반전도 있고. 시청자들한테 충분한 흥미를 선사할 수 있어요. 여기 눈 튀어나올 듯한 소요씨 보세요.”
손짓에 강우진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놀람이 점철된 MC 소요가 말없이 엄지를 추켜세웠고, 신조 PD가 우진에게 한 걸음 다가서서는 다시 말했다.
“아마 시청자들도 비슷할 겁니다. 그러니까 연출을 가미해보겠습니다.”
“연출 말입니까?”
“예.”
“어떤?”
“그건 이제 생각을 좀 해봐야죠. 방금의 장면을 더 멋지게 꾸밀 수 있는.”
“······”
잠시간 신조 PD의 얼굴을 무심한 눈으로 보던 강우진이 뜬금 일어났다.
“이런 건 어떠십니까?”
“예?”
“사실, 좀 멀어서 잘 안 보이긴 했습니다.”
이어 우진이 덤덤히, 거침없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200여 명이 모인 방청객이 있는 곳으로. 덕분에 방청객 모두가 움찔대거나 화들짝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진은.
-스윽.
방청객 바로 앞, 같이 수어를 나눴던 어린 남자의 앞에 섰다. 이내 어린 남자에게 수어를 보내는 강우진.
[“여기서 대화하면 하면 잘 보일 것 같은데. 부담될 것 같아요?”]
어린 남자는 당황이 짙은 얼굴이긴 했으나,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대답을 들은 우진이 뒤쪽 신조 PD에게 톤 낮은 일본어를 뱉었고.
“괜찮다고 하시네요.”
신조 PD는.
“아! 아예 무대를 벗어난다?? 방청객의 질문을 보자마자, 갑자기 훅 일어나서는 거기까지 다가가 대답을 해준다! 오! 파격적입니다.”
낙찰이라는 미소가 가득해졌다.
두 시간 뒤.
‘아메토크 show!’의 녹화 중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강우진은 참여해준 방청객들에게 사인 등의 팬서비스를 해준 뒤.
-달칵.
홀로 대기실에 입성했다. 최성건이나 우진의 팀은 여전히 녹화장에 있는 모양. 특이한 건, 강우진이 대기실에 들어서자마자 늘 챙겨 다니는 백팩을 집는다는 것. 우진이 백팩에서 꺼낸 것은 시나리오였다. 종류는 상관없었다.
-푹!
보기 위함이 아닌 아공간에 진입하기 위해서였으니까. 금세 우진의 시야는 온통 컴컴해졌다. 하지만 강우진은 늘 확인하던, 둥둥 뜬 흰 사각형 쪽으로 움직이진 않았다.
그저.
“어우 씨. 녹화 이거 마음만 편하고 빡센 건 똑같네. 여튼 보자-”
제자리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생각을 정리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수어’를 습득했을 때 로봇 같은 여자가 뱉은 말을 상기했다.
‘[“기본 언어 외의 새로운 언어가 감지됩니다. ‘수어(수화)’를 먼저 습득합니다.”]’
그랬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상하긴 했다. 수어가 만국 공통어가 아님에도 로봇 음성의 여자는 앞뒤 없이 ‘수어’라고만 말했었다.
“근데 그냥 ‘수어’라고만 말했었단 말이지.”
명확히 하자면 ‘한국 수어’라거나 ‘일본 수어’라고 해야 했다. 뭉뚱그려 수어라고 하기엔 그 수가 너무 많다. 능력이 울트라급으로 미친 아공간이 그런 실수를 할 리 없었다.
즉.
“내가 몰랐던 부분이 있었던 거지.”
사실, 강우진은 녹화 내내 어느 정도 답을 내린 상태기도 했다. 지금은 그저 실험을 위해 아공간에 들어온 것. 일단 한국, 일본 수어는 부드럽게 된다. 둘 다 느낌은 같다. 그저 해당 언어를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수어로 하겠다는 명령을 몸에 하달하면 됐다.
다만.
“전세계는 또 아니야.”
만능은 또 아니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불어를 생각하고 수어를 해보려 해도 몸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내가 불어를 모르니까.”
여기서 우진은 작게 숨을 뱉은 뒤.
“이러면······”
이미 습득한, 현지인 수준의 영어를 머릿속으로 떠올렸고, 몸 전체로 명령을 전달했다. 난 미국 수어를 하겠다고. 천천히 올려지는 두 손. 그리고.
-스윽.
막힘 없이 줄줄줄 나오는 미국 수어.
‘된다.’
순간, 강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케이, 뭔지 알겠네.”
왜 본인이 한국 수어를 제외한 일본 수어와 미국 수어가 가능한지를 파악했으니까.
“그러니까 수어는 패시브같은 거야, 조건만 달성하면 어느 나라 거든 가질 수 있는.”
그 조건은 매우 심플했다.
‘해당 나라의 언어.’
각 나라의 언어였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 현재 강우진이 가능한 언어였고, 수어 역시 이 세 나라는 스무스하게 나왔다. 하지만 언어를 습득 못 한 나라는 불가능.
