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5대대와 6대대
AN/PRC-9.
널 투척 무기로 쓴다고 했던 말.
아무래도 취소해야 할 것 같다.
“정보국에서 5대대, 6대대가 출발한 뒤, 추가로 저희 1소대를 침투시켰습니다. 1소대장 이강산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긴급상황입니다. 속히 대대장님을 불러주십쇼.”
“정보 확인 절차가 필요하다. 그쪽이 정보국에서 보낸 1소대라는 걸 어떻게 믿지?”
하.
마실 것 없이 호박 고구마를 잔뜩 입에 쑤셔 넣은 듯 숨이 턱 막혀왔다.
통신 암어로 부대를 호출하고, 관등성명과 소속을 정확히 밝혔음에도 연결이 쉽지 않다.
-무슨 일인가. 뭐? 정보국에서 우리 이후에 추가 침투시킨 소대 소대장이라고?
-본인 말이 그렇답니다.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빨갱이 놈들 공작일지 모릅니다.
AN/PRC-9은 상대방 주변까지 선명하게 들리는 성능 좋은 전화기가 아니다.
전파 노이즈 사이에서 들리는 미세한 대화 소리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6대대장일세. 1소대장이라고?”
“그렇습니다. 김현주 대대장님 맞으십니까?”
옥신각신할 시간이 없다.
6대대장과 직감적으로 통하길 바랄 뿐.
“맞네만. 급한 사안이라고? 일단 말해보게.”
“침투 경로인 서화리 가마골에는 이미 인민군 연대급 병력이 매복해 있습니다. 당장 철수해야 합니다.”
“자네가 우리 위치를 어떻게 아는 게지? 끊긴 통신이 급작스레 연결된 것도 그렇고. 부대원들 목숨이 달린 일이야. 정보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네.”
통신이 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6대대는 가마골 인근이거나 가마골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
과거가 틀어지지 않았다면 이틀에서 삼 일 전, 용대리 내무서를 습격해 포로 3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을 것이다.
이것으로도 대대장을 설득할 수 없다면, 사실상 더 설득할 방법은 없다.
“작전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었다면, 대대장님은 3일 전, 용대리 내무서에서 공적을 올리셨을 겁니다. 소식을 전하기 위해 무전기 통달 거리까지 쉼 없이 달렸습니다. 아직 가마골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대대원을 살릴 기회가.”
“애석하게도 자네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자네도 알게야.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정보국에서 온 것이 사실이라면 매우 유감일세. 이강산이라고 했나? 우리 둘 다 무사히 돌아간다면, 남쪽에서 술잔 한번 기울이지.”
왜 말을 듣지 않냐며 탓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결정 하나로 120명의 대대원 생과 사가 갈리는 문제.
김현주 대대장이 유격대 생활로 잔뼈가 굵다 해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충성.”
이젠 침투조로 돌아가야 한다.
-치이이이익 치치치칙 치치치익
AN/PRC-9 무전기가 심한 노이즈 소음을 뿜어댔다.
“대대장님. 대대장님?”
통신 감도가 점점 약해지고 있는 듯했다.
김현주 대대장이 무언가 말하고 있었지만, 군데군데가 끊겨 들렸다.
“이강산···라고 ···했나? 자네 말이 맞았··· 보군. 애석하게도 우린 이미 가마골 안에 ··· 있네. 자네와 술은 아무래도 다음 생에나 해야겠네.”
제기랄.
오대산 호랑이 김현주 대대장과의 마지막 통신이었다.
***
육군본부 총참모장실.
“충성.”
정보과 5과장 한성룡 소령이 각이 선 경례를 건넸다.
“앉지. 그래, 호림은 어디까지 북진했는가.”
총참모장 소장 채병덕.
키는 167cm의 단신이지만, 몸무게가 140kg에 육박하는 거구였다.
앉아있는 의자가 불쌍하리만큼.
“통신이 제대로 되질 않아 추측일 뿐이지만, 5대대와 6대대가 대청봉에서 각자의 침투로로 갈라선 것을 볼 때, 5대대는 삼천리, 6대대는 용대리 인근에서 작전 수행 중일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군.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급히 약속을 잡은 게지? 혹시 지난번과 같은 얘기라면 앞에 있는 차나 마시고 돌아가게나.”
