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필리포프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본다면 지을 수 있는 표정일까?
마치 세상의 종말을 지켜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어떤 열쇠로도 열 수 없을 것 같던 그의 입에 채워진 자물쇠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4사단 16연대 소속 박범석 소좌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다시 들어도 이질적인 국가명이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니.
아무리 정치체제와 경제체제가 다른 문제라고는 해도 끔찍한 혼종이 아닐까?
하긴, 아무리 맛없는 음식점이라도 음식점 이름을 맛없는 음식점이라고 짓진 않으니까.
“귀순할 의사가 있으면 말하라. 박범석 소좌, 이미 자네 조국은 당신을 월남한 원수로 규정지었어. 돌아갈 곳은 없다.”
북한 라디오에 쓰이는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 내 녹음한 것이지만, 누가 듣는다 해도 알아차리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게다가 적에게 포로로 잡힌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체념하고, 믿을 수밖에 없지.
“귀순해 알고 있는 정보를 말한다면, 충분히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다. 원한다면 군에 들어오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야.”
함준호 대령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박범석 소좌를 설득했다.
“내래···”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박범석 소좌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기랄. 혀를 깨물었어. 군의관! 군의관!”
함준호 대령이 다급히 소리쳤다.
관등성명을 말하며 찰나의 방심을 유도한 것이다.
‘늦었어. 이런 상황에서 혀를 깨물다니···’
군의관이 이곳까지 오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설사 바로 옆에 군의관이 있었다 한들, 입에서 한 움큼씩 쏟아지는 피가 박범석 소좌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왔다.
“이 종간나새끼들··· 컥. 귀순이라 했니? 컥.”
혀에서 뿜어지는 피가 목으로 역류하며 컥컥대는 소름 돋는 소리를 냈다.
“내가··· 컥. 미쳤니. 쓰읍. 머지않아 공화국 땅크에 모조리 짓 밝혀 짓이겨질··· 날이···”
마침내 박범석 소좌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숨이 끊어졌음에도, 계속해서 나오는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죽었습니다.”
목에 있는 경동맥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지만, 아무런 맥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함준호 대령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연대장님, 적의 전면 남침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 상태로는 적이 가진 전차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중서부 방어선은 채 이틀을 버티지 못할 겁니다.”
박범석 소좌는 비록 자결했지만, 느낀 점이 있을 것이다.
느낀 점이 있어야만 한다.
“연대장님!”
제자리에서 한동안 눈을 감은 채 생각에 빠진듯했다.
끊어진 대화 틈새를 침묵이 채웠다.
침묵이 대화를 채우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내가 직접 사단장님을 만나 뵙고 오겠네. 이미 보고는 수도 없이 했네만. 자네 말대로 전쟁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군.”
“연대장님. 혹여나 사단장님께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신다면 말입니다···”
수도 없이 많은 징후가 전쟁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래도 외면하냐는 듯.
***
1950년 1월.
평양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회의실.
“박헌영 동무. 이 서신, 이번엔 틀림없는 게요?”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이 커다란 책상에 앉아 종이 문서를 보고 있었다.
[남조선 작전에 관한 모든 암호 문건은 미트베이 자하로프 동무의 기구를 통해 보고하라. -필리포프]
필리포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가명.
남조선 작전은 곧 있을 남침 계획을 뜻했다.
“그렇습네다. 위원장 동지. 드디어 그 신중한 스탈린 동지가 허가를 해왔습니다. 미 제국주의자 놈들이 선포한 애치슨 라인에도, NSC-48/2에서도 남조선은 방위 지역에 들어가 있지 않습네다. 제국주의자 놈들이 발 들이기도 전에 해방은 완료될 것이 분명 합네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전쟁 요구를 71번이나 거절해왔다.
전쟁 요구는 지속 되어 72번째.
드디어 72번을 찍어 넘어가지 않던 나무를 넘긴 것이다.
“이번 전쟁은, 우리 공화국 영토와 인민들의 미래가 걸린 중차대한 일이오. 한 가지 오점이라도 있어선 안 될 것이오.”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받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지만, 공화국 전체와 인민을 담보로 배팅하는 도박과도 같았다.
아무리 이기는 도박이라도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일.
“걱정 마시라요. 위원장 동지. 중화인민공화국 내전도 거의 다 정리되어 간다는 소식입네다. 동북 지방에 가 있는 의용군 편입만 완료된다면, 남조선을 해방할 준비는 완벽히 끝난 것이나 다름 없습네다.”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한영의 목소리에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전쟁은 이미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조선을 해방한 뒤, 오른팔인 남조선로동당 당원들과 규합해 당내 입지를 굳건히 다질 생각이었다.
땅크 150여 대, 항공기 200여 대, 2000문 이상의 각종 포와 10개 사단으로 편제한 20만 명에 가까운 정규군에 비해 땅크, 항공기가 한 대도 없는 남조선의 병력은 형편없었다.
이 정도 전력 차이라면,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큰 도움 없이도 해방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지난해에 있었던 원산항 폭발도 그렇고, 남조선으로 귀순하는 불순세력에 의해 계획이 노출되었을 가능성은 확인해 봤소?”
“멍청한 남조선 아새끼들은, 절대 눈치챌 수 없습네다. 이미 준비가 막바지인 시점부터는, 평화로운 기분을 주기 위해 38선 인근 소규모 전투도 최대한 예방하라 전했습니다. 게다가 남조선로동당 당원들에게 6월에 해방 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남북 총선거를 한다는 내용의 선동문을 보내 두었습네다.”
남조선 전방 2개 사단이 최근 군사 훈련 강도를 높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싸움 연습을 한들, 다 큰 성인을 이길 순 없는 노릇이니까.
