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용포, 면류관
“이봐, 이강산이. 썩 나쁘진 않았는데 말이야. 거기 ‘훈련과 작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신 채병덕 총참모장···’ 그 부분에 억양을 좀 더 강조하듯 해보란 말이야.”
담화문 발표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이 후덕한 총참모장과 담화문 낭독 데이트를 하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발표에 저리 열심과 최선인 것을 보니 총참모장 대신 대변인이 적성에 더 맞을 것 같은데.
담화문에서 본인 이름이 나올 때마다 히죽대는 것을 보고 표정관리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무려 일주일이다.
원산항에 침투하는 과정보다 정신이 더 피폐해져 가는 건 기분 탓이겠지?
“흠. 이 정도면 딱히 흠잡을 곳이 없어 보이는군.”
애초에 내 낭독에 문제는 없었다.
말 그대로 없던 흠집을 계속 파고 파냈을 뿐.
발음이면 발음, 억양, 속도, 높낮이 모두 사람들이 듣기 좋은 최적의 조건으로 조절해 말했으니까.
“내일 담화문 낭독은 자네 인생에도, 각하께도 매우 중차대한 일이네. 군중 앞에서 아주 작은 티끌만큼의 실수로 보일 행동을 해서는 안 되네.”
“물론입니다. 참모장님. 지금껏 최선을 다해 노력한 만큼, 실수 없이 하겠습니다.”
그래.
실수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이번 일만 무사히 넘긴다면, 군에서의 자네 앞길은 내가 탄탄대로로 만들어 주겠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게나.”
“감사합니다. 충성!”
앞길을 탄탄대로로 만들어 준다는 말은 고맙다만, 어쩌지?
내일 이후 여러 인생이 가시밭길이 될 텐데.
소리 없이 웃으며 참모장실을 나섰다.
***
“우리가 건국 초창(初創)에 앉아서 앞으로 세울 사업에 더욱 노력하여야 할 것이요, 지난날에 구애되어 앞날에 장애 되는 것보다 과거의 결절(缺節)을 청사 함으로써 국민의 정신을 쇄신하고···”
1949년 1월 10일에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 대국민 담화.
어렵게 포장된 말을 전부 뺀 뼈대는, 과거는 잊고 미래만을 생각하자는 뜻이었겠다만.
사람도, 하물며 동물도 받은 은혜와 원수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법이다.
하물며 전 민족의 한이 서린 일본의 일제강점을 모두 잊고 미래만을 생각하자?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독립투사들이 하늘에서 울부짖으며 대성통곡할 소리다.
해방 직후에야 미 군정이 친일파 청산을 반대했다는 핑계라도 있었다만, 1948년 대한민국 독립 정부가 성립된 뒤에는 핑계 댈 거리조차 사라졌다.
물론 오랜 망명 생활로 인해 국내 정치기반이 약했다고야 하지만···
‘내 알 바 아니잖아.’
망명 생활까지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1949년 8월 30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반민특위의 공소시효가 하루밖에 남지 않았던 날, 중앙청 건물 앞.
수많은 군중과 그 수에 버금가는 군인이 임시로 설치된 단상에 누군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각하, 철통같은 경호준비를 마쳤습니다. 혹여나 만일의 사태가 발생 시, 저희 경호대가 안전한 곳으로 각하를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이만 가지. 자네도 준비됐나? 긴장할 것 없이 그저 쓰인 대로 소리 내 읽으면 그만일세. 자네 목소리는 여기 중앙청뿐 아니라 라디오를 통해 각지로 생중계될 걸세.”
이승만이 내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밤잠 새워 연습해 뒀습니다. 각하.”
“수고했네. 그럼 잘 부탁하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개방된 장소, 그것도 제자리에 몇 초 이상 머무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말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표적이 되기 쉬우니까.
그럼 에도 공개 석상에서 담화문을 발표한다는 것은 굉장한 자신이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대통령 이승만입니다.”
인사말을 시작으로 마침내 이승만의 담화문 낭독이 시작됐다.
“우리는 지금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친 자들의 숭고하고도, 거룩한 희생 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피하게도, 지금 우리의 정세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밖으로는 공산당의 각종 선동과 날조에 휩쓸리고, 안으로는 친일파 처리 문제로 많은 국민이 선동되고 있습니다.”
2022년이었다면 욕설과 달걀이 셀 수 없이 날아들었겠지만, 장내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우리는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닙니다. 이것은 문제처리가 아닌, 새로운 문제를 만들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입니다. 본디 법이라는 것은, 죄를 지은 자에게 똑같이 보복하는 것이 아닌 선도하여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1949년 8월 30일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공소시효가 하루 남은 시점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거의 굴레를 벗어나 피땀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 독립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공산당과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우리의 적임을 반드시 인지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 전에 있었던 북한의 호림부대에 대한 비방과 날조를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이 무엇인지, 오늘 담화문에 뒷받침해줄 수 있는 대한의 국민이자 청년. 호림부대 1소대장의 발표문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역시는 역시다.
예상은 했다만, 담화문을 들으니 이제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반민특위의 공소시효가 끝나며 흐트러질 민심을 호림부대의 공적을 이용해 가릴 생각이었나 본데.
훌륭한 대통령 담화문에 대적할 담화문을 준비해왔다.
단상에 올라가니 수많은 인파, 앞자리 명당에 앉아있는 국회의원, 군 수뇌부들이 보였다.
