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3) >
LA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인천 공항에서 출발한 이 비행기는 하늘에 뜬지 약 2시간 정도 지난 상태였고, 앞으로 LA 국제공항에 도착하기까지는 약 11시간 정도 걸릴 예정이었다. 특이한 건 이 비행기에 방송팀이나 연예인의 스탭이 퍽 많이 타고 있다는 것.
‘우리네 식탁’ 팀이었다.
그들만으로도 수십 명인데 출연자들의 스탭들까지 합치니 규모가 상당했다. 그중에선 ‘우리네 식탁’의 출연자들도 섞여 있었고, 무심한 얼굴인 강우진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보기엔 덤덤해 보인다만 가슴 속 벅참이 가득했다.
‘구름 개많네. 와- 장관이다, 장관.’
마치 소풍을 가는 아이와 같은 마음. 알맹이가 토종 한국인인 우진은 자신이 미국에 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으니까. 분명, 올해 초 디자인회사에 다닐 땐 상상도 못 했던 절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심지어.
‘내가 미국에서 예능 촬영을 하다니.’
목적이 휴가차 가는 관광이 아닌, 무려 예능계 거물 윤병선 PD의 프로에 출연자로서 촬영을 가는 것. 비행기 안 우진은 새삼 인생이 요지경 같다는 걸 실감했다.
이때.
“우진씨.”
오른쪽 자리, 긴 생머리를 묶은 홍혜연이 우진의 옆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을 걸었다.
“무슨 멍을 그렇게 때려요? 추억에 잠겼어요?”
참고로 비행기의 출연자들 좌석은 팀별로 앉게 됐다. 주방팀인 강우진과 홍혜연, 화린과 하강수, 사장 역할인 안종학과 막내 연백광. 어쨌든 홍혜연의 질문에 창밖 보던 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추억? 뭔 추억.
애초 미국행 비행기가 난생처음인데 추억 따위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다 강우진이 번뜩 자신에게 씐 착각들이 상기됐다. 유학파 어쩌고 그 얘긴가? 이미 짙게 깔린 부분. 하지만 우진은 있지도 않은 미국의 추억을 만들긴 귀찮았다. 여기서 답은 대충 어물쩍 넘어가기. 그리고 약간의 허세를 첨가해준다.
자연스레 목소리가 촥 깔린다.
“아니요. 그냥 작품 생각을 좀.”
황당하게 픽 웃은 홍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한다.
“이 와중에? 노력형 천재인 건 알겠는데요, 좀 쉬면서 해요.”
“쉬면서 합니다.”
밖에서 말고 아공간에서.
“언제? 난 못 본 것 같은데? 다낭에서 ‘실종의 섬’ 찍을 때 보니까, 쉬는 시간에도 계속 시나리오만 보던데?”
그러니까 그때 아공간에 들어갔었던 거죠.
“안 보실 때 쉬었습니다.”
“웃기시네. 나 계속 우진씨 보고있······아니, 큼! 여튼 딴생각 좀 해요.”
급작스레 주제를 바꾸는 홍혜연.
“시차 적응은 괜찮아요? 뭐, 하긴 미국이 처음이 아니라서 상관없나?”
시차 적응? 지금 가는 LA는 한국과 시차가 무려 16시간. 그래도 뭐 괜찮겠지. 그에겐 아공간이 있으니까.
바로 그때.
“그- 여러분들?”
아까부터 작가들과 얘기 나누던 윤병선 PD가 안경을 추켜 올리며 좌석에서 일어났다. 출연자들에게 전할 말이 있는 모양.
“요즘 비행기 이동 컷은 잘 안 쓰는 추세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몰라 여러분 주변에 미니캠 설치했거든요? 적당히 대화 좀 하다가 주무세요.”
머리를 뒤로 넘긴 안종학이 투덜댔다.
“안 쓰는 추세면 그냥 빼는 건 어때.”
“에이- 이만한 분들 모시고 가는데 한 컷도 낭비할 순 없죠.”
“쥐어짜라, 쥐어짜. 그래서 슬슬 목적지는 알려줄 수 있지 않아?”
