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귀환
“뭐? 정말 제대로 확인된 정보가 확실하다는 게지. 어이, 라엄광이 밖에 있나?”
무언가 중요한 보고라도 받은 듯 채병덕 총참모장이 부관 라엄광을 찾았다.
어지간해선 앉은 자리에서 잘 일어나지도 않는 사람이었지만, 급한 듯 직접 문을 열고 나섰다.
“예. 참모장님. 찾으셨습니까.”
채병덕의 소란에 라엄광이 하던 일을 모두 중지한 채 참모장실로 뛰어들어왔다.
“당장 8사단에 차량 보내. 당장. 차량 보낸 뒤에 정보국장 백선엽이 참모장실로 빨리 들어오라고 전달하고.”
말을 하는 도중에도 빨리 듣고 나가라는 듯 손을 밖으로 내저었다.
“참모장님, 8사단에는 혹 어쩐 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운행 사유를 기록 해야 차량 운행허가가 떨어···”
“야 이 새끼야. 내가 이 나라 참모장인데 허락을 맡아? 라엄광이. 너는 되묻지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고 그냥 명령받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알겠나?”
“죄송합니다.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즉시 명령대로 이행하겠습니다. 충성.”
8사단이 위치한 곳은 경기도 양주.
옆 동네 놀러 가듯이 가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육군본부에 소속된 차량을 운행할 때 운행 목적을 적는 일지는 필수였지만, 채병덕 참모장에 엄포에 상상의 나래를 펼쳐 지어내야 할 판이었다.
‘돼야지 호랑 말코 같으니라고···’
라엄광이 이를 갈며 참모장실을 나섰다.
속으로 온갖 욕을 내뱉으며 정보국장을 호출하러 가던 길.
이미 백선엽은 참모장실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똑똑.
“참모장님, 백선엽입니다.”
노크 소리와 거의 동시에 문 안에서 육중한 발소리가 느껴졌다.
“그래그래. 어서 들어오게. 백 대령.”
하루에 두 번이나 직접 참모장실 문을 여는 경우는 전례 없는 일.
좀 전에 부관 라엄광을 찾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방금 부관을 보내 호출하려던 참이었네. 앉지.”
백선엽이 경례를 하자, 경례 따위가 뭐 중요하냔 듯 손을 부여잡았다.
“아무래도 서면으로 보고드릴 사항은 아닌 것 같아, 저도 소식을 전한 즉시 이리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이었습니다.”
“역시 백 대령. 자네는 상관의 마음을 잘 아는 참군인이야. 참군인. 허허.”
채병덕의 가늘게 찢어진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1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랫동안 할 칭찬을 앉은 자리에서 몰아 하고 있었다.
“그래. 지난 달쯤 있었던 원산항에서 원인 모를 폭발이 일어났다는 첩보가 사실이고, 그게 정보국에서 추가로 침투시킨 1소대 작품이라는 게 확실하다는 게지?”
“보안상 자세하고 정확한 작전 경과는 직접 대면해 파악이 필요하겠지만, 사실로 보입니다. 8사단 측에는 이미 협조공문을 보내 두었습니다.”
채병덕이 기겁하듯 손사래를 쳤다.
고개를 같이 휘저은 탓에, 살찐 볼이 좌우로 흔들렸다.
“아니, 아닐세. 협조는 무슨. 이미 이쪽에서 차량이 출발했을 걸세. 8사단에서는 1소대 신원에 대해 모르는 게 확실한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우리 차량이 도착할 때까지 반드시 함구시켜야 하네. 이 정도 업적이라면 광복 이후 군의 최대 업적 아니겠는가. 우리가 짜놓은 판이 완성될 때까지는 그 누구도 끼어들어선 안 되네. 백 대령. 자네만 믿지.”
“참모장님, 혹 각하께도···”
채병덕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네.”
“알겠습니다.”
“신기하단 말이지··· 5대대, 6대대 놈들은 패잔병이 되어 졸래졸래 도망오기 바빴는데, 1소대 그놈들이 어떻게 원산항을 폭파했는지 말이야. 어서 그 낯짝 한번 보고 싶네.”