이미 포위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길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채병덕의 태도에 한성룡은 속이 답답해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각하께 보고하기 껄끄러우시다면 더 늦기 전에 8사단장에게 연락해 양동작전이라도 펼칠 수 없겠습니까? 포를 쏠 수 없다면 38선 부근에서 소규모 도발이라도 벌여 이목을 분산시켜야 합니다.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추가로 보낸 1소대까지 몰살당할 게 분명합니다.”
소장과 소령의 차이는 단순히 계급 글자 하나 다른 정도가 아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그저 작은 언덕.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 차이를 모르지 않음에도 한성룡은 아주 간곡한 어조로 북한군의 이목을 분산시키기 위한 추가 작전을 요청했다.
250명이 넘는 젊은 청년들을 사지로 보내고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음에 개탄스러웠으니까.
“이봐 한성룡이. 자네는 군 생활한 지가 언젠데 상사 앞에서 말도 못 가리나?”
“죄송합니다. 참모장님. 하지만···”
“이 나라는 말이야. 국회의원이라는 작자들이 군인을 무식하다고 욕보이면서 본인들은 더 유치하게 구는 나라야. 내 일본 육사 출신이라고 아직도 독립운동할 때 눈빛으로 나를 일본 관리 보듯 한단 말이지. 그런 와중에 문제라도 생기면 열통 터져 살 수나 있겠나?”
“8사단이라면 참모장님 선에서 충분히···”
채병덕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정책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안 된다면, 8사단을 이용한 양동작전.
사실상 마지막 카드다.
“8사단? 8사단은 각하를 설득하는 것보다 더 불가하지.”
채병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혹시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8사단장 이형근이. 그놈 말이야. 내가 일본 육사로 보나 계급으로 보나 내가 훨씬 선배야. 한데 내가 군번 10002번을 받고, 그놈이 10001번을 받았단 말이지. 설령 상사가 부여했을지라도, 사양하는 게 참된 도리 아니겠는가. 그런 싹수없는 놈에게 각하를 건너뛰고 비밀리에 뭔가를 부탁할 수나 있겠는가?”
빌어먹을.
그깟 군번 순서가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덩치만 태산같이 컸지, 속은 멸치 대가리만도 못한 것 같았다.
결론은 1호 군번을 뺏긴 것에 대한 앙심이 남아 못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성룡이 분한 듯 이를 꽉 깨물었다.
“곧 정보국에 지시가 하달되겠지만, 자네가 온 김에 미리 받아가게. 북한 놈들 선전전에 대비해야지.”
채병덕이 몇 마디 문장이 써진 한 장의 서류를 넘겨주었다.
[남한에서는 공작원을 북파한 적이 없다. 청년들이 자주적으로 정의감에 불타올라 공산세력을 섬멸하기 위한 무력항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구국통일구혈단으로 알려졌다.]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
한성룡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실 생각은 없으셨던 겁니까?”
“그날 훈시 말인가? 당연히 진심이었지. 지금도 진심이고. 그깟 위관급, 하사관 계급 나눠주는 게 이 채병덕이한테 어려운 일이겠나? 공적과 함께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말이지.”
작게 파묻힌 눈이 더 가늘어지며 한성룡을 노려봤다.
“그리고 이봐 한성룡이. 받아주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야. 공적을 못 얻고 죽더라도, 나라를 위해 애국할 좋은 방법 아닌가. 이 나라에 너 혼자만 군인이 아니야. 이만 나가주게.”
한성룡이 구호 없는 경례를 마치고 참모장실을 나섰다.
울분이 터져 땅이라도 내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꼭 살아들 돌아오거라···”
머릿속에선 여러 사람이 떠올라 스쳐 지나고 있었다.
동해 특별대 5대대장 백의곤, 오대산 유격대장 6대대장 김현주.
함께 피땀 흘리며 훈련받던 대원들.
수많은 스침 끝에 멈춰선 같은 의외에 인물이었다.
훈련 이틀 만에 북파된 1소대.
소대장 이강산.
스침의 끝에 왜 이강산에게 가장 깊은 여운이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
6대대와 통신을 마치고 돌아온 뒤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북진.
5대대와의 조우.
생각 같아선 침투조와 함께 하루 정도 푹 쉬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집 안방이 아니다.