한마디로.
“내가 언어를 늘릴수록, 수어는 보너스 개념으로 따라붙는다는 얘기잖아? 와- 씨. 아공간 진짜 능력 돌았네.”
강우진은 현재 3개의 언어가 아닌, 수어까지 포함해 총 6개의 언어를 습득한 셈이었다. 이래서 그 로봇 음성의 여자가 ‘수어’라 통합해서 표현한 거구나 싶은 우진이었다.
“앞으론 언어 하나 배우면 무조건 1+1이겠네?”
아공간의 능력은 정말 기상천외했다. 아니, 그렇잖아? 사람이 한 인생 살면서 언어 6개를 통달하는 게 가능하겠냐고. 기본 언어 외에 하나를 배우기도 힘든 게 보통이었다.
이쯤.
“됐어, 일단 퇴장.”
시원하게 ‘퇴장’을 읊조린 강우진. 그의 시야가 바로 아공간에서 대기실로 변했고, 지척에 있는 대기 의자에 앉은 우진이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언어 6개라-”
앞으로가 기대됐으니까. 뭐, 수어를 자주 쓰는 건 아니겠지만 필히 언젠가 도움이 될 터였다. 운이라는 건 실력이 있을 때 더 명확히 잡을 수 있다.
‘한국 수어처럼 분명 쓸모가 있을 거야. 일본 수어든 미국 수어든.’
우진은 확신했다. 수어는 낯선 만큼 유니크하며, 그 귀함 덕분에 어디선가 도사리고 있을 기회를 움켜잡을 날이 올 거라고.
이 순간.
-덜컥!
닫혔던 대기실 문이 열렸다. 곧, 강우진은 웃음을 싹 지워내며 무심함을 얼굴에 장착했다. 등장한 것은 꽁지머리 최성건. 그런 그와 우진은 잠시간 말 없는 아이캔택을 나눴다.
“······”
“······”
먼저 물꼬를 튼 것은 픽 웃은 최성건이었고.
“뭘 봐 임마. 네 일본 수어 보고 충격받았을까 봐? 너랑 같이 한 날이 원데이 투데이도 아니고. 난 이제 그냥 뭐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십니까?”
“어. 하나하나 일일이 놀라다간 내 심장이 먼저 멈출까 싶어서. 당연히 이해는 안 돼. 이게 뭐지? 싶고. 근데 하나만 묻자.”
“예.”
“인간은 맞지?”
“······대표님.”
“아니아니, 진심으로 대답해줘. 맞지?”
“당연히 맞습니다.”
물어본 자기도 병신같았는지 최성건이 머리를 긁었다.
“그럼 됐다. 소화도 안 되는 거 억지로 삼켜봐야 탈만 나고, 너 과거 사정이 있기에 지금의 네가 있는 거겠지. 그렇게 쇼부낼 게. 덤벼, 임마. 뭐든 다 받아들여 줄 테니까.”
던져진 농담에 우진 역시 근엄한 장난을 쳤다.
“예. 그럼 부담 없이.”
“아아아- 그래도 텀은 줘야지! 테트리스도 어? 블록 내려오는 시간이라는 게 있구만. 연타는 안 돼. 아, 예정이나 수환이 포함한 팀 애들한테도 일러뒀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라고.”
“아- 감사합니다.”
“오케이, 슬슬 가자. 2차 녹화 시작한다니까.”
고개 끄덕인 우진이 복도로 나왔을 때 최성건이 아까 있었던 녹화를 상기하며 말했다.
“뭐, 오늘 온 방청객들이 거진 그랬다만. 그 친구 있잖아. 너랑 수어 나눴던 어린 애.”
“예.”
“너 어지간히 팬인가 보더라. 사인받고 그렇게 좋아하는 거 간만에 본 것 같어. 그 표정은 귀하지.”
확실히 그랬다. 어린 남자는 약간 울먹이기까지 했으니까. 근데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우진이었다. 컨셉질과 착각 속 홀로 분투하는 자신과 닮았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또는 관심 있던 배우와 수어로 대화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하긴. 그것도 일본 배우가 아니라 한국 배우고. 아니, 배우를 떠나서 수어 자체로 대화할 기회가 살면서 많지 않았겠지. 어리기도 하고.”
“의도치 않은 고립은 생각보다 빡셉니다.”
진짜로요. 이내 천천히 고개 끄덕이던 최성건이 무표정 우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래, 그 아이한텐 오늘이 평생 기억에 남을 하루였겠네.”
다음 날, 30일. 아침. ‘토에가’ 영화사.
‘낯선 이의 기괴한 희생’의 제작을 맡은 ‘토에가’ 영화사. 그런 영화사의 대형 회의실. ㅁ자형 책상에 앉은 강우진이 보였다. 물론, 최성건도.
둘의 반대편에는.
“갑자기 일정을 변경해서 미안합니다, 급작스런 일이 터져서.”