백선엽은 패잔병이라는 말에 표정이 굳었지만, 이내 표정을 풀어냈다.
반면 채병덕 눈에 뜬 초승달은 해가 떠도 질 줄을 몰랐다.
***
시발.
아니 씨-발!
평소에 욕을 거의 하지 않지만, 욕쟁이 할머니가 쏴주는 욕처럼 찰지고 시원한 욕이 절로 나왔다.
아주 내장 깊숙한 단전에서부터.
“저··· 저 새끼들 뭐야. 무기 버리고 손들어!”
말하지 않아도 버리려던 참이었다.
침투조 모두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본 99식 소총을 바닥에 던졌다.
손든 채 총구가 나를 향하고 있는 이 가학적인 상황에서 기분이 좋을 수가 있다니.
“이등 중사님. 이··· 이 새끼들 이상합니다. 웃지 말고 손 똑바로 들어! 움직이면 쏜다!”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른 9명 역시 마찬가지.
‘하긴, 실성한 인간들처럼 보이겠지.’
얼마 만에 보는 국군 군복이던가.
이제 인민군복이라면 지긋지긋했다.
8사단 관할구역.
경계를 서고 있던 8사단 군인들이었다.
2명뿐이던 경계초소에 10명이 넘는 인원이 인민군복을 입고 나타났으니 까무러치지 않을 수 없었다.
“박 하사! 지원요청 했으니 조금만 버텨 보자고. 절대 놈들에게서 눈 떼지 마라.”
아무것도 안 하는 와중에 뭘 버티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군용트럭 두 대에서 군인들이 재빨리 내렸다.
“이 빨갱이 새끼들 죄다 묶어!”
계급장을 보니 소위다.
소리는 고래고래 지르고 있다만, 짖는 개는 쉽게 물지 못하는 법.
소위의 몸이 어느 부위 할 것 없이 떨리고 있었다.
“다들 내가 했던 말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다 차린 밥상 위에 똥 뿌리고 싶지 않으면.”
눈을 마주치는 대원마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산에서부터 다시 남쪽 38선을 밟으려면, 신속함도 물론 중요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었다.
38선을 넘어 원산으로 북진했을 때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다시 38선을 넘기 직전, 침투조 전원을 모아 신신당부한 말이 있었다.
남쪽에 도착하더라도 정보국에 도착할 때까지 모든 것을 절대 함구할 것.
정보국에 도착해서도 누구나 알만한 것 이외에 다른 정보는 모두 소대장인 나에게 있다고 할 것.
무엇보다 말도 안 되는 유도신문에 절대 넘어가지 말 것.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위협이 북쪽에만 있는 게 아니지.’
일당백?
아니, 원산항 폭파는 사람대비 숫자로 표현하기도 불가능할 만큼 커다란 공적이었다.
남쪽에 있다고 해서, 멸공을 외친다고 해서, 모두가 나와 같은 편인 것은 아니다.
호림부대원은 계급도, 군번도 없는 상태로 북파됐다.
장담하는데, 누군가는 은근슬쩍 피땀으로 이룩한 공을 가로채려 시도할 것이 분명하다.
내가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조원들이 할 말은 하나뿐 일 것이다.
“거기 소위님? 상부에 보고나 좀 해 주십쇼. 사나운 호랑이가 이북에서 사슴을 잡아 돌아왔다고.”
“이 새끼가!”
괜히 소위를 불렀다 발길질을 맛봤다.
얼굴에 포대 자루가 씌워진 채 끌려간 곳은 빛 한 줌 들지 않는 어느 건물 지하 같았다.
“네 놈이 정보국 소속이라는 걸 우리가 어떻게 믿지?”
어두컴컴하고 으스스하면서도 싸한 게.
사람 비명이 저절로 들릴 것만 같았다.
“기다리면 정보국에서 연락이 오지 않겠습니까.”
눈앞에 있는 이 인간.
누군진 모르겠지만 덩치만 컸지 참을성이라고는 더럽게 없는 모양이다.
“그니까 어떻게 기다리냔 말이야. 네 놈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잖아. 나는 내 눈앞에 있는 빨갱이는 전부 땀구멍 하나하나를 쑤셔야 기분이 풀린단 말이지.”
