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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12화 (12/149)

12화. 국사봉 포위망을 뚫어라.

뒤통수에 당장이라도 바람구멍이 생길 것 같은 싸늘한 느낌.

등골 사이로 식은땀이 구슬처럼 굴러가는 느낌이랄까?

“허튼짓했다간,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버릴 거네. 자네가 호림부대 소대장이라고? 대원들은 어디 있나. 안내해.”

백의곤이 대답을 재촉하듯 총구에 힘을 줘 머리를 밀어냈다.

“뒤통수가 따가워 도무지 고개를 돌릴 수 없으니 말할 수나 있겠습니까. 홀로 무기도 내려놓은 채 대대장님을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이제 총을 거둬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0명의 사람.

10개의 총구가 모두 나를 향해 있는 느낌은 오래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감이란 참 신기하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음에도, 싸늘한 금속의 감촉이 조금 멀어진 것이 느껴졌다.

“차근차근 설명할 수 있는 머리가 목에 붙어 있으려면, 대원이 있는 곳으로 먼저 안내하는 게 좋을 거야. 아직 뒤통수에 총알이 박히고 입 여는 사람은 본 적이 없거든.”

거참, 수염이 덥수룩한 이 대대장 아재.

말한 번 소름 돋게 한다.

침투조가 있는 곳을 향해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겼다.

빠르지 않은 발걸음이었음에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전부 총 내리고 나와. 내 뒤통수에 총을 겨누고 계신 분이 5 대대장님이니까.”

뒤통수에 총을 겨누고 있다는 말은 굳이 안 해도 되는 말이었지만.

하고 싶어서 했다.

아주 앙증맞은 복수라도 하고 싶었으니까.

“두 손 보이게 손들어!”

김철우를 선두로 매복해 있던 침투조가 모습을 드러내자, 5 대대원들이 일제히 침투조에게 총을 겨눴다.

“시키는 대로 하게.”

“자··· 대대장님 이제 이야기를 듣고··· 혹시 뒤통수에 총알 박는다는 이야기는 사과···”

뒤통수에 총알을 박는다는 둥.

머리와 목을 분리하겠다는 둥.

이제 상황을 설명하고, 내가 들은 험악하고 소름 돋는 말에 작은 사과라도 받아야겠다.

‘똑같이 개고생하는 처지끼리 서운하게.‘

이야기를 막 꺼내려는 찰나, 등 뒤에서 먼저 말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이, 거기 너. 고개 좀 돌려봐. 너 박봉덕이 아니니?”

“뭐야, 정상필. 네가 왜 거기 있니?”

갑자기 어디서 이산가족 상봉하는듯한 분위기.

슬프고 감격스러운 배경음악이라도 깔렸다면 분위기 죽여줬을 텐데.

“아는 놈인가?”

백의곤이 정상필에게 물었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놈입니다. 소대장은 확실치 않지만, 저놈이라면 믿을 만합니다.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잠깐?

정상필 저 친구 말을 좀 이상하게 한다.

보장할 만큼 친구 놈을 믿는다면, 그놈이 따르는 소대장은 당연히 믿어야 하는 게 당연지사 아닌가?

“다들 총 내리게. 내 무례했다면 사과하지. 호림 5대대장 백의곤일세.”

첫인사를 건넨 뒤, 답을 받기까지 더럽게 오래 걸렸다.

***

예상보다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

5대대 본대가 있는 본거지로 향하는 동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지나온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애석하게도, 6대대는 그렇게 통신이 끊겼습니다.”

“대원들이 무탈하게 탈출했기를 바랄 뿐이네.”

백의곤이 심오한 표정으로 거친 수염이 난 턱을 쓸었다.

무탈한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현재 5대대 상황은 어떻습니까?”

“음··· 우리가 처한 상황이라··· 딱 이렇게 표현하면 좋을 것이네. 첩첩산중에서 만난 똥 구린내 나는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통을 집어넣고 냄새를 맡는 기분이네.”

비유 한 번 찰지네.

