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23화 (23/149)

23화. 남로당, 정현일 대위

시간이 없다.

그래서 서둘러야 한다.

“박선영 동지, 어서 문 좀 열어 보시게.”

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난 뒤, 문이 열리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약속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약속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오. 자칫했다간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단 말이오.”

남조선 로동당.

줄여서 남로당.

박선영은 남한과 북한을 잇는 남로당 연락책이었다.

어딘가 불편한지, 앉기 전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리며 앉을 자리를 찾았다.

박선영의 양 눈엔 흰 백태가 진하게 서려 있었다.

남로당에서 핵심 임무 중 하나인 연락책 임무를 맡긴 이유기도 했다.

“이쪽으로 앉으시게.”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까칠한 년.

내민 손이 무안스럽게 손을 쳐냈다.

“당에서 약속되지 않은 만남은 최대한 자제하라 한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혹 암행이 붙지 않았는지는 잘 확인하셨겠지요?”

“철저히 확인했습니다. 당의 미래 계획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칠 일이라 한시가 급하였습니다. 여기, 이 편지에 간략히 내용을 담아 두었습니다.”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처럼 급작스러운 행동은 탈을 만드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그 탈은 우리에게 있어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동아줄이지 않습니까.”

“잘 알고 있소. 기다리는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 박선영 동지 자네도 조국 통일의 그 날까지 부디 몸조심하시게.”

미리 약속되지 않은 경로를 통해 연락책을 접선하는 건 금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7사단 방어 계획과 대전차 방어 계획이 바뀔지도 모르는 것을.

작다면 작은 부분일 수 있으나, 그 작은 독이 아주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강산 중위··· 이 씹어먹을 놈.’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모를 놈 하나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있었다.

박헌영 부위원장 동지가 이끄는 인민군대가 반드시 남조선을 해방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 나라의 답이라는 것이 생길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맏아들로 태어나 자란 나로서는 절대 나라가 이 꼴로 돌아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똥물에 튀겨 죽일 놈들···’

이 나라가 일제강점으로부터 해방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숭고한 피를 흘렸던가.

고결한 독립군의 정신을 계승해야 할 군에는 일본군 출신, 친일파들이 주요 보직을 쥐어 잡고 있었으며, 대통령이라는 작자는 친일파 청산을 방해하고 나라를 미국에 팔아넘기려 하고 있다.

아,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이들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같은 매국노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나라를 올바르게 끌어갈 민족의 영웅은 박헌영 동지뿐이다.

“아직 날이 찬데, 아궁이에 장작이나 몇 개 던져 놓고 가겠소.”

“일 없습니다. 가실 길이나 조심히 가십시오.”

그래.

분명, 이리도 선한 얼굴의 여자가 이리된 데는 나처럼 사연이 있을 것이다.

조국이 통일의 임무가 완수되는 날.

그간 묻지 못했던 그 이유를 물어볼 것이다.

-바스락!

“정현일 동지, 분명 암행이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나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각을 잃은 자들은 다른 감각이 뛰어나다던데.

“분명 없었네만··· 혹시 더 올 손님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박선영 동지가 고개를 떨어트리며 말했다.

“정현일 동지, 제가 손님을 어찌 잊겠습니까. 우리는 노출되었습니다. 계획대로 준비하십시오.”

아무래도 사연은 먼 미래에나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

아, 제기랄.

또 걸렸다.

지난번 고라니에 이어 이번엔 쥐새끼다.

나 혼자 심장 박동 소리까지 나노봇을 이용해 줄여 조심하면 뭐 하나 싶기도 하다.

고라니에 이어 쥐.

동물들이 나를 이렇게나 좋아하는지는 난생에 처음 알았다.

‘통신선은 없으니까 침착하게.’

연락책의 안가는 유, 무선으로 외부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진 않았다.

남로당 작당 모의인지, 남녀 사이의 아슬아슬한 선타기인지 모를 대화를 듣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신체 강화 프로세스 가동.]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미리 나노봇과 호흡을 맞춰 두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총을 장전하는 소리나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정현일 대위, 이젠 정현일 동지라고 해야 하나? 야심한 시각에 여기서 무엇 하십니까?”

더 모습을 숨기고 있어 봐야 달라지는 건 없었다.

되도록 회유를 통해 정보를 얻어내야겠지만, 사상으로 무장된 인간을 회유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회유보다는 제압, 제압이 쉽지 않다면 어쩔 수 없이 방법은 하나다.

사살하는 것.

“이강산?”

정현일 대위는 치부를 들켜 경악하는 대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 혹시 너도 남로당?

이런 느낌의 표정이랄까?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 착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저자는 우리 동지가 아닙니다. 처음 듣는 목소립니다.”

박선영의 말을 들은 정현일 대위의 표정이 마침내 기다렸다는 듯 경악으로 바뀌었다.

“지금 나를 미행한 것인가? 감히, 상관을 허락도 없이 뒤쫓아? 윗선 눈에 띄어 특진해 중위 계급장 달았다고 눈에 뵈는 게 없어? 어?”

아까 못 들은 모양이다.

정현일 대위가 아닌 동지라는 호칭을.

“박헌영에게 나라를 팔아넘기는 건 괜찮고, 제자리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국민과 군인 동료들은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까?”

자, 우선 회유.

“남조선군은 이미 뿌리부터 썩어있다. 뿌리 썩은 나무가 잘 자랄 리 없지. 이강산 중위, 자네야말로 기회를 주겠네. 남조선 로동당에 충성하고 남조선을 해방해 새로운 세상을 열 기회를.”

