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값 (6) >
아침, 시간은 10시쯤. 도로를 달리는 익숙한 승합차가 눈에 띈다. 강우진의 차였으니까. 다만, 내부엔 최성건 등 늘 보이는 우진의 팀은 보인다만 우진이 타고 있지 않았다.
당연했다.
지금 강우진을 태우러 가는 중이었으니까. 어제 우진의 퇴근이 너무 늦은 탓에 출근을 좀 늦췄다. 따라서 승합차의 행선지는 강우진의 오피스텔. 참고로 오늘도 역시 우진의 스케줄은 풀이었다. 오전에 윤병선 PD를 포함한 ‘우리네 식탁’팀과 미팅이 시작.
미국 출발이 4일 남았으니까.
뒤로 인터뷰 몇 건을 소화한 뒤, 늦은 점심에는 ‘실종의 섬’ 촬영을 위해 부여로 넘어간다.
이때.
“허-”
얼굴에 피곤함이 묻은 조수석의 꽁지머리 최성건이 핸드폰을 보며 옅은 탄성을 뱉었다. 그러자 뒤쪽 자리 여러 스타일리스트 중 메인인 한예정이 반응했다. 조수석 의자에 붙어 묻는 그녀.
“왜 그러세요, 대표님.”
“아니 좀 뜬금없는 기사가 떠서.”
“그래요? 보여주세요.”
파란 단발인 한예정의 물음에 최성건이 핸드폰을 올렸다. 바로 보이는 기사.
『[단독]모습 드러내지 않던 안가복 감독, 돌연 대배우 심한호와 식사 포착···전설 쓸 100번째 영화의 주연은 심한호로 낙점?/ 사진』
국내 초거물들이 나란히 찍혔다. 안가복 감독과 대배우 심한호. 둘은 원래도 친한 사이라 문제 될 건 없지만 기자가 적은 타이틀이 눈에 띈다. 곧, 다른 스타일리스트들이 한예정의 등에 붙어 기사를 확인했다.
“헐- 대박. 시, 심한호님??!”
“뭐야 이거. 진짜 심한호 선배님이 ‘거머리’하는 거예요??”
“에이. 그냥 밥 먹는 거 찍어놓고 타이틀은 기자 멋대로 적은 거 같은데.”
“근데 타이밍이 딱이긴 하잖아요. 안가복 감독님이 100번째 작품 시작했고! 우진 오빠 뒤로 픽한 게 심한호 배우님이면······”
그녀들이 흥분한다. 워낙에 심한호가 배우판에 끼치는 영향이 거대했기 때문. 감독이 안가복에 심한호까지. 그 사이의 껴진 강우진이 작게 보일 지경이었다. 다만, ‘거머리’에 확정된 우진의 캐스팅 건은 아직 대외비였고, 웅성대는 스타일리스트들을 뒤로 한 채 최성건이 턱을 쓸었다.
‘심한호 배우? 흠-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아니, 예상 했어야 했나? 두 사람이 친하긴 하지······이 기사 당장은 찌라시 정도로 보이긴 한다만. 만약에 진짜면-’
가뜩이나 ‘거머리’는 퍽 많은 의미가 부여된 작품이었다. 국내 영화계 역사의 획을 그을 안가복 감독의 100번째 작품, 칸 영화제, 강우진의 국제영화제 데뷔 등.
여기에 대배우 심한호까지 끼면?
‘판이 무지막지하게 커진다.’
여기서 최성건은 일단 모든 상황을 상정한다. 생각해야 할 것은 강우진과 심한호의 케미. 심한호는 30년 차 대배우고 강우진은 1년 차 새내기. 이 그림을 대중들은 어떻게 볼까? 연예계 모든 이들은? 둘의 연기 합은?
그리고 강우진의 생각은?
늘 타인에 휘둘리지 않는 우진이었지만, 심한호는 일반적인 탑배우들과는 급이 천지 차이였다.
‘우진이가 약간 부담을 느낄지도 몰라.’
행여 그렇다면 안가복 감독은 심한호를 포기할 수 있나? 최성건이 이런저런 고뇌를 뻗어 나가고 있을 무렵, 도로를 달리던 승합차는 강우진의 오피스텔에 도착했고.
-끼익.
언제나 멈추는 지하주차장에 멈췄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마자 모자 쓴 강우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도 역시 시니컬함이 극한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한예정 외의 스타일리스트들과 장수환의 인사를 받던 우진이 차에 올랐고, 승합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꽁지머리 최성건이 강우진에게 소식을 전했다.
“우진아, 톡으로 기사 하나 보냈는데 그것부터 좀 봐라.”