“예예 안 그래도 그거 알려드리려고 했습니다.”
비죽 웃던 윤병선 PD가 강우진 포함 출연자들에게 말을 이었다.
“처음 이틀 푸드트럭으로 간다고 말씀드렸었죠? 위치는 노스 할리우스 공원이라는 곳입니다. 거기에 푸트트럭 거리가 있거든요. 숙소도 근처로 잡았고, LA 국제공항 도착하면 먼저 준비된 푸드트럭 구경한 다음에 숙소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슬슬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강우진.
이를 알 리 없던 윤병선 PD가 적당한 일정을 소개했다.
“LA 국제공항 도착하면 이른 아침일 거고, 시차 적응도 있고 하니까 첫날은 쉬엄쉬엄 갑니다. 대신에 푸드트럭 소개, 숙소 소개, 숙소 주변 탐방 정도는 촬영할 거고요. 인서트는 이미 땄어요. 본격적인 건 둘째 날부텁니다.”
설명하던 윤병선 PD가 팔짱 낀 안종학에게 물었고.
“그래서 리더님? 둘째 날 처음부터 해야 할 건 뭐겠어요?”
어깨를 으쓱인 안종학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내가 왜 리더야.”
“형이 사장이라니까?”
“바지사장, 바지사장. 컨셉이 요린데 당연히 리더는 셰프인 우진씨가 해야지.”
“그럼 형은 뭐해.”
“셰프 뒷바라지, 원래 미국 어느 레스토랑을 가도 셰프가 신이야.”
“후배한테 지시받아도 괜찮겠어요? 우진씨 성격에 선후배 가리면서 지시할 것 같지 않은데?”
“뭐 어때. 사실, 지시받는 입장이 제일 편한 거야.”
“속마음 나왔네. 편하고 싶은 거.”
“바지사장이라니까?”
곧, 스탭들 사이로 작게작게 웃음이 퍼졌다. 이어 안종학이 고개를 앞으로 쭉 빼며 강우진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래서 우진씨, 지시 시작하세요.”
급작스레 비행기 안 모두의 시선이 묵묵한 강우진에게 붙었다. 갑자기? 일반적으론 당황해야 할 대목이지만, 강우진은 대수롭지 않게 ‘셰프의 레시피’를 끌어올렸다. 그랬더니 준수한 답변이 순식간에 나왔다.
“메뉴를 정한 뒤 재료부터 선별하고 사야겠죠.”
명답이라는 듯 윤병선 PD가 양손을 쳤다.
“역시 리더님! 참, 근데 푸드트럭에서 선정한 메뉴 전부를 할 건가요? 셰프님?”
“힘들겠죠. 공간도 좁고 동선도 빠듯할 테니. 심플하게 2개 정도면 적당합니다.”
“2개! 오케이, 하실 메뉴도 셰프님이 정해주시면 돼요. 정해진 메뉴에 따라 재료도 사면 되고. LA 도착하고부터는 우진씨가 진두지휘해야겠네.”
이 순간, 강우진은 신인 배우가 아니었다. 셰프 강우진과 같았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십수 시간.
“자자! 움직입시다!!”
‘우리네 식탁’ 팀과 강우진 등의 출연자들이 출국장으로 나왔다. 단숨에 드넓은 공항이 펼쳐진다. 아침이지만 공항에 사람은 퍽 붐볐고, 강우진의 눈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우와- 대박······아니, 우와!’
여러 인종이 뒤섞인 것도 신기했는데, 뭐랄까 미국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어마무시하게 컸다. 옆으로나 위로나. 그들을 둘러보는 강우진은 자신이 호빗처럼 느껴졌다.
‘바, 방금 지나간 저 흑인! 주먹이 내 대가리만 한데??!’
우진이 속으로 흥분을 시작한다. 여긴 다른 나라가 아닌, 다른 행성이라 말해도 무방할 정도였으니까. 와중, 멈춘 우진의 등을 누군가 찹 때렸다.
“뭐해, 가만히 서서.”
덕분에 번뜩 정신을 차린 우진이 가까스로 낮은 음성을 냈다.