새치 가득한 쿄타로 감독이 자리했다. 더불어 영화사 직원들도 함께였다. 얼추 대여섯 명. 우진이 쿄타로 감독을 만나는 것은 일본 일정의 마지막이었다. 오늘 할 얘기가 많았다. 작품의 프리 일정이나, 촬영 기간 조율, 홍보 관련 등등.
그런데 왜인지 쿄타로 감독의 표정이 약간 어둡다. 최소 강우진은 그렇게 느꼈고.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 좀- 다크한 느낌인데.’
쿄타로 감독은 애써 미소지으며 일본어를 뱉었다.
“‘남사친’과 너튜브 소식 들었습니다. 축하해요. 매우 오랜 기간 무명으로 지낸 게, 이제 제대로 빛을 보는 것 같아 나도 기분이 좋아요.”
으레 있는 착각이라 우진은 별수롭지 않게 답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런데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되물음에 작게 한숨을 쉰 쿄타로 감독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원래 계획은 늦어도 10월엔 대본리딩을 할 예정이었는데 좀 차질이 생겼어요.”
“차질?”
“음, 어쩌면 리딩이 내년 초까지도 밀릴지 모르겠어요. 반년 정도.”
내년 초? 갑자기? 생각보다 너무 늦다. 심지어 촬영도 아니고 대본리딩이. 이유가 있나? 우진이 쿄타로 감독을 응시하자, 새치 머리를 긁던 쿄타로 감독이 작게 읊조렸다.
“전체 투자금의 반 정도가 빠지려는 움직임이 있어요. 이미 30%는 빠졌다 봐야 하고.”
투자금이 빠져? ‘낯선 이의 기괴한 희생’은 대형 영화니 투자금도 퍽 클 것이었다. 그럼 이 영화가 엎어지기라도 하는 건가? 아직 세세히 아는 건 아니다만, 이 상황에 답을 내리는 건 우진에게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답을 강우진이 낮게 뱉었고.
“혹시, 이유가 저와 관련이 있습니까?”
쿄타로 감독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아니지. 그저 변화를 두려워하는, 썩어 빠진 멍청한 놈들 때문입니다.”
한편, 도쿄의 한 으리으리한 주택.
한눈에 봐도 탄성이 절로 터질 정도의 초대형 주택이었다. 드넓은 마당은 당연하며 주택 자체의 규모도 상당했다. 이 큰집에는 100명이 살아도 아무 문제 없지 않을까?
그런 주택의 내부는 더욱이 대단했다.
천장이 끝없이 높으며 비치된 가구들은 하나같이 초고가였다. 거기에 집에 일하는 직원들만 다섯이 훌쩍 넘는다. 그중 집 청소를 하던 남자 직원이 닫힌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러자 안쪽에서 까글한 일본말이 들린다. 늙은 남자 목소리.
“들어와요.”
대답을 들은 남자 직원이 문을 열었다. 서재였다. 넓은 공간이 책으로 가득 차 있다. 그곳 중앙엔 늙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눈썹에도 흰 털이 섞인, 뭔가 흰털의 사자를 닮은 남자였다.
이어 남자 직원이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서재 청소는 어떻게 할까요, 회장님.”
회장이라 불린 늙은 남자가 보던 책을 덮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긴 됐어요, 다른 곳부터 하지.”
“알겠습니다.”
이때.
-타닷!
남자 직원 뒤로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14살이나 됐을 법한 어린 남자아이였다. 아이는 곧장 서재 안의 회장이라 불린 늙은 남자에게 붙었고.
-스윽.
급작스레 두 손을 올렸다. 일본 수어였다.
[“할아버지, 어제 엄청난 일이 있었어요!”]
회장은 아이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면서도 감격했다.
‘웃었어? 늘 감정 없이, 죽을 표정이나 짓던 녀석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회장은 애써 놀람을 감추며 금세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극한의 감격이 묻은 웃음이었다. 이어 회장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 역시 양손을 올렸다. 수어였다.
[“그래. 들어보자, 어떤 일이 있었니?”]
[“제가 토크쇼 방청객 당첨됐다고 말씀드렸었죠? 거기에 다녀왔는데! 배우님이 일본 수어를 엄청엄청 잘하셨어요!”]
[“그 배우는 한국의 배우잖아? 그런데 일본 수어를 할 줄 알아? 이름이 아마- 미안해,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이는 ‘아메토크 show!’ 방청객 중 강우진과 일본 수어로 대화한 어린 남자였고.
[“강우진! 그런 반짝이는 배우님도 수어를 하실 줄 안다는 게 신기했고, 또 수어로 대화를 한 게 너무너무 기뻤어요!”]
회장이라 불린 늙은 남자의 하나뿐인 손자였다. 곧, 회장은 거의 10년 만인 손자의 방글대는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면서도.
‘수어를 해? 그래, 그렇군. 그 한국의 배우도 나와 같은 사정이 있는 모양이야. 아니고선 수어를 습득할 이유는 없으니까.’
왜인지 멋대로 착각의 시동을 걸었다.
< 출국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