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폭풍전야(1)
육군 총참모장 집무실.
“이 새끼들 이거 완전 정신 나간 것들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 시간에 소란이야. 소란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반드시 직접 만나서 전해야 할 사안이 있다고만 전해왔습니다.”
새벽에 가까워진 야심한 시간.
공관에서 자다 깨 집무실에 나온 채병덕 참모장은 잔뜩 성이나 있었다.
난데없이 7사단 1연대장이 찾는 것도 모자라 이강산?
그놈은 또 왜 껴 있냔 말인가.
열이 받지, 안 받아?
“별일 아닌 일로 이리 호들갑 떨어대진 않을 텐데.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겁니다.”
당직 근무 중인 인원을 제외하고는 본부에 나와 있는 사람은 채병덕 자신과 공관 부관 라엄광 뿐이었다.
“충성!”
차에서 도착한 함준호 대령과 이강산 중위가 경례를 해왔다.
경례를 제대로 받아줄 생각 따윈 없었다.
손을 치우라는 시늉을 할 뿐이었다.
“이봐. 당신들 말이야. 별일 아니면 각오해야 할 거야. 알겠나?”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늦은 시간에 불쑥 대면을 신청한 점, 죄송합니다.”
함준호 대령이 열심히 성을 내는 채병덕 참모장을 달래듯 집무실 방향으로 그를 이끌었다.
“남로당원 두 명이 남로당 연락책 안가로 추정되는 건물에서 수류탄을 이용, 자폭했습니다. 참모장님.”
“그래서?”
이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애매한 미지근함.
어쩌라고? 는 이미 예상한 반응이다.
애초에 채병덕 참모장을 찾아온 것은 ‘서둘러 숙군 절차를 강화해야겠군.’ 이라던가 ‘수고했네. 다친 곳은 없는가?’ 이딴 말을 듣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까.
“남로당 빨갱이 놈들이 어디 한 둘인가? 군 내부에 있는 놈들까지 뿌리 뽑으려고 각고의 노력에 있지 않은가. 고작 그깟 일로 자는 나를 깨웠단 말인가? 내일 보고해도 충분했을 텐데.”
“자폭한 남로당원 중 한 명이 현직 육군 대위였습니다. 그리고 이건 자폭 후, 이강산 중위가 직접 안가 내부를 수색해 찾은 겁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이게 뭔가? 라엄광이? 라엄광이가 서명한 종이가 왜 거깄는 게야. 이거 확실한 정보야?”
그 서명을 한 필체와 라엄광 필체가 같다는 것에 모든 것을 건다.
확인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문밖에서 하품이나 해대고 있는 라엄광을 안으로 부르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 확인할 방법이 있다.
참모장 집무실에 쌓여있는 수많은 보고서 중 어딘가에서 그의 서명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참모장님께 올라온 보고서 중, 공관 부관의 서명이 있을 만한 보고서를 찾은 뒤 대조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마침 오늘이 공관에서 사용되는 경비 지출 증빙 서류가 올라오는 날이네. 거기에 라엄광이 서명이 있을 걸세.”
채병덕이 거구의 몸을 일으켜 느릿느릿 책상으로 향했다.
보고서의 우측, 상단.
라엄광 중위의 자필 서명이 쓰여있었다.
“이런 찢어 죽일 놈. 절대 편히 죽게 놔두지 않겠어.”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채병덕 참모장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서랍 안에 들어있던 권총을 꺼냈다.
“참모장님.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직 더 중요한 것이 남았단 말인가?”
확실한 건 라엄광은 적이 맞다.
북에서 남파된 간첩이거나, 남로당원 이거나.
‘나’라는 역사의 변곡점이 없었다면, 라엄광은 6.25 직전까지 참모장 부관 노릇을 하며 정보를 팔아먹은 뒤, 전쟁 직후 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중요한 건, 제대로 된 군적도, 훈련을 받은 기록도 없는 장교가 어떻게 육군 참모장의 부관이 될 수 있었는가.
