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나에겐 다 계획이 있다.
물론, 언젠가는 이런 상황이 오리라고 생각은 했었다만.
그게 지금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공과 실이 분명한 인물이었지만, 그건 교과서나 미래에서 역사를 판단할 때 문제고.
지금 내 눈엔 그저 금으로 만든 동아줄로 보였다.
“충성! 각하 1소대장 이강산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명색이 대통령인데, 이 야음을 틈타 이곳까지 왔다.
분명 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이 정도 말 서비스는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에 타서 하도록 하지. 어서 탐세.”
“예. 각하.”
차가 8사단 위수지역을 벗어날 때까지, 차 안엔 고요하고 어색한 적막이 흐를 뿐이었다.
굳이 그 적막을 깨고 싶지도, 깨지도 않았다.
사람은 눈치만 빨라도, 가만히 있으면 적어도 중간은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이미지는,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각하를 만나 영광이라며 긴장과 함께 얼어버린 계급도 군번도 없는 군인.
그의 눈에 보이기에 딱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다.
“나 말고도 자네와의 오붓한 시간을 바라는 이가 또 있었을 텐데. 하마터면 내가 늦을뻔했어.”
육군본부겠지.
대통령이 관심을 가질 정도라면, 육군본부에서도 총참모장 정도는 되어야 은근히 슬쩍 비비기라도 해볼 것이다.
‘군보다 먼저 나를 찾아오다니, 빠르군.’
역시 빠르다.
아, 물론 다른 무언가 빠르다는 뜻이 아니라 빨리 움직였단 뜻이다.
“각하께서 직접 찾아주시다니,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적당히 입에 발린 소리로 슬슬 달래줘 봤지만.
답답하게도 쉽사리 본론을 말하지 않았다.
“각하, 사실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했을 뿐인데 각하를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혹 제가 각하께 도움이 될만한 것이라도···”
도움이라는 말에 이승만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 공적은 말로만 치하할 수 없는 아주 큰 공로라네. 멸공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지. 자네 먼저 말해보게. 내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들어줌세.”
자네 먼저?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조국을 위해 애국 헌신함은 지극히 당연한 본분지만··· 염치불문하고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염치라니. 당치않네. 말해보게나.”
이승만이 드디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완전히 돌리고 있었다.
“원산항에 불꽃을 수놓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1소대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1소대를 포함해 살아 돌아온 부대원은 74여 명에 불과하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그렇네. 안타까운 일일세.”
과거엔 채 40명이 되지 않는 인원만이 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보국이 했던 약속 따위 지켜지지도 않았고.
5대대장이 유인 작전 후 후퇴를 지시했기에 살아남은 대원이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난 듯했다.
정확히는 74명.
“5대대장은 적이 지척에 접근한 마지막까지 따발총을 잡고 1소대의 길을 터 주었습니다. 군이 약속했던 것처럼, 작전에 참여한 모든 대원과 가족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약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사실 부탁도 아니다.
내뱉은 말을 지켜달라는 것뿐.
“알겠네. 이 이승만이의 이름 석 자를 걸고 약속하겠네.”
“살아서 돌아온 74명 대원에게 직위와 군번을 주겠다는 약속도 말입니다.”
“알겠네.”
“70명이 아닌 74명입니다. 각하.”
“그래. 74명. 제대로 들었네. 이 사람아. 허허.”
74명을 70명으로 내림하진 않겠지.
혹시나 해서 정확한 확답을 받은 것뿐이다.
“감사합니다. 각하.”
이승만의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인 것 같았다.
목숨을 내놓은 채 사선을 오간 대원들이 받을 최소한의 보상은 확보했다.
자, 이제 이 정도 타이밍이면, 본론이 나올 법하다.
“자네가 모르는 사실이 있네. 북에 생포된 호림 부대원들을 귀순 용사로 둔갑시켜 선전전을 벌이고 있네. 가뜩이나 미군이 철수해 혼란스럽고, 공산주의 맹신론자들이 판치는 어지러운 정세에··· 국민의 뜻을 하나로 결집할 방법을 찾던 중이었네.”
“이런··· 천벌 받을 놈들이··· 제가 도울 방법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이어질 말도 어느 정도 예상한 후였지만, 아주 능청스럽게 넘겼다.
조만간 연기도 수준급이 될 것 같다.
결론은 선전.
북한에 선전에 대응하고, 민심을 다독일 대항마로 나를 점찍은 것이다.
“곧 대통령 특별 담화문 있을 거네.”
특별 담화문?
지금 시기에 대통령 담화문은 없던 일이었다.
아무래도 예정되지 않았던 나비의 날갯짓이 작은 바람을 만들어 낸 모양이다.
“이번 특별 담화문 낭독은, 서울에서 군중을 모은 채 이루어질 계획이라네. 내 담화문 낭독이 끝난 뒤, 자네가 자리에 올라와 줬으면 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세. 정보국에서 주는 종이에 적힌 대로만 읽으면 돼. 조국을 위한 일이야.”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군중을 모은 채 담화문을 낭독한다는 것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승부수였다.
하지만 충분히 해 볼 만한 상황임은 분명하다.
임무에 실패했다면, 밖으로는 북한선전에 휘둘리면서, 안으로는 야당 국회의원들, 미군 고문관들이 피우는 생난리를 내내 달래야 했을 것이다.
북한은 이미 생포된 호림 부대원을 이용.