“알겠네. 박헌영 동지.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될 것이네. 평화 정치 공작을 더 펼치고, 폭풍이 오는 날 남조선로동당원들이 일제히 궐기할 수 있도록 방심 없는 만반의 준비를 가하라!”
“예.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작전을 위해 차질없이 준비하겠습네다.”
박헌영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회의실을 나섰다.
***
국군 7사단 사단장실.
-똑똑
“함준호입니다. 사단장님.”
-들게.
“충성!”
유재흥 사단장이 일어나 함준호 대령과 나를 반겼다.
“인사는 생략하도록 하지. 연대장에게 이미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네. 내 이름보다 자네 이름을 더 많이 들은 것 같네. 역시 늠름하군.”
유재흥 사단장이 어깨를 두들겼다.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한 모양이다.
훌륭하다는 칭찬이었을지, 귀찮게 한다는 욕이었을지 모르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적어도 팔은 안으로 굽으니까.
“바쁘신 줄은 알지만, 서면으로 이야기할 상황이 아닌 것 같아 이강산 소위와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괜찮네. 이런 일이라도 핑계 삼아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는 것 아니겠나.”
“그때 보고드렸던 것에 대한 답은 들으셨습니까?”
박범석 소좌 사건 이후, 함준호 대령은 여러 번 사단장을 찾았다.
매번 일어나지 않은 일에 힘 빼지 말라며 사양을 당하긴 했지만.
사단장이 결단을 내리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미리 말해두었던 NSC-48/2의 방위선과 애치슨 라인.
미리 말했던 대로 방위선에서 대한민국이 빠지자, 처음으로 사단장이 먼저 우리를 부른 것이다.
“답은 왔네만. 이러다 참모장 눈 밖에 날 판이네. 허허. 정보국에도 이강산 소위와 똑같은 주장을 하는 자가 있어 아주 골치 아픈 눈치일세.”
1949년 12월 17일에 정보국의 박정희 소령이 작성해 대통령과 총참모장 책상에 올린 ‘연말 종합 적정판단서’
보고서라기보단, 예언에 가까운 예언서다.
요약하자면.
1. 북한은 이미 1949년 말 남침 준비를 완료했다.
2. 적은 다량의 전차, 항공기, 포를 앞세워 남침할 것이다.
3. 적은 동두천-의정부-서울을 주공로로, 춘천-원주, 속초-강릉을 조공으로 하여 선제공격할 것이다.
4. 선제공격 시기는 3월로 예상되나, 의용군 편입에 따라 6월~8월로 연기될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5. 적은 위장된 평화 정치 공세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이쯤 되면 미래를 알고 있는 게 나뿐만이 아닐지도 몰라.’
물론 이 보고서도 서랍 어디 깊숙한 곳에 박혀 있을 것이다.
“각하께서는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일정이 확정되기 직전이니, 선거일 전까지 빨치산 소통에 박차를 가하라고 하셨네.”
염병할.
줘도 못 먹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생긴 말이 분명하다.
빨갱이 놈들이 짜놓은 계획대로 아주 잘 속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화 공세를, 빨치산이라는 무장 유격 게릴라의 이름으로 무력도발을.
눈 가리고 아웅이 따로 없다.
“다만, 기존 3연대를 수도경비사령부로 합류하는 대신, 2사단 25연대가 의정부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했네. 6월까지 이동을 마친다고 전해왔다만, 최대한 서두르라고 전해뒀네. 자네들 말대로 전면전이라도 일어난다면 2개 연대로는 턱없이 부족할 테니. 역사에 멍청하고 무능한 사단장으로 남고 싶진 않아서 말이지··· 흠흠.”
듣던 중 다행이었다.
원래였다면, 25연대는 병영문제로 6월 25일 전까지 도착은커녕 올라올 기미도 없다.
‘그나마 다행이다.’
무엇보다 사단장 운명이 달라졌다.
현리 전투에서의 최악의 전투 지휘관에서, 앞으로의 미래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감사합니다. 사단장님.”
감사?
감사하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미 군부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함준호 대령이 물었다.
신중하고 섬세한 성격이었지만, 가끔 답답할 때도 분명 있다.
미 군부 반응이 어떻긴.
굳이 입 아프게 물어볼 필요도 없다.
“미국은 여전히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없을 일이라고 확신하는 모양이네. 자네들 예상대로 우리를 애치슨라인에 넣지 않은 것을 보면 모르겠나.”
수십만 대군과 최신 무기를 배, 수송기로 실어 먼 태평양 바다를 가로질러 도와주러 온 것은 물론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다만.
지금 시점에 미국을 보면 느껴지는 야속한 심정은 어쩔 수가 없다.
맥아더 그 양반도 지금쯤 일본에서 황제 대접을 받으며 즐겁게 타지 생활을 즐기고 있을 거고.
모든 것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25연대의 빠른 예편은 어둠 속에 피어난 희망이다.
가능성이 없는 것과 조금이라도 있는 것은 분명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보게. 이강산 소위.”
“예. 사단장님.”
유재흥 사단장이 내 얼굴을 뚫을 듯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 말이야. 소좌를 생포해 세운 공적도 있고, 무엇보다 앞날을 훤히 내다보는 것 같은 안목이 참 마음에 든단 말이지. 어때. 사단 작전 장교 보직을 맡아볼 생각 없는가?”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단장님.”
옆에 앉은 함준호 대령의 눈살이 느껴졌다.
‘한 번 고민하는 척이라도 할 걸 그랬나?’
아마 잘 키운 자식 남에게 주는 느낌이 들어서였을까?
엄밀히 따지면 난 혼자 컸는데 말이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1연대장?”
함준호 대령은 질문이 아닌 통보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작전 장교라니.
전례 없는 초고속 특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