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폭풍(1)
폭풍이 몰아닥치기 전 하늘에 구름이 없는 이유는, 폭풍이 주변 모든 구름을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일기예보도 없는 지금, 구름 한 점 없는 평화로운 하늘을 보며 폭풍을 대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준비된 자들을 빼고는.
“전 인민 부대에 작전 개시 명령 하달하라. 폭풍처럼 진격하라!”
김일성 위원장이 마침내 작전 개시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은 38도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 1, 2, 3, 4, 5, 6, 12사단과 105 전차 여단을 비롯한 11개 부대에 하달되었다.
작전명 폭풍.
마른하늘에 어둡게 드리워진 폭풍이었다.
***
새벽 4시.
국군 7사단 9연대 2대대 방어구역. 만세교.
하늘에선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만 하늘에서 내리는 건, 비뿐만이 아니었다.
-쾅!
“씨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모두 진지 밖으로 대가리 들지 마! 포격이 잠잠해질 때까지 대기한다!”
-쾅! 쾅!
“거기 너, 뒤지고 싶어 환장했어? 당장 대가리 숙여!”
고성과 험한 말이 오고 갔다.
북한군 2개 포병연대에서 쏴대는 76.2mm, 122mm 야포 포탄이 38선 전역에 거센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포성이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하현식 대위와 내가 고개를 들지 말라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지만, 포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들리지 않았다 한들,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미 모든 포대원이 공포에 떨며 진지에 머리를 깊숙이 박고 있었으니까.
“이봐, 당장 사단에 지원요청 하겠네. 포 몇 발 쏴대던 지난 번들과는 달라!”
“포격이 잠잠해지면 북한군이 물밀 듯 밀고 내려올 겁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임무는 현 만세교 남단 진지에서 적 선두 전차들을 무력화시켜 시간을 버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근처에 비처럼 쏟아지는 포탄을 보고 멀쩡할 강심장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평소 정신력과 체력이 강한 정예들만을 선발해 왔음에도, 처음 겪는 포탄 세례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포대원이 거의 없었다.
하현식 대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포대장님!”
눈이 풀려 초점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하현식 대위의 철모를 바로 씌워주며 말했다.
철모를 여러 번 두들기자, 정신을 차렸다는 듯 눈동자가 제 위치를 찾았다.
“아···알겠네.”
계속 이어지는 무자비한 포격은 특정 지역을 겨냥한 표적 사격이 아닌 38선 남쪽 전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겠다는 심산에 가까웠다.
북한군 3사단 예하 포병연대에서 쏴대는 포격은 특수 탄이 아닌 일반 HE 고폭탄.
포격에 빨리 대비해 진지 내로 몸을 숨겼기에 다행히 포대 내 사상자는 없었다.
“이봐··· 정신 차려. 정신.”
“눈떠. 이 새끼야. 눈!”
길게 파진 진지를 돌아다니며 한명 한명의 정신을 붙잡아 줬다.
단순히 근처에 가서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 정신을 차리는 인원이 있는가 하면, 뺨을 두어대 맞고서야 정신을 차리는 인원도 있었다.
중요한 건, 모두가 정신을 되찾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모두 잘 들어라! 잠시 뒤 인민군 T-34 탱크가 이곳을 지나갈 것이다. 우리는 T-34 탱크를 직접 조준해 적 탱크를 무력화한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반드시 초탄을 궤도에 명중시켜야 한다. 그간 열심히 훈련해온 자신과 전우를 믿어라.”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초탄 명중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200M도 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서 직사로 포를 쏜다는 건, 사격과 동시에 위치가 노출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방에 T-34 포탑을 통째로 날려버린다면 모를까, 명중에 실패해 자신의 위치를 노출 시킨 포병의 끝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명중한 뒤에는 어찌합니까? 하늘의 뜻에 맡깁니까?”
하늘의 뜻?
하늘의 뜻에 맡기기는 개뿔.
대책 없는 무모한 작전에 애국심을 핑계 삼아 목숨을 바치라는 명령만 내리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선두 탱크를 명중하는 즉시 포에서 조준경만 떼어 분산 후퇴한다. 선두 탱크가 만세교에서 발이 묶인다면, 후속하는 보병 병력도 발이 묶이는 셈이나 다름없다. 후퇴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다. 성공적인 지연, 그게 작전의 핵심이다.”
“알겠습니다. 작전 장교님. 반드시 일격에 빨갱이 놈들 탱크 다리를 부숴버리겠습니다.”
명령 하달에 하현식 대위도 포대원들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토를 달거나 의심하는 사람도 없었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포격에서 온전히 정신을 붙잡고 있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
나뿐이었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직책이 또 하나 늘어난 기분이군.’
이쯤 되면 겸직의 대명사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포격이 잠잠해진 이후, 실질적으로 5포대를 이끄는 지휘관은 하현식 대위가 아닌 내가 되어있었다.
포격으로 인해 혹시 틀어졌을지 모를 조준점을 다시 확인하고 한숨 돌리고 있을 무렵, 남쪽에서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군용트럭이 보였다.
“작전 장교님, 아군인 것 같습니다. 제가 확인해보고 오겠습니다.”
계급장을 보니 상병이었다.
통성명할 여유 따윈 없었기에 이름을 부를 순 없었다.
“맞는 것 같다만, 조심하게. 아직 피아식별 체계가 정확히 전파되지 않았을 테니.”
국군 군복을 입은 채 남쪽에서 북쪽으로 대전차포를 이끌고 올라오는 부대는 아군일 확률이 매우 높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한순간 방심이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낳아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전쟁터니까.
선택 하나하나가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곳이다.
“9연대 소속 대전차 중대라고 합니다. 57mm 3문과 M9 바주카포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57mm 3문과 M9.