당신, 지금 손에든 뾰족한 그거 내려 둬.
-철컹!
철문이 요란스럽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인 한 명이 들어왔다.
“포박을 풀고 당장 음식과 물부터 제공하랍니다. 육군본부에서 직접 차량을 보냈으니 도착할 때까지만 정중히 모시고 있으랍니다.”
“뭐? 정중히? 확실해?”
“예. 그렇답니다.”
남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손에 들려있던 쇠꼬챙이를 내려놨다.
“죄송합니다.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가시죠.”
오해?
조금만 늦었더라면 저 뾰족한 꼬챙이에 몸이 찔렸을지도 모르잖아.
생각하니 몸이 움찔거렸다.
“저는 딱히 그쪽과 오해가 없었습니다만. 관등성명이 어떻게 되십니까?”
머리가 조금이라도 굴러간다면, 육군본부에서 직접 차량을 보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테지.
“임···임준택 상사입니다. 혹시 관등성명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정보국 요원들의 관등성명은 기밀인 점 양해 바랍니다.”
이내 단단히 묶었던 포박이 풀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선 뒤, 검지를 들어 무언가 찌르는 시늉을 했다.
“아, 임준택 상사님. 꼭 다음에 보시죠. 저도 뾰족한 거 찌르는 거 좋아하니까.”
한눈을 질끈 감아 윙크하는 것을 잊을 뻔했다.
윙크를 받은 임준택 상사가 부르르 떨었다.
밖으로 나오는 동안, 내 뒤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따라올 뿐이었다.
“소대장님! 오셨습니까!”
안내를 받아 간 곳엔, 침투 조원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상의를 풀어헤친 채 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들의 임무가 끝났음이 느껴졌다.
“소대장님, 육군본부에서 직접 오면 이제 다 정리되는 겁니까? 우리는 모두 정식 계급과 군번을 받고, 가족들은 배 굶을 걱정 없는 겁니까?”
“그래. 다들 차량이 오기 전에 푹 쉬도록.”
쉬라는 말에 김철우를 선두로 조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내 팔과 다리를 잡은 뒤 높이 들어 올렸다.
“이런 좋은 날에는 헹가래 한번 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자! 하나! 둘! 셋! 소대장님 만세!”
힘들이 어찌나 좋은지 적어도 20번은 중력에 의한 자유낙하를 경험한 것 같다.
조원들의 싸움은 당장에야 끝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겐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됐다.
‘정보국이 아니고 육군본부에서 직접 차량을 보낸다··· 하늘에 떠 있는 분들이 콩고물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네.’
정보국에서 제일 높은 직급인 정보국장은 대령, 반면에 육군본부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 많다.
뭐, 오히려 좋아.
고위층이 관심을 가진다는 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보상이 달라지는 것을 뜻한다.
애석하게도 전사한 대원들과 그의 가족들, 살아 돌아온 대원들과 가족들도 충분한 보상을 받게 해줘야 한다.
1소대와 나는 말할 필요도 없고.
누구를 대면하느냐가 중요했다.
누구를 만나도 자신 있었다.
까짓거, 육군본부에서 높다면 총참모장일 것이고, 더 높아 봐야 대통령?
차량을 기다리면서,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들을 하나둘씩 정리해 나갔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 물을 먹으니 머리가 더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차량 도착했답니다.”
취침시간이 가까운 이 시간에 도착한 것을 보면,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그간 몸에 지녔던 장구류를 빠짐없이 챙겨 밖으로 나섰다.
“다른 대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연병장이 썰렁했다.
어두운 연병장에 홀로 세워진 차량도 군용트럭이 아닌 보기 드문 승용차였다.
“일단 이쪽으로.”
조심스레 뒷문을 열자,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타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타게나. 다른 대원들은 다른 차를 타고 출발할 걸세. 자네를 만나러 먼 길 왔어.”
누구지?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인데.
나노봇이 검색한 결과를 보여주기도 전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 이것 보게. 내 소개를 깜빡했네. 이승만일세.”
아무래도 말이 씨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