아무리 국군이 단단히 여물어지기 전이라고는 하나, 그렇게 만만한 집단이 아니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배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그 배후가 누군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육군본부로 발걸음을 옮기기 전, 채병덕 참모장 또한 의심해봐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수많은 남침 정보를 무시한 것으로 모자라 전쟁 초기 병력을 축차 투입하고, 심지어 전쟁 하루 전은 미군을 포함한 고위 장교들과 술이나 퍼먹고 뻗은 지휘관으로서 하지 않아야 할 행동만을 모아놓은 교과서 그 자체.
일부러. 고의적.
다른 사람이었다면 두 가지 경우를 계속해서 의심했을 것이다.
채병덕 참모장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다면 모르겠지만, 겪어본 이상 알 수 있었다.
고의가 아닌 무능.
한 단어로 그를 설명할 수 있었다.
“아··· 배후는 모른단 말인가.”
이 상황에 그런 아쉬운 표정 짓지 말라고.
끝끝내 범인을 잡지 못하고 미제로 끝나는 찝찝한 추리 소설을 한 무더기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잠도 다 깼는지, 참모장의 눈이 처음보다 두 배는 커져 있었다.
“우선, 라엄광을 잡아 배후를 심문하는 것이 가장 빠르지 않겠습니까?”
집무실에 들어온 내내 침묵을 지키던 함준호 대령이 거들었다.
“육군본부 내에도 첩자가 더 있을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최대한 은밀하고 조용히···”
새벽에 참모장실로 기동대를 불러 쥐새끼를 잡는 것은, 벼룩 잡자고 집에 불을 지르는 것이나 다음 없었다.
낌새를 눈치챈 다른 쥐새끼들은 전부 도망갈 것이 눈에 훤했으니까.
“저놈은 내가 직접 처리하지.”
채병덕 참모장이 어깨를 두어 번 돌렸다.
“총은 안됩니다. 참모장님.”
최대한 은밀하고 조용함을 강조한 지 3초나 됐나?
“이런, 깜빡했군. 물론 총은 안 쓸 것이네.”
채병덕 참모장이 멋쩍은 듯 웃었다.
이내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다시 서랍 안에 넣고는, 집무실 문을 열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라엄광을 찾았다.
“이봐, 라엄광이.”
“예. 참모장님. 다시 공관으로 모시겠습니다.”
부른지 얼마 되지 않아 라엄광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나는 공관으로 돌아가겠네만···”
“어··· 어, 참모장님!! 왜 이러십니까.”
채병덕 참모장이 오른손으로는 라엄광의 옷깃을, 왼손으로는 어깨를 잡은 뒤, 몸을 돌려 그대로 주저 없이 그를 바닥에 내다 꼽았다.
-우드득.
-끄아아아아악! 읍··· 읍···
들려오는 소리가 어디 한군데는 확실히 부러졌음을 알려왔다.
밀려오는 고통으로 인해 소리 지르던 입은, 곧 채병덕 참모장의 커다란 솥뚜껑 같은 손에 의해 막혔다.
“공관에는 사람이 사는 것이지, 쥐새끼가 사는 곳이 아닐세. 라엄광이.”
육중한 몸으로 라엄광을 누르며 귓속말을 속삭이는 참모장의 모습은 정말인지 소름 돋았다.
라엄광은 이미 기절해버린 뒤였지만.
***
9연대 주 저항선 만세교 일대.
“지금 여러분의 삽질 한번 한번이 나와 가족의 목숨, 나아가 나라를 구할 것입니다.”
수백 명이 넘는 대대급 병력이 일렬로 늘어져 진지 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시야에 보이는 그 누구도, 대충하거나 요령을 피우지는 않았다.
-흡.
삽을 발로 밟자, 삽이 땅에 깊게 박혔다.
삽을 밟고, 박힌 삽을 힘껏 위로 들어 올리기를 계속 반복하자, 굵은 땀방울이 땅을 적셨다.