백의곤 대대장은 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렇게 명랑하고 유쾌한 사람이 어떻게 동해 별동대를 지휘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만, 사적인 대화를 나눌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사들 나누게. 여기 이자가 1중대장, 2중대장은 안타깝게도 핏골에서 전사했네. 현재 2중대장 공석은 따로 메우지 않고, 내가 직접 지휘하고 있네.”

“1중대장 김정은입니다.”

김정은?

참 예쁜 이름이긴 한데.

자꾸 머릿속에 익숙한 얼굴이 떠오른다.

“1소대장 이강산입니다.”

조용히 거수경례를 올리자 백의곤이 손을 저으며 만류했다.

“그런 허례허식은 집어던지고 앞으로 임무만 생각해 봄세.”

먼저 입을 연 사람은 1중대장이었다.

“6대대의 전투력 손실 정도를 알 수 없는바,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남은 대원들로 평양에서 원산 일대를 장악하는 것은 매우 힘들 것으로 사료 됩니다. 따라서 가장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원산항을 최종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굿. 좋아.

아주 정확하고 나이스 한 판단이다.

5대대가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다 해서, 아무런 피해 없이 삼지령까지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대 규모의 적 추격대와의 산발적인 교전, 핏골과 삼지령에서의 전투로 이미 많은 대원이 목숨을 잃은 뒤였다.

말이 대대지, 현재 남은 대원들과 침투조를 합쳐도 정규군의 중대보다 작은 규모에 불과했다.

“아주 훌륭한 작전 계획이네만, 원산에 도착하려면 앞으로 회양, 고산, 안변을 거쳐야 하는데 소대장 말로는 이미 우리 주변을 인민군 정규 3개 사단이 겹겹이 포위망을 둘러싸고 있다고 하네. 피해를 최소화해 침투할 방법이 있겠는가.”

“그거야 적의 포위망이 가장 약한 곳을 찾아 공격한다면···”

1중대장이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닦아냈다.

목표 설정은 아주 좋았다.

딱 거기까지.

그럴싸한 목표는 누구나 있다.

문제는 목표를 어떻게 달성하느냐.

포위망의 가장 약한 곳을 찾아 공격한다는 말은 좀 나쁘게 말하면 개 짖는 소리나 다름없다.

“현 상황에서 포위망을 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임무를 완수할 유일한 방법은 성동격서(聲東擊西)를 이용하는 방법뿐입니다.”

“계속해보게.”

“성동격서라 해서 적을 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복잡한 산악지형인 국사봉 고지까지 적을 유인, 소규모 산발적인 교전을 미끼로 적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적이 미끼를 물어 포위망에 좁은 구멍을 만들고 흩어져 남하해 정보국에 복귀하는 것. 그것이 5대대에 있어 최선입니다.”

“대대장님. 지금 저 말도 안 되는 말을 계속 듣고 계실 겁니까? 그 말은 임무를 포기하고 도망가자는 말밖에 안···”

“그리고.”

정은아.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5대대가 벌려준 틈으로 저와 침투조가 빠져나가 북진. 목표인 원산항 폭파 임무를 수행할 겁니다.”

“고작 10명으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대대장님. 침투조를 중대로 편입해 인원을 늘려 포위망을 뚫어야 합니다.”

중대장이 점점 화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키워갔다.

백의곤 대대장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둘 사이에 오가는 설전을 들을 뿐이었다.

“적은 중기관총에 신형 박격포까지 보유한 사단입니다. 무모하게 포위망을 뚫으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대청봉 1708고지에서 동지들의 생 무덤을 만들고, 결의를 다지던 것을 잊으셨습니까. 대대장님! 죽음이 두려웠다면 애초에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 호림 모두가 이곳에 뼈를 묻는다면, 역사가. 국가가 우리의 명예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아니, 1중대장은 틀렸다.

이럴 때 딱 속으로 하기 좋은 말이 떠올랐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명예?

내가 살던 시대에 참전용사들이 무관심 속에 생계를 위해 폐지 줍고 있는 미래를 본다면, 중대장은 고꾸라질 것이다.

호림?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은 호림이 뭔지도 모른다.

살아야, 살아서 알려야.

그래야 명예를 위해 외쳐 보기라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명예로웠다고.