“예, 대표님.”
묵묵하게 답한 우진이 핸드폰을 확인한다. 잠시간 기사를 읽는 그. 단단한 표정에 변화는 없다.
허나.
‘와- 씨, 실화냐 이거?’
내면으로는 화들짝 놀랐다. 심한호? 심한호라니??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대배우였으니까. 과거 우진은 심한호의 영화를 보며 ‘연기 지리네-’하던 적이 많았다.
‘심한호는 신급이자너? 근데 나랑 같은 영화를 찍어??!’
다시금 현실감이 무뎌진다. 부담감이 쌓였다. 이쯤 최성건의 입에서 뱉어지는 물음.
“확실한 건 아닌데. 만약 그거 진짜라면 넌 어떻게 생각하냐?”
고개 든 강우진의 대답은 냉정하며 심플했다.
“상관없습니다.”
속으로 부담감을 짓밟고 있었으니까.
‘몰라, 씨. 똑같은 할아버지로 보면 돼.’
극한의 마인드컨트롤이었다.
한편. ‘우리네 식탁’ 사무실.
오피스텔 사무실에 모인 ‘우리네 식탁’ 팀은 그야말로 분주했다.
“PD님! 소품들 챙겨요??!”
“챙겨야지. 아- 근데 미국 현지에서 살 수 있는 거면 빼. 괜히 입국 심사만 늘어진다.”
“네네! 하긴, 미국 현지 시찰 갔을 때 코리아 마켓 많이 봤어요.”
작가들, 연출팀 등 수십 인원들이 바삐 짐을 챙긴다. 안경 낀 윤병선 PD도 마찬가지. 이미 그의 사단 중 반은 미국에 넘어간 상태기도 했다. 한국의 정리는 윤병선 PD팀이, 미국 현지의 사전 준비는 메인 작가팀으로 나눠서 진행하기 때문.
“미국 쪽 숙소 문제는 해결됐냐??”
“네! 통화해봤는데 잘 정리됐다고 했어요!”
“다시 확인해보고, 슬슬 출연자들 연락 돌려봐! 챙길 짐 리스트도 보내주고.”
“알겠습니다!!”
“5일 아침부터 출발 동선 꼬이면 난리 난다?? 그리고 우진씨 어디쯤이래?”
“거의 다 오셨대요!”
오늘 윤병선 PD가 강우진과 미팅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네 식탁’의 핵심이기 때문. 즉, 요리. ‘우리네 식탁’에서 요리가 빠지면 빈 깡통과 다른 바 없다.
“서두르자! 우진씨랑은 점심 먹으면서 미팅하게!”
같은 시각, 인천.
인천에 위치한 초대형 리조트 호텔인 ‘파라다이스 S시티’. 커다란 호텔은 물론이며, 대형 수영장, 카지노, 클럽 등. ‘파라다이스 S시티’는 호텔이라기보단, 하나의 휴양지라 봐도 무방할 정도의 규모였다.
그런 ‘파라다이스 S시티’ 중 행사를 책임지는 초대형 홀인 ‘플라자’엔 공사가 한창이었다.
“무대!! 여기 무대 쪽 좀 봐주세요!”
“잠시만요!”
“조명 돌려볼게요! A구간! 예- 괜찮아요! B구간!”
“여기 옆에 스크린은 언제 설치되나요?!”
“확인하겠습니다!!”
시설팀으로 보이는 인원들 수십에 공사를 진두지휘하는 팀이 또 수십이다. 사람은 넘치지만 공간이 워낙 넓어선지 그닥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 이어 명찰을 목에 건, 손에 무전기를 든 남자가 제일 앞쪽 무대 앞에서 외쳤다. 그의 바로 위엔 커다란 스크린이 몇 개 달려있었다.
“로고부터! 준비된 로고부터 출력해보세요!!”
곧, 위쪽의 컴컴한 스크린이 켜지며 영상이 틀어졌다. 검은색과 금색이 휘몰아치더니 이내 트로피 하나와 그 밑으로 타이틀이 박힌다.
-[2020년 제41회 청룡영화제]
그랬다. 이 ‘파라다이스 S시티’는 올해 청룡영화제가 열릴 장소였다. 청룡영화제는 어느새 몇 주 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오케이!! 다음 홍보 영상이요! 좀 서두릅시다!!”
2020년의 끝이 한 달도 안 남았다.
늦은 오후쯤.
‘거머리’의 소식이 계속해서 몸집을 물리던 시각, 송만우 PD가 총괄 겸 대표로 있는 DM프로덕션의 대회의실이 붐볐다. 생긴지 얼마 안 된 제작사라 이 대회의실이 가득찬 건 처음이었다.