대전차 중대는 만세교 남단 정면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미 5포대가 만세교 좌, 우측면에 105mm를 배치해 둔 상황.
간지럼을 태우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정면에 추가로 57mm를 배치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7사단 작전 장교 이강산 대위일세.”
“대전차 중대장 이성준 중위입니다. 작전 장교님께서 어찌 여기에···”
사단 작전 장교가 최전방에 있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포격 한복판에 105mm 포와 함께 있다니.
충분히 의아할 만했다.
“훈련 시찰 나왔다가 이렇게 됐네. 만세교 남단에 진지를 구축할 생각인가?”
“만세교 남단에서 남하하는 적 탱크를 저지하라는 명령입니다.”
“잠깐··· 혹시 지금 상자에서 내리고 있는 탄이 APDS가 맞는가?”
“예. 다만 철갑탄은 고작 3발뿐입니다. 미 군사고문단이 교보재로 사용하기 위해 아주 소량 들여온 것이 중대에 남아 있어 가지고 왔습니다.”
분명 군의 공식 전사에 APDS 철갑탄은 한 발도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고작 3발이 아니다.
무려 3발.
“잠시 기다리게.”
머릿속에선 나노봇이 그간 했던 것과 다른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다.
예상에 없었던 대전차 중대가 가져온 APDS 철갑탄.
계획을 수정하기에 충분한 변수였다.
***
오전 8시 30분.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 늦은 시각, 멀리서 흙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인민군 3사단 7연대와 9연대, 105 탱크 여단 소속 109연대였다.
예상보다 30분이 넘게 지체된 것을 보니, 미리 심어놓은 대전차 지뢰와 대전차 호가 조금이나마 발목을 잡은 듯했다.
“모두 위치로. 절대 사격 명령이 있을 때까지 사격해선 안 된다. 절대.”
“알겠습니다.”
[청력 조절 최대]
청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자 탱크의 우렁찬 엔진 소리, 궤도가 작은 돌과 모래를 으깨며 다가오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들려왔다.
-이 43번 도로만 지나면 서울로 가는 길은 다 뚫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남조선 아새끼들은 포탄 세례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구만 기래.
-그러게 말이오. 동무. 이러다 싸움다운 싸움 한 번 못해보고 집에 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고만.
-이 따발총이나 시원하게 갈겨보나 했더니만. 이 땅크가 있으니 우리가 할 게 없지 않소.
탱크 뒤를 졸졸 따르는 인민군의 대화가 아주 작은 소리로 섞여 들려왔다.
원래대로라면 미리 정찰병을 보내 매복은 없는지, 위험요소는 충분히 제거되었는지 확인이 먼저였지만, 지금껏 무적에 가까웠던 탱크를 맹신하고 있는듯했다.
“아직.”
선두에선 탱크 3대가 한 번의 거리낌 없이 만세교 위를 건너고 있었다.
모두가 손에 땀을 쥔 채 내 입에서 발사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작전 장교. 더 지체했다가는···”
하현식 대위가 작은 목소리로 보채왔다.
탱크들이 어느덧 만세교 중간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
조금 더.
아직이다.
“도대체가···”
하현식 대위가 주먹을 불끈 쥐고는 눈을 감았다.
차마 볼 수 없다는 듯이.
3대의 탱크 중 가장 선두를 달리던 탱크가 만세교를 빠져나올 때쯤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탱크는 만세교 중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쏴!”
명령과 동시에 각각의 표적을 조준하고 있던 포수들이 일제히 줄을 당겼다.
-쾅!
가까운 거리였기에 3발이 모두 발사되었음에도 한 발을 쏜 것 같은 포성이 울렸다.
명중.
가장 선두에 있던 T-34 탱크의 궤도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모두 조준기만 빼서 후퇴한다! 후퇴! 서둘러!”
명중. 명중.
2번째, 3번째 역시 명중이었다.
명중한 탱크가 멈추는 것을 보며 환호할 시간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이내 정신을 차린 T-34 탱크의 포신이 포격이 이루어진 방향으로 재빨리 회전하고 있었다.
-펑!
T-34가 쏘아낸 포격을 맞은 105mm 곡사포가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분해되었다.
T-34의 포격, 후속하는 인민군이 쏘아대는 총알이 진지가 있던 자리에 쏟아져 내렸다.
다행히도 그 자리엔 사람이 아닌 분해된 포 파편만이 나뒹굴 뿐이었다.
“성공일세. 성공이야! 3대 모두 궤도를 끊어냈네. 이보게, 뭐하는가!”
다시는 걸을 수 없게 T-34의 다리를 박살 냈다.
다리를 막은 탱크를 견인한 뒤 다시 진격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다들 잊은 모양이다.
“아직? 아, 대전차 중대, 중대는 어디 있는가!”
5포대 전원이 초긴장 속에 임무를 완수해 잊고 있었던 대전차 중대.
만세교 정면에 진지를 구축하는 듯하더니 이내 시야에 보이지 않았음을 잊고 있었다.
-쾅!
-쾅!
-쾅!
질문에 곧장 대답이라도 하듯, 동시다발적인 포성이 만세교 일대에 울려 퍼졌다.
57mm 대전차포, M9 바주카포가 만세교 다리 위에 쏟아져 내렸다.
대전차 중대가 쏜 ADPS 철갑탄이 T-34 탱크 엔진실을 후벼 파 내려가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끄아아악!
아까와 또 다른 점은 105mm 진지를 향해 총을 쏴대던 인민군 보병들이 포격에 휘말려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지옥.
지옥에서나 들릴법한 합창 소리와 함께 다리 위는 어느덧 불지옥으로 변해있었다.
“잡았다. 씹새끼들.”
T-34 탱크의 다리를 넘어 심장을 터트리는 순간이었다.