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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25화 (25/149)

25화. 폭풍전야(2)

7사단장 집무실.

“그래. 진지구축은 잘 되어가고 있던가? 자네도 알다시피 이제 곧 본격적인 농번기가 시작되면 지금처럼 많은 병력을 투입하는 건 힘들 걸세.”

군에 비축된 식량문제는 단기간에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휴가를 내보내며 내어 줄 건빵은 식량창고에 충분했지만, 군내 쌀이나 곡물의 비축량은 전 병력을 부대에 품고 있기엔 한없이 부족했다.

“그간 구축했던 어떤 진지보다 튼튼하게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병사들이 스스로 삽질 한 번, 땀 한 방울이 목숨과 귀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38선 인근 제 1방어선 진지들은 구축이 거의 완료된 상태입니다.”

소련제 전투기를 타고 38선을 넘어 귀순한 이건준 중위는 병사들에게 엄청난 인상을 심어주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 기관총을 갈겨대는 전투기, 비처럼 쏟아질 총알과 포탄으로부터 살아남을 확률을 높이는 방법은 더 튼튼하게 진지를 파내는 방법뿐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꼈을 테니까.

“수고했네. 자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믿을 만하겠지. 사단 전후방 할 것 없이 돌아다녀 피로할 줄 아네만, 서울에 좀 다녀와야겠네.”

서울?

안 그래도 사단 전 후방에 대한 세밀한 작전계획을 세우고 관리하기도 몸이 모자란 판에.

작전 장교가 무슨 전국을 오가며 일하는 영업사원도 아니고.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혹여나 참모장 부관 라엄광을 비롯해 군내 남로당 간첩 세력을 뿌리 뽑은 것에 대한 공을 치하해 특진이라도 시켜준다면 모를까.

“각하께서 직접 서면을 보내오셨네. 곧 국회의원 선거가 있지 않은가. 각하께서 근래 있었던 남로당 안가 자폭 사건이나, 특히 라엄광이 그리 요직에 침투한 것에 대해 근심이 많으신 모양일세.”

분명 걱정할만한 일은 맞지만, 정치인이 선거를 앞두고 눈에 보이는 게 선거 결과 말고 뭐가 있겠는가.

무소속의 초강세 속에 보수 야당에게 제1당을 넘겨줄 게 눈에 훤하게 보이는 결과 말이다.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보지 않았다면, 선거도 12월 이후로 밀렸을걸?

“각하께는 죄송하오나, 사단장님도 아시다시피 전방지역에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어찌 제가···”

고작 서울까지 부르는 이유가 집에 도둑이 들지 않게 경비나 서달라는 이유라고?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못 간다고 전해라.

아니, 안 간다고.

어차피 내가 생각하는 미래 대한민국 계획에 올림, 내림도 못 하는 대통령은 글쎄.

“자네 뜻이 그렇다면야··· 아쉽게 됐네. 하루 정도만 서울에서 임무 수행한 뒤에 각하께서 친히 남로당 세력 축출에 대한 공으로 자네를 1계급 특진시켜 주시기로 약속하셨네만. 어쩔 수 없지. 함께 있던 함준호 대령에게 공을 돌릴 수밖에.”

“언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억지로 무리할 필요 없네.”

“지금 바로 준비 마치는 대로 서울로 출발하겠습니다. 사단장님. 충! 성!”

말에도 엄연히 기승전결이라는 게 있는데, 왜 자꾸 제일 중요한 말을 뒤에 하는지 모르겠다.

북한이 미쳐서 내일 당장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 서울에 가야 한다.

아니, 간다.

바뀐 상황에 빠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대응하는 것일 뿐.

분명 말했다.

그게 곧 최선이라고.

***

평양,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회의실.

“이보오, 박헌영 동지. 어찌 된 게요? 인민군대가 서울까지만 밀고 들어가면, 각지에 있는 20만 남로당원들이 총 궐기한다 하지 않았소?”

김일성 위원장이 박헌영 부위원장을 나무랐다.

중공군 편제만 끝마친다면, 남침 준비는 완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로 계획이 틀어지거나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잔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위원장 동지, 그깟 끄나풀 몇 뿌리 뽑혔다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말 한마디면 들고 일어날 자들이 수두룩합니다.”

월북 이후 남로당 총책을 맡아온 김삼룡과 무장 총책임자 이주하가 한 번에 일망타진 당하면서 남조선 내 남로당 힘이 빠진 건 누구나 예측 가능한 사실이었다.

박헌영은 머리가 잘린 몸통은 아무리 크더라도 의미가 없음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38선 인근 남조선 아새끼들이 진지를 더 견고히 파고 있다는 보고는 왜 무시한 게요. 내래 말하지 않았소? 이건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그런 놀이가 아니오.”

김일성의 표정과 말투에 독기가 서리자, 이를 눈치챈 박헌영이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위원장 동지, 보고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날씨가 녹으면서 으레 있었던 연례행사 같은 것이지요. 남조선 놈들이 진지를 아무리 깊게 판들, 우리 인민군 땅크가 밟고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위원장 동지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남조선 군대는 땅크를 막을 수단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대로 된 싸움도 일어나지 않고 위대한 인민의 군대가 전광석화처럼 남조선을 해방할 것이 분명합니다.”

박헌영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될 남로당이 무너지고 있음에 심란했지만, 위원장 앞에서 선동가다운 면모를 힘껏 뽐내고 있었다.

땅크가 가지는 전략적 우위로 주제를 바꾸며 머리가 잘린 남로당 이야기를 덮고 있었다.

“위원장 동지. 그래도 혹여 근심이 생기신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김삼룡이, 이주하가 잡힌 것이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우리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라고. 리승만에게 포로 교환을 제안하는 겁니다.”

