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삼등무공훈장
계급도, 군번도 없는 청년의 5분도 안 되는 짧은 담화문 낭독은 생각보다 큰 파란을 불러왔다.
무엇보다 가장 큰 파란은, 국민에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지 조금이나마 뇌리에 남겼다는 것이다.
“역시, 유토피아는 없다.”
암. 없고말고.
어찌 보면 공산주의는 이론적으론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주의에 가깝다.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이지.
아마 소나 돼지 같은 가축에게 적용했다면 다를지 몰라도.
아, 어쩌면 생각 깊은 소나 돼지는 억울할지 모르겠다.
친일파 청산에 대한 민심과 여론이 들끓자, 반민특위의 공소시효도 일시적이나마 연장 수순을 밟았다.
이건 꽤 나 고무적인 성과였다.
반민특위의 공소시효 연장과 민심 집결을 끌어낸 담화문의 주인공.
나는 찍혔다.
대통령과 참모장에게 제대로 찍힌 걸 보니 담화문이 끝내줬던 모양이다.
그들이 나를 무엇으로 찍던, 상관없다.
왜냐고?
어금니가 부러질 듯 이를 꽉 문 채 나에게 훈장증을 수여하고 있는 채병덕 참모장을 보고 있자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소위 이강산. 감사합니다.”
“그래. 축하하네. 축하해. 앞으로도 지금처럼 해보게. 어떻게 되는지.”
채병덕이 훈장증을 건네준 뒤, 악수하는 오른손에 온 힘을 쥐어짰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삼등 무공 훈장.
원래 대로였다면 아직 제정되고 있어야 할 무공 훈장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소위 계급을 받음과 동시에 1호 수여자가 됐다.
“이제 자네가 가고 싶은 곳을 말하게. 설마 육군본부에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며칠 지내보니 육군본부는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답답하다면 멀리 떨어지면 될걸세. 멀면 멀수록 좋고.”
육군본부에 있으면서 울화통을 참으며 신경질 내는 참모장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 재밌겠다만.
이런 시답지 않은 즐거움으로 중요한 일을 미룰 순 없었다.
“최전방 7사단 1연대로 가겠습니다.”
“7사단?”
6.25 당시 동두천과 포천, 최전방에서 가장 먼저 적을 맞이하고, 서울로 향하는 교통로를 지켜야 할 부대가 7사단이었다.
이젠 진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전쟁의 도화선에는 이미 불이 붙은 지 오래다.
이 도화선에 붙은 불을 끄려면 북한에 침투해 김일성을 암살하고, 소련에 침투해 스탈린을 암살하면 되려나?
‘그러려면 나노봇이 아니라 아이언맨이 필요하지.’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가장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그 중요한 곳을 지키기 위해 7사단에 갈 것이다.
위험을 피하기만 하는 건, 영웅이 아니니까.
***
발령은 바로 다음 날 곧바로 이뤄졌다.
한시 빨리 보내버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미운 정도 정은 정이라던데.
1연대는 적성과 종현산 21km 일대를 담당하며 동두천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였다.
7사단 내에서 가장 적과 가까웠다.
부대에 도착해 가장 먼저 전입신고를 위해 연대장실로 향했다.
“충성. 소위 이강산 7사단 1연대로 배치를 명 받았습니다.”
“그래. 반갑네. 1연대장 함준호 대령일세.”
함준호 대령이 앉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이미 내 활약은 익히 전해 들었을 것이고, 그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는 것이 첫째로 할 일이었다.
“자네 소문은 익히 들었네. 각하와 참모장님 뒤통수를 제대로 때렸다면서?”
좀 쉽고 편한 시작은 이번 생엔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기야 언제든 본인 뒤통수를 때릴지 모른다고 색안경을 끼는 것도 이해는 간다.
스스로 할 일들을 잘한다면 그럴 리 없겠지만.
“각하와 참모장님을 깎아내리거나 비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무슨 소린가. 옳은 일을 칭찬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자네같이 재밌는 친구들을 좋아하네. 1연대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네.”
어라?
예상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운이 좋게도, 어쩌면 말이 잘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는 무슨. 아무리 폐쇄적인 군이라도, 자네처럼 할 말을 하고 넘어가는 군인이 있어야 군도 발전이 있는 것 아니겠나. 고작 이틀이면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했을 텐데. 그 어려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훌륭한 군인이 내 휘하에 들어온다는데, 어찌 환영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간 칭송받아 마땅한 일에 얼마나 따가운 눈초리와 눈치를 느꼈던가.
오랜만에 들어보는 따듯한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게.”
“연대장님께서는 북한이 남한을 침공할 가능성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한 이유는 간단했다.
전쟁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과 준비하지 않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지휘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앞으로의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전쟁이라··· 가장 무방비하고 준비되지 않았을 때 시작되는 것이 전쟁이라네. 내가 김일성이라면 미 군정이 철수하고 안팎 정세가 혼란스러운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겠네만. 하하. 농담이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대체 누가 이 훌륭한 점쟁이, 아니 지휘관을 여기에 썩혀두고 있는가.