남측이 북파한 인민의 원수라고 선전하며, 북파된 5대대, 6대대 모두를 완전 도륙 내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1소대가 침투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선전내용에 원산항의 ‘원’자도 없으니까.
‘아마 북쪽 높으신 분들은 더럽게 찝찝하겠지. 머리 좀 아플 거야. 원산항 폭파에 대한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으니까.’
살다 보면 가끔 그런 상황이 온다.
범인을 안다.
범인이 무조건 확실하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증거 없냐고?
증거?
없다. 제기랄.
“조국을 위하는 일이라면, 그 어떤 일이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하겠습니다.”
“자네라면 필시 그럴 줄 알았네. 그간 고생이 많았는데 가는 길 푹 쉬어가도록 하게나.”
어차피 안 한다 해도 시킬 거잖아.
안 그래?
사실 거절할 필요도 없다.
누가 써준 대본만을 읽는,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을 가짜영웅행세여도 상관없다.
‘나한텐 다 계획이 있거든.’
기가 막힌 계획이.
***
“채 총장이 먼저 만나려던 손님을 먼저 만나 언짢지는 않았을는지 모르겠군. 자네가 읽을 낭독문은 내가 채 총장에게 전적으로 맡기겠다고 전해주게.”
승용차가 멈춘 곳은 육군본부였다.
어떤 차를 탔어도 종착지는 육군본부였단 소리다.
“각하, 친히 이곳까지 태워주심에 감사합니다. 담화문 낭독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충성!”
경례를 본 차 창문이 반쯤 내려갔다.
이승만은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손만 내밀어 인사를 건넸다.
참모장실 입구에 도착하자, 부관 라엄광 중위가 문 앞에서 주의사항을 알려 주었다.
“참모장님 기분이 상당히 언짢으신 상태니 언변에 주의하게. 큰소리 나는 일 없도록 해.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묘하게 쎄한 기분이 들었다.
주의하라는 경고 따위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잠을 제대로 잔 것도, 긴장을 풀고 생활한 지도.
너무나 오래전 일이었다.
-똑똑.
“참모장님. 도착했습니다.”
-들어와.
라엄광 중위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그가 말했듯, 얼굴에 심술이 아주 잔뜩 붙은 얼굴을 한 채병덕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충성!”
“어. 됐어. 거기 앉게. 각하와는 오면서 무슨 얘길 나눴나?”
대화는 아무런 인사치레도 없이 시작됐다.
이 양반, 단단히 삐진듯하다.
“각하께서 곧 있을 대통령 특별 담화문 관련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대충 얘기는 들었네. 각하 다음 차례로 자네가 뭔가 낭독하는 시간이 있다고. 각하께선 이런 근본도 없는··· 됐고, 나가서 부관을 따라가면 조사실로 안내해 줄게야. 거기서 침투 경로, 작전 일지, 사상 검증이 끝난 뒤, 쉬면 될걸세.”
“혹시 모르지 않는가. 북에서 공산주의에 세뇌되었을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도 저런 소리는 아닐 텐데.
저런 소리를 계속 듣다간 귀가 썩을지도 모른다.
‘나노봇 청각 조절해.’
[청력을 조절합니다. 60%]
그간 계속 손발을 맞춰와서인지, 나노봇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알아서. 잘. 딱. 깔끔하게 청력을 조절해냈다.
청력을 조절했음에도 의문이 생겼다.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렇게 속이 좁아터진 돼지가 어떻게 참모장 자리에 앉아있는지.
“제가 낭독할 담화문은 각하께서 참모장님께 전적으로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각하께서 참모장님을 굉장히 신뢰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원래 전하려던 말에 MSG를 살짝 가미했다.
감칠맛 나게.
“음··· 그래? 자네가 느낄 정도라면야. 좋네. 내가 친히 직접 담화문을 써주겠네. 오느라 고생했을 테니, 조사실은 내일 들어가도록 하고 잠시 기다리게.”
내가 건넨 음식이 입에 맞은 모양이다.
언제 짜증스러웠냐는 듯 입가가 씰룩거리고 있었다.
“예. 총장님.”
군중을 모은 채 낭독하는 특별 담화문이다.
이 담화문 내용을 전적으로 맡겼다는 건, 공을 나눠주겠다는 소리를 돌려 말하는 것과 같았다.
30분쯤 지나자, 채병덕이 종이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자, 여기. 일단 초안일 뿐이긴 하지만 받게. 낭설 전까지 항시 품에 품고 낭독을 연습하게. 역사에 남을 담화문이 될 수 있도록.”
“충성.”
“됐어. 오늘은 이만 가보게.”
총장실을 나선 뒤, 채병덕이 건넨 담화문이 적힌 종이를 펼쳐보았다.
[나는 우리 육군이 특별히 공산당의 멸공만을 위해 특수 훈련을 받은··· 조국과 나라를 위해···]
굉장히 구구절절하고 긴 내용이었다.
첫 줄을 본 뒤, 이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각하는 나에게 담화문 낭설을 부탁했다.
분명 정보국 종이에 적힌 대로만 읽으면 된다는 말이었다.
막사로 돌아온 뒤, 곧바로 펜을 찾아 참모장이 쓴 담화문을 뒷장으로 뒤집었다.
사실 뒷장에 쓸 필요는 없었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완벽해.”
이제 중요한 것은, 낭독 전까지 근질거리는 입을 참으라 달래는 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