“아- 아닙니다.”
하지만 속내의 흥분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미친! 어디냐 여긴 대체!! 같은 지구 맞냐??’
강우진과 ‘우리네 식탁’팀이 LA에 도착했다.
한편, 한국.
미국은 이른 아침이었지만 한국은 늦은 밤이었다. 얼추 11시쯤. 한국은 여전히 여러 이슈로 시끌벅적했다. 특히, 화린 습격 사건은 국내 수많은 커뮤니티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였다. 거기에 출처 없는 소문, 찌라시, 유언비어, 잡소리, 개소리 등이 섞이며 눈덩이는 계속해서 굴렀다.
물론, ‘우리네 식탁’의 미국 도착 소식도 기사로 자주 보였다. 바로 이 시각, 국내 커뮤니티 중 대형에 속하는 곳에 한 게시글이 올라왔다.
-초초초초대박))<화린 송곳 습격 사건> 이거 내 차 블박이 바로 앞에서 찍었음(어그로 아님).avi
타이틀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훤했다. 워낙 핫한 이슈였고 대형 커뮤니티라 그런지 조회수는 금세 300을 넘겼다. 그들 중 반 이상은 속는 셈 치고 클릭한 거겠지. 평소에서 일명 ‘낚시’라 불리는 허위 게시글이 자주 올라왔었으니까.
하지만 약 30분 뒤, 게시글의 조회수가 1000을 넘길 때쯤.
-어? 뭐냐? 이거 찐인디??
게시글의 댓글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헐ㄹㄹㄹㄹㄹㄹㄹㄹㄹ합성인줄 알았는데 이왜진??????
즉, 어그로가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뒤로 하루가 지난 아침 8시쯤.
위치는 경남 진주. 터미널 부근의 죽집. 익숙한 곳이었다. 강우진의 부모가 하는 가게였으니까. 죽집 안은 아직 손님이 없다. 오픈 시간이기에 그랬다.
반면, 우진의 부모 둘은 바빴다.
아빠인 강우철이나 엄마인 서현미는 홀의 테이블을 닦아대고 있었다. 특이한 건 죽집의 인테리어가 바뀌었고, 주방 쪽의 기기나 홀의 에어컨 등이 새것으로 교체됐다.
이유야 간단했다.
전부 아들인 강우진이 해준 것.
거기다 죽집 내부에 달린 우진의 포스터도 퍽 늘었다. 잡지 화보, 광고 포스터, ‘마약상’ 포스터, ‘남사친’ 스틸컷 등등등. 강우진의 팬들도 자주 오는 모양. 벽면 한쪽에 그들의 인증샷 폴라로이드 사진이 우두두 붙어있었으니까.
약간 명소가 된듯한 느낌.
뭐가 됐든.
-스윽.
한창 테이블을 닦던 서현미가 돌연 카운터에서 얇은 책자를 집었다. 여러 신차가 실린 자동차 브랜드의 광고책이었고, 카운터에 가까운 곳에 자리 잡는 아내를 보며 진한 인상의 강우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또 보나.”
“아들이 우리 차를 바꿔준다는데 제대로 골라야지.”
“어제 골랐다매.”
“아침에 일어나니까 어제 그 차는 별로인 것 같아.”
“며칠째고 지금. 고르는 것만 2주를 넘겼잖아.”
“뭐 어때! 좋아서 그런다, 좋아서.”
“두 번 좋았다간 차 이름도 죄다 외우겠네.”
“이미 외웠어.”
간단히 답한 서현미가 다시금 광고책으로 시선을 내렸고, 맘대로 하라는 듯 강우철이 그녀 옆에 앉았다. 그리곤 카운터 위에 올려진 리모컨을 들었다. 정면 벽 쪽에 걸린 대형 TV를 튼 것. TV 역시 이번에 강우진이 새것으로 교체해줬다.
곧.
-스윽.
하품을 쩍 하던 강우철이 익숙하게 채널을 돌렸다. 그가 멈춘 곳은 한 공중파 채널. 시간상 아침 뉴스가 하고 있을 게 빤했다. 강우철은 가게 오픈을 하며 늘 뉴스를 보곤 했기에, 지금 부부의 풍경은 평소와 다를 게 없다.