절대 꺾이지 않은 것 같던 위용을 자랑하던 동장군도 서서히 힘을 잃으며 물러섰다.
쇠붙이처럼 단단히 얼어있던 땅이 녹으면서, 이젠 사람의 힘으로 파기에 충분해 지고 있었다.
“자네 말대로 25연대를 빨리 7사단으로 편성한 덕에, 진지구축이 훨씬 빨라 졌군.”
이곳에 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우선, 38선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제1 방어선을 주민 통제 및 보호, 적정 수집을 위한 최소한의 병력으로만 운용하는 대신, 지뢰와 철조망 같은 장애물을 최대한 활용해 적을 지연시키기로 했다.
“이 정도 준비 상태라면 적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겠나?”
함께 진지 공사를 시찰하던 함준호 대령이 던진 질문이었다.
이전과 비교한다면 더없이 나아진 준비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충분하냐고 묻는다는 질문엔 도무지 동의할 수 없었다.
그 일련의 사태들을 겪은 뒤에도 깨어있는 몇몇 수뇌부를 제외하면 미 군정과 한국군은 아직도 전면전은 일어날 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니까.
“최선을 다하는 것뿐 아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최선이라. 자네 다운 대답일세.”
깊게 파 내려가고 있는 진지와 지뢰, 철조망, 필사의 의지로만 적을 온전히 막아낼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경사는 없을 것이다.
전쟁이 날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해 전방에서 적을 막아내 피해를 최소화한 뒤 북한과 소련, 중공군의 야망과 야욕을 산산조각내는 권선징악 이야기.
사람들이 권선징악을 꿈꾸고 바라는 이유는 간단하다.
‘권선징악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게 아니지.’
현실에선 잘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바라는 것이다.
원산항 폭파나 담화문처럼 예정에 없던 일들이 벌어진 지금은, 내가 알고 있는 미래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충분하다.
원래라면 전쟁이 발발한 후 조용히 사라졌을 라엄광이 체포되면서, 줄줄이 달린 소시지 마냥 50명이 넘는 남로당원들이 군 각지에서 체포됐다.
예측할 수 없게 바뀌는 상황을 남보다 빠르게 인식하고 판단해 행동하는 것.
내가 말하는 최선과 가장 가까운 표현이었다.
-위이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이잉!
‘오늘인가?’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인원들이 삽을 내팽개친 뒤, 자신이 파고 있던 진지 안으로 몸을 숨겼다.
“적기가 출현했다! 모두 진지 안으로! 진지 안으로 들어가 빨리! 자네 뭐하는가!”
[형식 : yak-9 소련제 엔진 : 클리모프 VK-107A 12기통 수랭식 피스톤 엔진 1기, 1,500마력···]
소련제 전투기 yak-9이 양쪽 날개를 흔들어 귀순 의사를 밝히며 남하하고 있었다.
‘어차피 격추할 수 있는 전투기도 없다만.’
1950년 4월 28일.
저 전투기엔 북한 공군 소속 이건준 중위가 타고 있을 것이다.
아직 내가 일으키고 있는 바람이 그의 귀순까지 영향을 주진 않은 모양이다.
굉음을 내던 프로펠러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대대원이 하나둘씩 진지에 박아두었던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자, 모두 고개를 돌려 주위를 봐라. 저 전투기가 기관총을 갈겨댔다면, 여기 있는 절반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쉬지 않고 열심히 진지를 파낸 절반 정도 되는 인원들은 머리를 포함해 몸 전체를 진지 안에 숨길 수 있었다.
나머지 절반이 얕게 파낸 진지는 머리나 등이 지면 위로 불룩 솟아 있었다.
“자! 다시 진지구축을 재개한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란 말은 안 하겠다. 힘들고 지치면 쉬어도 좋다.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든 대대원이 미친 듯이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 어떤 말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삽과 땅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삽과 땅이 만들어내는 아우성이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했다.
곧 몰아닥칠 폭풍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