도착과 동시에 출발을 서둘렀다.
“다녀올 곳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뒤쪽에 있던 김철우가 슬며시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한시가 급하네. 작전에 필요치 않은 이야기는 삼가도록. 어서 자리로 돌아가 출발 준비나 하게.”
“잡담이나 하러 온 것은 아닙니다. 향로봉을 넘으면 삼천리 인근에 화전민이 임시로 지어놓은 낡은 오두막 한 채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식량과 물을 보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게릴라 유격대나 공작원은 현지 도움 없이는 활동이 극도로 제한된다.
소대를 반으로 나누어 지원조의 식량을 전부 침투조가 챙겼음에도 남은 식량은 하루를 채 넘기기 어려워 보였다.
‘6대대가 가마골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다, 지금 속도라면 하루 반나절, 길어야 이틀이면 5대대와 접선 할 수 있겠어.’
다른 부대의 침투 속도가 느린 것이 결코 아니다.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소수의 인원, 나노봇과 가장 선두에서 빠르게 위험요소들을 파악한 뒤 침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쪽 주민들은 믿을 만한 자들인가?”
공작원이 현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북한군도 이미 아는 사실이다.
남파 공작원도 마찬가지니까.
혹여나 잘못 접선했다간, 바로 위치가 노출된다.
연락책을 접선하는 일은 매우 신중해야 할 일이다.
“분대원 중 한 명이 삼천리에 연고가 있다고 합니다. 인민군이 경작물을 강탈해 가는 경우가 빈번해 화를 누른 채 살아가는 반공 인사들이 많다고 합니다. 필시 도움을 줄 겁니다.”
호림부대원들은 월남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북쪽 지리가 훤하고, 자연스레 지역 연고가 형성되어 있는 부대원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도록 하지. 대신 연락책과는 내가 가장 먼저 만나보겠네.”
침투조를 선발할 때처럼 나노봇을 이용해 심박이나 미세한 표정 변화로 1차 적인 거름망 역할을 할 계획.
사람 마음이라는 게 화장실 들어갈 땐 반공, 나올 땐 좌익이 되어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소대장님. 임무를 마치고 남으로 내려가면 집에 한 번 오십쇼. 닭장에 있는 굵은 씨암탉과 약주 한 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출발.
대답보다 먼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앞으로 던지며 조용히 말했다.
“이왕 초대할 거, 두 마리 준비하게.”
넓고 넓은 첩첩산중에 벌레만이 자신을 알아달라는 듯 울어댔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나무, 바위와 같은 장애물이 있다면 반드시 경계,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38선을 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향로봉에서부터는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반복된 일이었다.
‘이쯤이면 슬슬 보일 때가 됐는데.’
삼지령에 거의 도착할 즈음이었다.
끝도 없이 봐오던 똑같이 생긴 풀과 나무들 사이에 이질적인 것이 눈에 띄었다.
정지.
곧장 정지 수신호를 보냈다.
우거진 수풀 속에서 몸을 완전히 가린 채 아주 조금 내밀고 있는 총구.
그 조금 위에는 아주 작은 하얀 천 쪼가리로 만든 피아 식별 띠가 햇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왜 5대대 위치가 오랫동안 발각되지 않았는지 알겠군.’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김철우를 포함한 침투조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만큼 주변 환경을 이용한 완벽한 위장과 매복이었다.
김철우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한번 정지 신호를 보내 의사를 전달한 뒤, 수풀 사이로 걸어나갔다.
10m쯤 앞으로 걸어나갔을까?
총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두 손을 들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말라는 작은 소리와 함께 수풀이 일렁였다.
일렁이는 수풀 속에서 열 명쯤 되는 인민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견장에 자그마한 하얀 천을 묶고 있었다.
찾았다.
“백의곤 대대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철컥.
뒤통수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와 감촉이 느껴졌다.
조그만 쇠붙이가 닿아있는 느낌.
지금껏 살면서 뒤통수에 총구가 대여 본 적은 없지만, 총이라고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누군데 나를 찾는 거지?”
뒤통수에서 두껍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대대장님. 호림부대 1소대장 이강산이라고 합니다.”
뒤통수에 총구를 겨눈 채 나누는 백의곤과 정겹다면 정겨운 첫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