그렇기에 서현미나 강우철의 모습은 어제와 같았다.
하지만.
[“다음 소식입니다, 며칠 전 가수 겸 배우인 화린씨의 습격 사건을 전해드렸었는데요. 그와 관련해 어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TV 속 뉴스앵커의 멘트 뒤로 서현미와 강우철의 같았던 일상에 해일이 쳤다.
[“송곳을 들고 화린씨를 습격한 괴한 스토커를 제압한 것은 그녀의 경호원이 아닌, 배우 강우진씨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출처는 한 커뮤니티 사이트였는데요? 당시 현장에 차를 주차해둔 시민이 블랙박스 영상을 공개한 겁니다. 강우진씨가 괴한을 제압한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고민희 기잡니다.”]
순간, 리모컨 든 강우철의 눈이 커졌고.
“어? 뭐라고?”
서서히 입이 벌어졌다.
당연히 그의 옆에 앉았던 서현미도 격한 반응을 보였다. 보던 광고책을 내팽개치고 벌떡 일어난 것.
“뭐, 뭐라구??! 내 아들이 뭘 해??! 여보! 방금 뉴스에서 우진이 이름이!!”
“······어어, 나도 들었어.”
그러거나 말거나 TV 속 뉴스는 이미 장면 교체가 시작된 참이었다. 앵커는 사라졌고, 누가 봐도 블랙박스 영상이다 싶은 것이 출력되고 있었다. 커뮤니티에 올라온 영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시작은 화린과 강우진이 주차장으로 나오는 것부터, 동시에 기자의 목소리가 깔린다.
[“화린씨와 강우진씨가 간단히 대화를 나누며 주차장으로 들어섭니다. 이때 송곳을 든 괴한이 나타납니다.”]
영상 속 강우진은 화린을 보호하면서도 달려드는 괴한을 몇 초 만에 휘리릭 제압한다. 짧은 순간, 그가 보인 기술과 담력은 평범치 않았다.
[“화린씨를 등 뒤로 보내며 보호한 강우진씨는 괴한의 팔부터 잡아챘고, 영화 장면을 방불케 하는 모습으로 팔을 꺾은 뒤 괴한의 발을 걸어 바닥에 넘어트립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지만 강우진씨는 침착합니다.”]
뉴스에서는 강우진이 괴한을 제압하는 컷을 몇 번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리곤 포박된 괴한의 송곳을 우진이 뺏는 씬으로 넘어갔다.
[“괴한을 제압한 강우진씨는 그에게서 무기인 송곳을 빼앗아 직원들에게 넘깁니다. 곧, 경호원들이 합세하며 괴한은 완벽하게 포박됩니다.”]
그 이후의 상황까지.
[“보시다시피 화린씨를 구한 것은 강우진씨지만 알려지지 않은 건, 강우진씨가 외부로 알리지 않게끔 조치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어 뉴스에선 블랙박스 영상이 업로드된 커뮤니티 모습을 출력한다.
[“이 영상을 접한 네티즌들의 댓글은 이미 수백을 넘겼습니다. 영화를 보는 줄 알았다, 제압하는 기술이 심상치 않다, 합성이나 CG다, 이런 영웅적인 미담을 숨긴 게 더 멋있다 등의 반응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곧, 뉴스에선 다른 소식을 알리기 시작했으나 강우철과 서현미는 얼어붙었다. 그저 멍하게 TV를 올려보고 있을 뿐. 그런 둘 중 입을 먼저 연 것은 서현미.
“저, 저거 우리 우진이 맞아??”
“······맞는데.”
“촬···영이겠지?”
“아닌데.”
대답을 들은 서현미가 고개를 돌려 강우철과 시선을 맞췄다. 둘 다 동공이 매우 확장된 상태였고.
“······우진이 어릴 때 합기도 얼마나 다녔지?”
아주 옛날 강우진의 모습을 상기한 강우철이 짧게 답했다.
“3개월.”
< 미국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