그래야만 이 좆같은 전쟁을 겪은 참전용사를 향한 대우가, 시선이 바뀔 티끌의 가능성이라도 있을 테니까.

“소대장.”

미동도 없던 백의곤에 입이 열렸다.

“예. 대대장님.”

“왜 우리 5대대가 자네 계획대로 움직여야 하는지 나를 설득할 수 있겠나?”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작전에 성공할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 애국심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는 방법. 어떤 명령을 내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무엇보다 제 작전을 성공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성공시킬 자신이 있었다.

성공시켜야만 하고.

“서두르지, 이러나저러나 우리 모두 국사봉 고지를 피해갈 순 없지 않은가. 일단 함께 가도록 하지.”

백의곤 대대장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국사봉까지 동행을 명령했을 뿐.

***

작전 계획에 대한 설전이 오간 뒤, 그 이후에도 5대대장 백의곤은 말이 없었다.

5대대와 침투조는 금강산 산맥 지류를 따라 계속 북상했다.

밧무재를 거쳐 국사봉 1385고지에 올랐을 때.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북한군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적은 매복하거나 숨어있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전투가 벌어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남은 건, 5대대장의 선택이었다.

내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사력을 다해 포위망을 뚫고 나가야 한다.

침투조가 포위망을 뚫더라도, 5대대의 전멸은 기정사실이다.

대대장 입에서 현명함이 흘러나오길 바라는 수밖에.

“5대대 전원은 들어라.”

제발.

“우리의 목표는 적과의 전면전이 아니다. 놈들이 쳐놓은 포위망에 틈을 벌리기 위해 지형적 이점을 이용한 게릴라 유격전에 돌입한다. 적들이 우리를 추격하기 위해 틈이 벌어졌을 때, 사력을 다해 개별적으로 남하한다. 못다 한 임무는 여기 있는 1소대가 완수할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아라. 5대대장으로서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다. 전원 사격준비!”

백의곤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입꼬리를 씰룩 올려 보였다.

그에게 경례한 뒤, 침투조와 함께 미리 물색해 놓은 지점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10분?

그보다 짧은 시간인 것 같았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함성과 함께 미친듯한 총성이 국사봉 고지를 가득 메웠다.

“신호 줄 때까지 대기,”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포위망을 뚫으려면 말 그대로 신속, 정확, 은밀한 침투가 필요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5대대가 그간 전투에서 노획한 경기관총과 따발총을 쏘아대며 적을 쓰러트렸다.

‘조금만 더.’

5대대가 응전, 후퇴를 계속해서 반복하자 절대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포위망에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퇴! 후퇴하라!

누군가 외친 후퇴 소리에 5대대 대원들이 응사를 멈추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제기랄.

예상보다 빠른 후퇴에 아직 틈이 완벽히 벌어지지 않았다.

“준비.”

포위망을 뚫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틈이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주저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모두 후퇴한 줄 알았던 좌측에서 누군가 따발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다. 출발!”

적들이 좌측에서 쏘아대는 따발총 사격을 피하려 바닥에 그대로 엎드려 머리를 감쌌다.

그 덕에 완벽하지 않았던 틈이 완벽하게 벌어졌고, 침투조와 함께 틈을 완벽하게 파고들었다.

성공.

성공이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그 수많은 적의 포위망을 뚫은 것이다.

탕! 탕! 탕! 탕! 탕!

따발총의 콩 볶는 소리가 사라지자, 이내 일본 99식 소총의 단발 사격 소리가 들렸다.

‘아마 탈출에 실패했겠지.’

끝까지 모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따발총을 잡았던 대원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그때 국사봉 전체를 울리는 듯한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야 이 아가리에서 똥내 나는 빨갱이 새끼들아!”

“앞 통수에 총알을 박아주마!”

“나는 백의곤이다. 으하하하하하하하!”

백의곤 대대장의 마지막 고함이었다.

쾅! 콰과광!

땅이 쪼개지는 듯한 진동과 함께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그가 따발총을 쏘아대던 자리에서 TNT가 터지며 만들어내는 불기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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