ㅁ자 책상을 가득 채운 인물들.
어디선가 본듯한 또는 생소한 사람도 보인다. 그중 입구쪽 상석에 앉은 이는 매우 익숙한 얼굴이었다. 드라마판 거물 송만우 PD였다. 그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수십 인파가 주르륵 앉은 형태. 곧, 턱수염 송만우 PD가 경량 패딩을 벗으며 모두에게 선언했다.
“자- 시작합시다.”
송만우 PD가 메인이라면 뭐겠는가? 최나나 작가의 신작인 ‘이로운 악’의 제작 회의였다. 물론, 처음 시행하는 것. 즉, 둘러앉은 인원들은 ‘이로운 악’의 키스탭들이면서도 송만우 PD의 사단. 그렇기에 익숙한 인물이 있는 것. 한량에서도 함께 했었으니까.
이어 턱수염을 쓸던 송만우 PD가 작게 숨을 뱉으며 물꼬를 튼다.
“일단, 캐스팅부터 얘기해볼까?”
키스탭들은 모두 앞쪽에 준비된 태블릿을 들었고, 송만우 PD의 옆쪽에 앉은 얼굴이 각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캐디(캐스팅 디렉터)였다.
“그- 시작에 앞서서 PD님, 혹시 강우진씨 캐스팅을 어떻게 됐습니까?”
강우진의 이름이 나오자 키스탭들 모두가 송만우 PD를 봤고, 그는 턱을 긁으며 조금 기다리란 손짓을 보였다.
“이미 대본은 넘겼고, 우진씨가 재밌다고 말하는 것까진 들었지. 긍정적으로 봐도 돼요.”
키스탭들 사이로 ‘오오오’ 따위의 탄성이 뱉어진다. 그것에 송만우 PD가 찬물을 끼얹었다.
“근데 아직 확정 연락은 못 받았어요. 뭐,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워낙 리딩이 빠른 친구니까 금방 답을 내릴 거야.”
천천히 고개 끄덕이던 캐디가 답했다.
“알겠습니다. 근데 아시다시피 ‘이로운 악’은 무조건 남주부터 확정 지어야 됩니다. 나머지 배역은 그 뒤에 진행해야 돼요.”
“알지.”
이때 뚱뚱한 촬영 감독이 끼었다. 한량에서도 카메라를 맡았었다.
“캬- 그나저나 우진씨 죽이는구만. 박대리하던 게 어제 같은데, 벌써 송 PD 작품 단독 주연? 것도 데뷔 1년 만에?”
마찬가지로 한량에서 봤었던 미술 감독이 끼었다.
“요즘 우진씨 몸값이 어떻게 돼요?”
캐디의 대답은 빨랐다.
“시장 평가로는 보통 육천까지는 보고 있어요. 근데 더 오르겠죠. 다들 이번 ‘얼어죽는 연애’ 상황 보셨어요? 종합 시청률이 12%, 근데 강우진씨 등장으로 몇 프로가 왔다갔다 했는지 아십니까?”
“순간 최고 시청률이 19%쯤 나왔지?”
“맞아요. 이젠 강우진씨는 뭐 명실상부 티켓파워 묵직한 배우로 자리 잡은 거죠. 거기다 우진씨가 이미 합류한 작품들도 죄다 초대형들이고.”
이 순간, 팔짱 낀 송만우 PD의 뇌리에서 강우진의 가격이 상승했고.
‘육천- 이상? 어쩌면 칠천?’
태블릿을 내려보던 캐디가 주제를 바로 잡았다.
“지금 보시는 게 강우진씨가 확정됐을 때의 A안입니다. 옆의 거가 제가 짠 B안이요. 우진씨 없는 버전.”
“이왕이면 우진씨랑 같이 가면 좋은데 말이지.”
“그렇죠, 여기 계신 분들 중 반 이상이 한량에서 같이 작업했으니까. 호흡도 잘 맞고.”
이때였다.
“근데 송 PD님?”
중간쯤 앉은, 대체로 근육질인 남자가 송만우 PD를 불렀다. 무술 감독이었다.
“강우진씨 ‘무술’은 괜찮나?”
“뭐가?”
“뭐긴. ‘이로운 악’ 이거 가뜩이나 액션씬이 많잖아. 내가 지금 대본 보고 무술 콘티를 짜고 있는데, 얼추 나온 각만 봐도 대충 연습만 3개월이 넘는다고. 근데 이걸 우진씨가 소화할 수 있냐는 거지. 지금 그 친구 스케줄이 오바이트 수준이라며?”
“아- 흠.”