군인들은 인파 사이사이, 인파 전체를 띠처럼 둘러 안팎으로 삼엄한 경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아, 저는 호림부대 1소대를 맡았던 1소대장 이강산이라고 합니다.”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앞자리에서 누군가 유독 크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쳐대고 있었다.
“저를 비롯한 260명의 호림 부대원은 혹독하고도 고된 특수한 훈련을 받고 북에 북파되어 목숨을 내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여기까진 채병덕 참모장이 써준 담화문 그대로였다.
이제부터가 진짜 담화문의 시작이다.
“특히 원산항 폭파 임무를 직접 수행했던 1소대는, 무려 이틀이라는 오랜 기간 훈련을 받은 뒤 곧바로 북으로 향했습니다.”
이틀이라는 말에 군중 사이에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채병덕이 상황을 파악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옆에 있던 다른 장성들이 그를 말렸다.
생중계는 물론이고, 직접 눈으로 보는 수많은 군중 사이에 대통령이 직접 세운 사람이 나였다.
지금 이 단상 위에 있는 나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단상에서 내려간 뒤에도 마찬가지겠지만.
“물론 처음에 이 불가능 해 보이는 임무에 겁도 났습니다. 그러나 통신도, 더 이상의 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알아서 하라는 채병덕 참모장님의 명령은 제 마음 깊숙하게 있던 두려움을 없애고, 심금을 울렸습니다.”
멀리서도 보였다.
분노에 가득 차 흔들리는 그의 볼살이.
떨리는 볼살을 보며 말하자니, 쾌변에 버금가는 희열이 올라왔다.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는 견리사의 견위사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라가 공산주의에 물들어 가는 위태로움을 보고서 더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그저 숨만 쉬기 위해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쌀 한 톨, 감자 하나가 귀했던 시절이다.
지식인들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계층보다, 먹고 사는 것.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의식주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 국민이 훨씬 많았다.
“사실 저도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삼는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입은 옷이 곧 용포입니다. 그가 머리에 쓰는 모자가 곧 익선관이며 면류관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아닙니다.”
군이 만들어 놓은 띠 밖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민주주의에서는 찢어지고 낡은 옷을 입은 채 묵묵히 일하는 자들이 입은 옷이 용포이고, 저기 좌판에서 국밥을 파는 아주머니가 입은 김칫국물 묻은 치맛자락이 용포입니다. 일본과 북한엔 왕이 딱 한 명이라면, 민주주의 속 우리의 왕은 한 명이 아닌 2000만 모든 동포입니다.”
고개를 숙인 뒤 단상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욕을 하는 사람도, 손뼉을 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할 뿐이었다.
단상 뒤로 내려가자, 얼굴이 일그러진 채병덕이 곧장 멱살을 잡았다.
“너 이 새끼 뭐야. 어쩐지 고작 소대 한 개 따위로 원산항을 폭파했을 리가 없지. 각하, 지금 모두가 이 빨갱이 놈에게 놀아난 겁니다. 즉결처형하겠습니다. 이 빨갱이 새끼.”
앞에 대통령이 있다는 것도 망각했는지, 허리춤에 있던 권총을 꺼내 머리에 겨누었다.
“세상 어떤 빨갱이가 공산주의를 욕보이고 민주주의를 선전하겠습니까. 참모장님.”
확신한다.
저 방아쇠에 건 손가락은 절대 당기지 못한다.
여기서 나를 죽이거나 해를 가하는 건, 이승만이 직접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셈이 될 테니까.
“채 참모장. 다시는 내 앞에서 함부로 총을 겨누지 말게.”
“각하, 하지만···”
이승만이 손을 들어 채병덕의 입을 막았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약속대로 그저 적혀있는 대로 담화문이나 읽을 줄 알았네만.”
“담화문을 읽으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각하. 대한민국을 위한다는 뜻이 같으니 약속을 어기진 않은 것입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민심이 무엇인지 알고 행하는 것이 가장 기본 아니겠습니까.”
예정대로 내일 반민특위 공소시효가 소멸한다면, 친일파 청산은 안녕이다.
아주 먼 미래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2022년 까진.
“질문 하나만 하지. 자네는 사지에 오래 있던 탓에 감각을 잃은 것인가? 아니면 무슨 배짱으로 담화문에 목숨을 걸었는가.”
너 미쳤냐? 돌았지? 이 말을 길게 하는 것 같다.
당연히 둘 다 아니다.
목숨을 내놓지도 않았고.
“목숨을 내놓다니 당치 않습니다. 저는 단상 위에서 어떠한 선동이나 날조 없이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조국을 위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민주주의를 외친 군인일 뿐입니다. 민주주의에서 이 이후는 언론과 국민이 판단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처음엔 잘못들은 줄 알았다.
그저 작은 옹알이처럼 들려왔으니까.
누가 시작한 지도 모를 작은 옹알이였던 외침이 어느새 장내를 휩쓸었다.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마치 바로 앞에서 외치는 것처럼 들려왔다.
나는 약속을 지켰다.
민심의 결집은 만세 소리로 대신 답이 될 것이다.
“각하, 각하께서도 지키실 약속이 있지 않으십니까?”
이젠 받을 차례다.
약속이란 건 주고받는 거니까.
“그래. 먼저 말해보게. 원하는 게 뭔가.”
“제가 원하는 건 말입니다.”
이젠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