“포로 교환? 교환이라는 것은 양쪽이 비슷한 가치가 있어야 성립되는 것 아니겠소. 저들이 혹할만한 게 있다는 말이오?”

포로 교환이라는 새로운 활로에 김일성의 표정이 점점 풀리고 있었다.

박헌영은 대화 주제를 본인 입맛대로,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김일성과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조만식이 있지 않습니까. 동지. 리승만 입장에서는 환장하고 들게 분명합니다.”

“조만식은 소련군 관리하에 있지 않소. 그의 행적을 소련에 묻고 공화국으로 데려오는 데만 시간이 오래 걸릴 터인데···”

조만식.

일제 강점 시절 독립운동가이자 항일운동을 하며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에 힘을 쏟았던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항일운동의 방식으로 비폭력을 원칙으로 삼은 민족주의 계의 거물이었기에, 정치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이승만에겐 꼭 필요할 법한 인물이었다.

“행적을 소련에 물을 필요도, 데려올 필요도 없습니다. 동지.”

“무슨 뜻이오?”

“그저 작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남조선 놈들과 평화 공작을 위장하는데 이용할 뿐입니다. 제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적에게 잡혔다면, 이렇게라도 인민과 공화국을 위해 쓰이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위원장 동지.”

보통 언변이 아니었다.

박헌영의 혀에서부터 술술 나오는 말을 듣고 있자면, 팥으로 메주를 만든다 해도 그럴듯하게 들릴 것 같았다.

“썩 괜찮은 생각이오. 서두르되, 차질없이 진행하시오. 중국에서 넘어온 동지들의 부대 편제도 거의 끝나가니.”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박헌영이 회의실을 나가고 얼마 뒤, 누군가 노크도 없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경례나 그 어떤 인사도 없이.

“위대하신 위원장 동지, 오늘도 저런 간사한 선동꾼 입소리에 넘어가진 않았겠지요?”

“연락도 없이 어찌 오셨소. 김책 사령관 동지.”

둘 중 먼저 깍듯한 인사를 건넨 건, 김책이 아닌 김일성 위원장이었다.

***

“대위! 이! 강! 산!”

“자네처럼 큰 공적을 이리도 연속적으로 이뤄내는 군인은 처음 봤네. 앞으로도 쭉 군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힘써주게.”

서울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유일하게 나눈 짧은 대화였다.

도려내고 또 도려내도 계속 어디선가 나타나는 남로당원들 때문에 혼란스러운 민심을 진정시키는 것엔, 훌륭한 군인을 표창하는 것도 일종의 정치적 방법이었다.

‘갈 길이 멀다.’

대위로 진급했다 해서 크게 바뀌는 건 없었다.

2개에서 3개로 바뀐 사각형의 계급장이 더욱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을 뿐.

아.

군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속도의 빠른 진급에 배가 아팠는지, 없는 말을 지어내 장교들도 늘어났다.

뭐, 천재를 시기하는 멍청이들은 역사상 항상 어디에든 존재해 왔으니까.

“105mm 포 3문, 57mm 대전차포 2문 이동준비 완료했네. 이강산 대위. 지난번에 봤을 땐 분명 중위였는데, 벌써 대위라니. 다음에 봤을 땐 어떨지 궁금하군.”

하현식 대위가 구면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받아줄 여력 따윈 없었다.

폭풍의 영향권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으니까.

포대를 최전방으로, 그것도 곡사도 불가능한 거리에 배치한다면 포에 대한 기본 개념도 없는 정신 나간 지휘관 소리를 듣겠지만, 그간 내가 보여왔던 행적들이 신뢰에 지대한 영향을 만들어냈다.

“거점에 도착하면, 포를 운용하는 인원들 모두 작전에 대한 숙지를 한 번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동하시죠.”

“자! 5포대 전원 차량 탑승 후 이동! 이보게. 이강산 대위. 사람이 모든 훈련에 그렇게 진지하면 있던 힘도 금방 빠지겠네. 힘 좀 빼고 편하게 있다 가게. 훈련 마치고 돌아가면 술이나 한잔하게나.”

하현식 대위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전에도 지키지 못한 약속이 아직 가슴에 남아있다.

술 한잔.

술잔 기울이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냐만.

이곳 포대 연병장을 떠나는 순간, 간절히 원하는 소원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들은 그저 새로운 방식의 포 사격 훈련이라고 알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실전과 같은 훈련이라도 결코 실전과 같을 순 없다.

어차피 실전이라고 말한들, 미래를 보는 예언가가 아닌 이상에야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7사단 예하 포병대대 정예들이 각자 3문의 105mm 곡사포, 만약을 대비하기 위한 57mm 대전차포와 함께 미리 선점해 놓은 거점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실전과 같은 훈련이 아닌, 훈련과 같은 실전을 위해.

“오늘 날씨 한 번 끝내주는군. 어찌 여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을 수가 있는지. 안 그런가 작전 장교?”

만세교 인근 거점.

포 방열, 위장을 마치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여름 하늘이 이렇게 높은 건 저도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구슬땀을 흘리며 포를 위장하고 있는 포대원들을 보니 품에 가져온 종이를 나눠줄 엄두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여기에 훈련에 임하는 각오들을 한마디씩 적으라고 해 주십쇼.”

“에이, 무슨 유서도 아니고 이게 뭔가?”

하현식 대위가 입을 내밀며 말했다.

“말 그대로 각오일 뿐입니다. 내가 이렇게 토요일에도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알겠네. 그런 거라면야.”

지금쯤이면 지구 반대편에서는 월드컵이라는 축구 대회 개막식에 열광하고 있을 텐데.

1950년 6월 24일.

만세교에서 올려다보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그저 그랬다.

단지, 비가 올 것이라 예상하기 힘든.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그저 그런 날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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