“알겠지만 무술 연습 들어가면 몇 주 깨작하는 게 아니라 3달은 진득하게 해야 되는데, 우진씨 스케줄 빡빡해서 그걸 소화할 수 있냐는 거지.”
송만우 PD 포함 키스탭들은 금세 이해했다. 대답은 송만우 PD가 했다.
“3개월? 그 정도면 되나?”
“최소야, 최소. 물론 종일은 아니라도 하루에 4시간 이상씩은 해줘야지. 내가 알기론 우진씨는 아직 액션 쪽 작품은 없었잖어.”
“그렇지. 대놓고는 처음.”
“우진씨 연기야 죽이는 건 알겠는데, 무술 쪽은 또 다른 영역이니까 확인해봐야 되지 않나?”
타당한 의견이었다. 곧, 키스탭들 사이로 걱정이 하나둘 나온다.
“하긴, 우진씨가 의외로 무술 쪽이 허당일지도 모르고.”
“근데 한량 촬영 때 체력 하나만큼은 오지지 않았나? 배우들 다 골골댈 때 혼자만 멀쩡했고.”
“그거랑은 또 다르지. 무술은 기술이니까. 왜 있잖아? 연기 잘해도 무술은 잼뱅인 배우가. 예를 들면 이번 ‘얼어죽는 연애’의 정장환?”
“아아- 정장환이 무술 약해서 영화 쪽은 잘 안 팔리죠?”
“확실히 우진씨 쪽에 확인해보긴 해야겠네.”
걱정이 심화된다. 허나 턱수염 송만우 PD의 표정은 무척이나 딴딴했다.
“우진씨가 무술 좀 어색해도 괜찮아. 연기로 씹어먹으면 되니까.”
12월 2일, 아침.
강우진의 승합차 안. 한창 서울의 도로를 달리고 있는 승합차. 내부엔 당연하겠지만 강우진과 그의 팀들이 가득찼다. 현재 우진은 모자를 푹 눌러쓴 상태였고, 승합차가 가야 할 목적지는 청담동 샵이었다. 오늘 첫 스케줄론 ‘강우진 부캐’ 채널의 촬영이 있었다. 새 컨텐츠인 요리 쪽이었고 게스트도 있다.
바로 화린.
어쨌든.
-팔락.
모자 쓴 강우진은 묵묵한 얼굴로 뭔가를 읽고 있었다. 저번 주에 송만우 PD가 넘겨줬던 ‘이로운 악’ 대본이었다. 이미 틈틈마다 읽어선지 1화를 넘어 2화로 접어든 상태.
거기다 2화도 거의 다 읽은 듯 보였고.
“······”
정확히 10분 뒤, 승합차가 막히는 도로에 멈췄을 때 강우진이 읽던 대본을 덮었다. 표정은 시니컬하지만 속으론 엄지를 세웠다.
‘존잼. 와- 씨, 이걸 진짜 최나나 작가님이 쓴 건가?’
곧, 강우진이 창밖 상황과 시간을 확인했다. 더불어 자신의 컨디션도. 시간은 꽤 걸릴 것 같았고 본인은 쌩쌩했다.
‘살짝 맛만 볼까?’
속으로 읊조린 우진이 ‘이로운 악’ 대본 옆에 붙은 검은 사각형을 몰래 찔렀다. 재빨리 변하는 시야. 그는 금세 모든 것이 컴컴한 아공간에 진입했고, 쭉 기지개를 켜면서도 단단히 장착했던 컨셉질을 풀었다.
그리곤 나열된 흰 사각형 앞으로 걸었다.
“‘이로운 악’ 1화만 갔다 오자.”
강우진이 손을 움직인다.
-[9/대본(제목: 이로운 악), S+급]
-(1화)/(2화)
-[*완성도가 매우 높은 드라마 대본입니다. 100% 리딩이 가능합니다.]
당연히 그가 선택한 것은 ‘이로운 악’. 이내 우진의 눈앞에 박히는 글자들이 바뀌었고.
-[9/대본(제목: 이로운 악)을 선택하셨습니다.]
-[리딩(경험) 가능한 인물을 나열합니다.]
당당하게 제일 첫 번째에 있는 남자 주인공 이름을 선택하는 우진. 그리고 짧은 순간 번지는 침묵.
[“······”]
그리곤 매우 익숙한 로봇 같은 음성의 여자 목소리가 아공간에 울렸다.
[“기본 스팩 이상의 능력이 감지됩니다. ‘무술’을 먼저 습득합니다.”]
강우진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평소의 컨셉질에선 볼 수 없는 짙은 미소였다.
“오우- ‘무술’?”
< 몸값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