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푸른 눈의 덴노
푸른 눈의 덴노.
가이진노 쇼군. (外人の 将軍)
살아있는 구세주.
온갖 듣기 좋은 말은 다 가져다 붙인 이 호칭의 주인은 단 한 사람이었다.
SCAP라 불리는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집무실 책상 위 쌓여있는 수많은 편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편지에 관심이 크지 않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I'm sick of letters. (편지도 이제 슬슬 질리는군.)”
책상 위 쌓인 편지는 읽어도 읽어도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무조건 항복을 외치며 두손 두발을 들자, 워싱턴은 맥아더에게 일본 정부 기관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는 사진 단 한 장으로 일본 전역의 복종을 얻어냈다.
천황과 찍은 사진을 일본 전역에 뿌려, 일본인 뇌리의 세뇌된 천황의 신성성을 뿌리 뽑은 것이다.
약식 근무복 차림을 입고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183cm 거구의 맥아더.
최고급 양복을 차려입은 채 두 손을 허벅지 옆에 딱 붙인 170cm가 채 안 되는 천황.
사진이 퍼진 이후, 더는 천황이 아닌 GHQ, 맥아더가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쇼군.
원래는 무신정권 막부의 수장을 일컫는 칭호지만, 이 또한 어느덧 맥아더를 위한 호칭이 되어 있었다.
“Hmm··· (흠···)”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한 맥아더가 아직 읽지 않은 편지를 모두 쓰레기통에 넣었다.
숭배. 찬양.
편지의 내용을 한 단어로 축약한다면 숭배, 찬양.
둘 중 하나를 벗어나지 않았다.
처음 1~2년이야 각지에서 보내는 팬레터가 흥미로웠지만, 5년이라는 시간은 그 흥미를 잃게 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Sir. (사령관님.)”
“Oh, that's enough. (오, 이젠 그만. 너무 질렸어.)”
“I'm sorry, Commander.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맥아더가 펀치 소령 손에 들린 한 뭉치의 편지를 보고는 진저리를 쳤다.
그의 반응을 본 펀치 소령은 이내 들고 왔던 편지를 집무실 밖에 내려놨다.
펀치 소령이 다시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 손에 남은 편지는 한 장이었다.
“이건, 한국에 있는 미 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로버츠 준장에게서 온 편지입니다. 혹시나 필요하실까 해서 가져왔습니다.”
이 편지를 맥아더에게 전하기 위해 맥팔랜드 대위가 한 노력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군사고문단장에게 편지를 부탁하기까지, 사이에 있는 수많은 상관에게 살랑거리며 아부와 아첨은 기본, 그것도 통하지 않을 땐 아내에게만 공개했던 필살 애교까지 선보였다.
“Do you want to do it now? (나랑 한번 하고 싶다고?)”
애교를 오해한 상관 중 한 명이 그윽한 눈빛과 함께 엉덩이를 쓸어내리며 했던 말과 표정은 평생 씻겨지지 않을 악몽이었다.
“로버츠 그놈이 이 맥아더님께 편지를 썼다고?”
“예···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맥아더는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버릇이 있었다.
3인칭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지, 펀치 소령이 떨떠름한 미소를 뒤로 삼켰다.
[Dear Commander MacArthur, The Tool of Destiny. (운명의 도구 맥아더 사령관님께.)]
사람에게 도구라 칭하는 것은 실례에 가깝지만, 맥아더에겐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듣고 자라왔던 말이며, 자신조차도 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운명의 도구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어머니 말고 다른 사람이 운명의 도구라는 말을 썼던 적이 있던가?’
아주 오랜만에 드는 호기심이었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딱 전달할 말만을 쓴, 극히 실용적인 편지였다.
[존경하는 사령관님, 잘 지내고 계십니까? 한국엔 이강산이라는 중위가 있습니다. 그가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답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령관님께서 운명의 도구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합니다. 이강산 중위는 한국군에서 보기 드문 꽤 훌륭한 장교입니다.]
[아, 혹시 한국에 들어오실 일이 생기신다면, 사령관님처럼 크고 두꺼운 M20 슈퍼바주카와 대전차 탄두를 좀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 포병장교 맥팔랜드 대위라는 놈이 하도 찡찡거려 귀찮아 살 수가 없습니다.]
“흠··· 이강산 중위라. 이승만 대통령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펀치 소령. 한국 일행은 언제 도착하지?”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히로히토는?”
“그도 도착했습니다.”
“우리도 슬슬 출발하지.”
한국의 대통령, 일본의 천황이었지만 모두가 먼저 약속장소에서 맥아더를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는 예의, 체면을 그다지 중시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읽거나 쓰기도 전에, 걸음마와 동시에 말을 타고 총을 쏴 천재임을 입증한 그였지만 결혼식에 하객이 1명뿐일 정도로 대인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으니까.
“오, 반갑소. 내 벗들이여.”
맥아더가 약속장소에 나타나자 이승만과 히로히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승만과 히로히토 모두 영어에 능숙했기에 통역 없이 직접 대화가 가능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승만과 악수한 손을 놓기도 전에 물었다.
궁금한 건 바로 해결해야 하는 성격을 가진 맥아더였기에.
“한국군에 혹시 이강산 중위라는 장교를 알고 있습니까? 혹시 알고 있나 해서.”
원래였다면 캘리포니아를 방위하듯 대한민국을 방위하겠다는 결의를 다져야 할 시간이었지만, 맥아더의 머릿속엔 이강산 중위가 떠나질 않고 있었다.
***
7사단 작전 회의실.