분명 적기라고 생각한다면, 준비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제가 원산항에 침투해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였습니다. 원산항을 잠시나마 폭파했다 한들, 분명 다른 항구나 육지를 통해서도 군수물자가 오가고 있을 것입니다. 평시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군수물자를 늘리고 있다는 건, 전쟁준비의 신호라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자네도 알지 않는가. 이미 각하께서 특사까지 보내 미국을 설득하고 계시네. 이미 우리 7사단에서도 적의 정찰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보고를 육군본부에 보내 두었네.”
맞는 말이다.
남한 정부는 이미 수차례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철수를 철회해달라고 요청한 상태였다.
그렇게 애원했음에도 싹 다 무시당하긴 했지만.
우리의 요청에 미 정부와 군부의 대답은 간단했다.
1. 한반도는 국제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나라로, 소련이 북한을 대리인으로 전쟁을 남침시킬 가능성은 극히 미미하다.
2. 중공군 또한 내부 사정으로 남한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 미군이 철수하며 많은 군수물자를 남겨 놓을 것이므로, 문제없다.
남한이 북한보다 수적, 질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강아지풀 뜯어 먹는 소리는 빼더라도, 전쟁 가능성을 0에 초점을 맞춰두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무슨 짓을 하더라도 미국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애초에 이미 3년 전부터 국무부 테이블엔 ‘미국의 군사안보 관점에서 본 미국의 남한 군사점령 이해관계’라는 보고서가 올라와 있었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주한미군의 남한 주둔은 경제적, 안보적으로 미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에,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든.
“연대장님, 7사단 병력 상황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전입하자마자 병력 상황을 물은 장교는 자네가 처음이네. 자, 여기. 병력 현황판이네. 천천히 보게나.”
함준호 대령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현황판을 건넸다.
[7사단 병력 현황]
병력 : 6,788명
105mm M3 곡사포 : 15문
57mm 대전차포 : 12문
81mm 박격포 : 36문
60mm 박격포 : 54문
2.36인치 로켓포 : 126문
현황판을 보자 한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모든 병력과 가능한 모든 화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평범한 작전 계획으로는 동두천을 방어할 수 없다.
7사단은 전쟁과 동시에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다.
몰려오는 T-34 전차를 막을 방법이라고는 몸을 던지는 육탄전뿐.
‘나노봇. T-34 전차가 57mm 대전차포에 피격되었을 때 시뮬레이션해 줘.’
사실상 전차에 대응할 무기라고는 대전차포가 전부였다.
[시뮬레이션 결과. 정면 피격 : 정상 가동. 측면 피격 : 43% 확률로 가동 불가.]
그마저도 철갑탄을 사용해 가까운 거리에서 측면을 정확히 명중해야만 효과가 있었다.
2.36인치 로켓포도 시뮬레이션 결과는 비슷했다.
박격포로 전차를 맞춘다는 시뮬레이션은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할 필요도 없다.
‘남은 건 곡사포뿐인데···’
[시뮬레이션 결과. 피격 시 파괴.]
이래서 불가능은 없다고 하는 건가?
깜깜하기만 했던 앞길에 실낱같은 볕이 드는 듯했다.
“아직 볼 것이 더 남았나?”
몰두해서 나노봇과 시뮬레이션을 하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조용히 아무 말 없이 기다려준 함준호 대령이 고마웠다.
“아닙니다. 연대장님.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이 많았습니다.”
“괜찮네. 자네가 상황판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네만, 오늘은 자네도 피곤할 테니 가서 쉬도록 하게.”
“충성.”
경례를 마친 뒤 연대장실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연대장님! 연대장님!”
함준호 대령의 부관 이정석 중위가 노크도 잊은 채 연대장실 문을 열어 재꼈다.
“침착하고 천천히 말하게. 무슨 일인가?”
이정석 중위가 두어 번 심호흡을 마친 뒤, 보고를 이어나갔다.
“38선 인근에서 적의 정찰 활동이 계속 관측, 보고되고 있습니다.”
“빈번한 일 아닌가. 왜 그리 호들갑이야.”
“늘상 있던 정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적암, 양원리, 추동리, 가양리 모든 일대에서 군관이 직접 나와 망원경으로 도로와 부대를 정찰하고 있답니다.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 않습니다.”
군관급이 직접, 그것도 전역에 나와 정찰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보고를 들은 함준호 대령의 얼굴빛이 검게 변했다.
“2대대 전 관할구역에 경계태세 강화 명령 하달하고, 1대대, 3대대에 비상대기하라 전하게. 무슨 꿍꿍이인지··· 내가 직접 올라가 봐야겠어.”
군관급이 직접 나와 정찰한다는 건, 심상치 않은 상황이 맞다.
쉽게 생각하면 잡아서 물어보면 된다.
무슨 꿍꿍이인지.
“연대장님. 군관급이라면, 생포해서 심문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생포라는 말에 연대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간 안 해 본 줄 아는가? 아주 쥐새끼 같은 놈들이야. 조금만 가까이 가면 꽁지 빠지게 북으로 튀는데 생포할 방도가 있나.”
“제가 왕년에 쥐를 좀 잡았습니다. 연대장님.”
도망가는 적을 잡는 방법은 간단하다.
적보다 은밀하고, 적보다 빠르면 된다.
그게 쉽냐고?
쉽다. 나에게는.
작전명 생 쥐잡기.
아무래도 첫 임무는 쥐잡기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