쥐새끼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이래서 책을 만 권 읽은 사람보다 한 권 읽은 사람이 무섭다는 말이 나오는 가보다.

사상누각에 빠져 내란을 음모하고 있는 남로당원에게 회유가 쉽게 통할 리 없었다.

“이미 이곳은 포위되었습니다. 저기 기어가는 작은 쥐새끼가 아닌 이상에야 빠져나갈 구멍은 없습니다. 투항 하십쇼. 마지막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사람이라고는 정현일 애인의 모습을 잔뜩 기대하고 있을 연대장과 운전병이 전부지만.

뭐 어쨌건 포위된 것이나 다름없다.

어차피 내게서 빠져나갈 수 없을 테니까.

-정현일 동지, 마지막 임무는 저 혼자 수행하겠습니다. 빠져나가는 즉시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세요. 이것이 제 마지막 임무입니다.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하고 있음에도 또렷하게 들렸다.

-자네만 남겨놓고 갈 순 없네. 혼자 짊어지기엔 너무 무거운 임무일세. 함께 나누도록 하지. 시간이 없네.

박선영이 소매 안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려는 듯, 연신 손을 꼼지락거렸다.

꼼지락 끝에 소매에서 두께가 1cm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얇은 줄이 눈에 들어왔다.

“남조선 로동당 당원 나 박선영은 안가 임무계획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다. 안가 수칙 5항. 안가가 노출될 시 안가와 자폭하라.”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노여워하지도 않는 무표정과 목소리 그 자체.

표정에선 그 어떤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촌각의 시간이 지날수록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핑!

수류탄 핀이 튕겨 나가는 소리.

이 소리는 절대 잊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정현일과 박선영은 도망치려 하지도, 그 어떤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 박힌 듯 서 있을 뿐이었다.

“제기랄.”

급히 폭발을 피하려 담 뒤로 몸을 숨겼다.

5, 4, 3···

-쾅! 쾅! 쾅! 쾅! 쾅!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파공음.

쥐고 있던 줄에 수류탄 여러 발을 연결해 놓은 모양이다.

연속적인 폭발음이 들리며 눈앞에 보이던 것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대··· 대체 무슨 일인가.”

폭발이 모두 끝난 뒤 얼마 되지 않아 함준호 대령과 운전병이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었다.

함준호 대령 손에는 이미 장전된 권총이 들려있었다.

내 앞에 서 있던 정현일과 박선영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정확히는 사람의 흔적이라 말할 수도 없는 형태가 되어 있었다.

“정현일 대위 외 1명이 미리 설치되어있던 수류탄으로 자폭했습니다.”

“뭐? 자폭? 정현일 대위가 대체 왜!”

“남로당원으로 군의 작전 계획과 기밀을 빼돌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도움이 될만한 것이 남아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도움이 될만한 것에는 나의 결백을 입증해 줄 증거도 포함이었다.

누가 나에 대해 의심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진 않을 상황이니까.

폭발이 일어났던 안가 내부로 천천히 들어섰다.

매캐하고 찝찝한 화약 냄새가 코에 진동했다.

벽이나 기둥과 같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구조물 사이사이엔, 좀 전까지 남로당원이었던 것들의 흔적이 낭자했다.

그간 꽤 많은 작전에 투입되며 적응이 된 탓인지, 낭자한 흔적에도 속이 안 좋거나, 메스껍지도 않았다.

“둘 중 하나밖에 없네. 문서였던 것. 사람이였던 것.”

아무런 소득 없이 안가에서 나오려 뒤를 돌리자 아직 열심히 열을 내며 타고 있는 종이 뭉텅이가 보였다.

발로 수차례 뭉텅이를 밟은 끝에서야 불을 끌 수 있었다.

이미 대부분 타버려 엄지손가락 크기의 종이 끄트머리 몇 장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운이 좋네.”

다 타버리고 끄트머리만 남은 종이 쪼가리.

그거면 충분했다.

운이 좋게도.

“이강산 중위, 뭘 좀 찾았나? 서운해하지 말고 듣게. 내 자네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은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일세. 아마 사실관계에 대한 조사를 받게 될 것이네.”

함준호 대령이 권총을 허리춤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 전에, 또 들러야 할 곳이 생긴 것 같습니다. 연대장님.”

“또? 들러야 할 곳? 이게 뭔가?”

안가 구석에서 찾은 종이 쪼가리를 함준호 대령에게 건넸다.

종이 쪼가리에는 다른 큰 종이에 담을 수 있는 정보보다 더 중요한 정보가 담겨있었다.

“라엄광이 서명? 이게 왜 여기에···”

라엄광이라고 적힌 이름 옆에 서명이 된 종이.

까맣게 타버렸지만, 글씨를 알아볼 정도로는 충분했다.

“정확한 것은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반드시 필체를 대조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 서명한 라엄광이 총참모장님 부관 라엄광 중위가 맞는지.”

이제야 처음 그를 봤을 때 느껴졌던 묘한 이질감과 인상에 대한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군 내부의 숙군 절차를 충분히 거쳤다 한들, 전부를 뽑아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흰머리는 뽑고, 또 뽑아도 다시 나는 것처럼.

남은 건 육군본부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는 일뿐이었다.

“연대장님. 염치없지만 혹시 육군본부까지 한 번만 더 태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함준호 대령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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