대대장급 이상 간부들이 모여 7사단 방어 계획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미 오랜 시간 이어진 회의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축석령? 작전명령 38호를 무시하고 작은 고개 방어에 총력을 다하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작전명령 38호는 미 군사고문단이 직접 개입해 만들고 있는 것임은 알고 하는 소린가?”
말귀 한 번 더럽게 못 알아듣네.
이쯤 되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건지 의심해 볼 만 하다.
9연대 작전 장교 정현일 대위.
고작 중위가 사단 작전 장교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회의 내내 반론을 제기하고 있었다.
“38호를 무시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 7사단 방어 임무의 핵심은 서울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적을 지연시키는 것입니다. 사단 병력손실을 줄이고 후속 2사단 병력과의 연계를 생각했을 때 최적의 장소라는 겁니다.”
축석고개는 도로가 매우 좁고 구불구불하며, 한쪽은 낭떠러지, 뒤쪽은 야산으로 둘러싸인 최적의 방어진지였다.
전면전이 발발할 시, 작전계획에 따라 대전에 있는 2사단이 수도권 방어를 위해 합류할 것이고, 축석고개를 거점 삼아 방어한다면 적을 당황 시키는 건 물론이거니와 최소한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당하는 창피는 면할 수 있다.
“오늘은 다들 이만하지. 각자 부대로 돌아가 오늘 회의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보고할 수 있도록 하게나.”
언성이 다소 높아지자 1연대장 함준호 대령의 중재가 떨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세교와 같이 미리 선점해 놓은 지역에 105mm 곡사포를 방열해 적의 전차 진격을 저지하고, 병력을 잘 갈무리해 축차 투입 없이 의정부-포천 일대를 잘 방어한다면?
어쩌면 서울이 함락당하지 않은 채 연합군이 상륙할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군에게 득이 되는 계획을 계속해서 반대한다?
둘 중 하나다.
사리 분별도 못 하는 머저리가 장교가 되었거나.
그의 아군은 우리가 아니라 따로 있거나.
‘정현일 대위··· 오늘 반드시 확인해 봐야겠군.’
실제로 과거 전쟁이 터진 후, 부대에 복귀하지 않거나 연락이 두절 된 장교, 부사관이 적지 않았다.
만약 내가 짜놓은 작전계획이 북쪽 귀에 들어간다면, 그들도 충분한 대비를 할 것이 분명하다.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간부들이 각자 타고 온 차량에 몸을 실은 채 출발하고 있었다.
“어때, 작전 장교 직은 할 만한가?”
“가끔 몸을 풀고 싶을 때가 있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한 명의 병력이라도 손실을 줄일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보다 연대장님, 혹시 가시는 길에 저를 좀 태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정현일 그놈이 뭔가 꿍꿍이가 있다면, 직접 차를 몰아 그를 따라나서는 건 의심을 살 확률이 높다.
정현일과 비교적 같은 방향으로 가는 함준호 대령의 차를 얻어타려는 이유였다.
“물론일세. 이 늦은 시간에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는가? 궁금하고만 그래. 날이 춥네. 어서 타게.”
함준호 대령이 흔쾌히 수락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애인을 만날 시간이나 있겠습니까. 정현일 대위가 아까 미안했다며 술이나 한잔하자고 해서 가려던 참입니다. 연대장님.”
“그럼 정현일 대위가 타고 온 차를 함께 탔으면 되지 않았는가?”
급하게 둘러대다 보니 틈이 생긴 모양이다.
당황하지 않고 너스레를 떨었다.
“정현일 대위야말로 애인을 만나려는지 혼자 들렀다 갈 곳이 있답니다. 연대장님, 저 고약한 성질머리를 가진 정현일 대위가 몰래 어떤 애인을 만날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함준호 대령은 미혼이었다.
홀랑 까진 머리가 한몫했겠지.
아니면 말고.
그가 관심 가질만한 미끼를 던졌다.
“음··· 부하를 미행하는 것에 관심은 없다만. 자네가 그리도 궁금해한다면야. 분명히 말해두겠네만, 절대 내가 정현일 대위 애인 얼굴이 궁금해서 따라가는 게 아닐세. 자네 때문이야.”
암. 그럼요.
그렇고말고.
함준호 대령이 미끼를 제대로 물어준 덕에, 조심스럽게 그를 미행할 명분까지 한 번에 해결됐다.
“허··· 이보게. 자네 말대로 진짜 애인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군. 9연대로 가는 길은 이쪽이 아닌데 말일세.”
느끼하면서도 야릇한 눈으로 정현일 대위가 모는 차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행을 들키지 않기 위해 헤드라이트는 끈 지 오래였다.
“연대장님, 여기서는 제가 확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쉽군. 그래. 잘 보고 와야 하네.”
절대 본인이 궁금한 건 아니라더니.
말과 행동이 따로 놀고 있었다.
정현일 대위가 모는 차는 인적이 드문 민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둠에 몸을 숨겨 따라가자, 이내 차가 멈추고 정현일 대위가 내렸다.
‘역시 뭔가 있다.’
그는 차에서 내린 뒤 곧바로 목적지로 향하지 않았다.
얼핏 봐도 아무런 인적도 없음에도 전, 후, 측방을 꼼꼼히 살핀 뒤 이동하고 있었다.
꿍꿍이가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남은 건 확인뿐.
정현일 대위는 민가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청력 조절 프로세스 가동]
여자다.
민가 안에서 정현일 대위와 여자의 목소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새끼 봐라? 아주 구체적으로 개새끼네. 이거.”
분명한 건, 평범한 연인끼리 나눌 대화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